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 3

이인좌(李麟佐) - 조선 영조때의 역신(逆臣).

■ 이인좌(李麟佐) 1695(숙종 21)∼1728년(영조 4). 조선영조 때의 역신(逆臣). 본명은 현좌(玄佐). 본관은 전주(全州). 청주 송면 출신. 관찰사운징(雲徵)의 손자이며, 윤휴(尹鑴)의 손서(孫壻)이다. 당색이 과격한 소론이었던 그는 영조의 즉위로 소론이 정계에서 배제되자 정희량(鄭希亮)·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박필현(朴弼顯)·한세홍(韓世弘) 등 소론 과격파와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물러난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密豊君)탄(坦: 昭顯世子의 증손)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정권쟁탈을 꾀하였다. 스스로를 대원수라 자칭하고 1728년(영조 4) 3월 15일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군관 홍림(洪霖),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

결국 봉기한 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緩少가 있었다.

■ 결국 봉기한 준소(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완소(緩少)가 있었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3호] 20091206 입력 사회 불안요소 해소의 최선의 방법은 불안요소를 정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6·25 때 농민들의 동조 봉기가 거의 없었던 것은 발발 직전 단행됐던 토지 개혁 덕분이었다. 영조도 재위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 온건파에 정권을 넘기는 것으로 소론의 불만을 수용했기에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지금도 되돌아봐야 할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무신(戊申) 봉기 영수’ 이인좌는 세종 대왕의 4남 임영(臨瀛) 대군의 후손으로 집안 대대로 전형적인 남인 명가 출신이었다. 절반의 성공 영조② 이인좌의 난 영조 4년(1728) 3월 15일 ..

이인좌의난(李麟佐의亂) - 무신년(1728, 영조 4)

■ 이인좌의난(李麟佐의亂) 이인좌(李麟佐 : 1695~1728)의 난은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所論)과 남인(南人)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李麟佐의亂)이라고 하며, 무신년((戊申年)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배경] 경종(景宗)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肅宗)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蓬命)에게 연잉군(延艀君 : 뒤의 英祖)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老論) 측은 경종이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