이원(李黿 )선생께서 예조좌랑에 재직시 태상관(太常官)의 봉상시(奉常寺)를 겸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의 시호(諡號)를 내리자고 청했다는 이유로, 1498년(연산 4) 무오사화(戊午士禍)때, 평안도 곽산(郭山)으로, 귀양가서 본인의 비통한 심정을 지은 글입니다. 선생께선 이곳에 유배된 후, 2년뒤 1500년(연산 6)에 다시 전라도 나주(羅州)로 이배(移配)되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문인(文人)이라 하여,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벌을 가중시켜 연산군(燕山君)으로 부터 능지처참(陵遲處斬)당했다. 이로서 선생의 부모형제(父母兄第) 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인고의 삶을 겪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