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 2

장만(張晩) 선생 신도비명 병서 - 장유

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 보국숭록대부 행 의정부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 신도비명 [병서] (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 輔國崇祿大夫 行 議政府右贊成 玉城府院君 張公 神道碑銘) [幷序] 금상(今上)께서 천명을 받드신 초기에 조정이 여진(女眞)의 침입을 우려하여 서쪽 변방에 군대를 장기간 주둔시켰는데, 장차 대장군(大將軍)을 임명하여 보내려 할 때 의논하는 자들 모두가 ‘전 대사마(大司馬) 장공(張公) 이외에는 맡을 사람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공을 일으켜 세워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로 삼았다. 그리고는 장차 떠나려 할 때에 상이 친히 교외(郊外)에서 전송하면서 상방(尙方)의 보검(寶劍)을 몸소 내려 주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은 평양(平壤)에 사령부를 개설하고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은 영변(寧..

의정부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만] 묘지명 병서

의정부 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 묘지명 [병서] 議政府 右贊成 玉城府院君 張公 墓誌銘 [幷序]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이식 찬(成均館大司成 知製敎 李植 撰)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 7) 겨울에 진무(振武)의 원훈(元勳)인 옥성부원군 장공이 한성(漢城) 반송방(盤松坊 > 현 서울시 중구 순화동 지역) 저택에 병들어 눕자, 상이 태의(太醫)를 보내 진찰하게 하고 내복약을 계속 대주게 했으며, 날마다 액정(掖庭)의 감사(監史)를 파견하여 병세를 자세히 물어 보게 하였다. 그러다가 11월 모일(某日)에 결국 공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상이 애도(哀悼)하며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였다. 그리고 중관(中官)을 보내 조문(弔問)하고 예관(禮官)에게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였으며, 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