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암 3

연암 박지원선생 묘(燕巖 朴趾源先生墓),

■연암 박지원 묘(燕巖 朴趾源 墓),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1805년(순조 5). 12월 10일(음력 10월 20일)」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필균(弼均)이고,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이다. 황해북도 개성시 은덕동의 황토고개 남쪽 기슭에 있는 그의 무덤이다. 일제의 탄압말살정책으로 그의 무덤도 행처를 모르다가 1959년에 묘지명이 발견되어 처음으로 알려졌으며 2011년도에 북측에서 다시 조성되었다.

서정일록(西征日錄)-이정암 (李廷馣) 씀.

(8월) 27일. 연안(延安)에 머물다. 아들 화(화)가 강화로 돌아갔다. 개성 사람이 돌아간다고 하여 아병(牙兵) 봉억룡(奉億龍)을 함께 가게 해서 유수(留守)의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변을 듣고 하지 못했다. 평산 의병장이 치보(馳報)한 가운데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해주에 주둔한 왜적이 연안(延安)으로 향한다고 했다. 배천 의병장 조응서(趙應瑞)가 치보(馳報)한 속에는 그 수를 알 수 없는 왜적이 배천(白川)으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식후에 남산(南山)에 올라가 대처하며 사방을 바라보니 연염(烟焰)이 하늘을 치솟고 있는데 이는 필시 우리가 전비를 갖추지 못한 틈을 타고 쳐들어오는 것이다. 즉시 한 형(韓형)과 이신갑(李臣甲)을 보내서 호남 의병장[김천일] 및 전라 병사[최 원]에게 ..

사류재 이공 비(四留齋 李公 碑)

■ 연안 사류재 이공(延安 四留齋 李公 碑) 사류재 이정암(四留齋 李廷馣)을 말함. 백사 이항복 찬(白沙 李恒福 撰) 지난 만력(萬曆) 신묘 년에 상(上)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일본의 추장 수길(秀吉)이 바다를 해자(垓子)로 삼고 한쪽 구석을 의지하여 이웃 나라에 공갈 위협을 가하다가, 침학 행위를 우리에게 자행하기 시작하여 끝내는 중국을 침략할 목적에서, 스스로 영웅인 체 교만을 부리면서 불손한 말을 내뱉고 있으니, 그 화복(禍福)의 이치를 엄중히 유시하여 간악하고 광패한 행동을 미리 꺾어서 두 번 다시 방종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임진년에 수인(戍人)이 달려와서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했다고 외치었다. 이때 왜구는 부산(釜山), 동래(東萊)를 함락하고, 재를 넘고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