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태 2

이초려(李草廬)에게 제(祭)를 올린 글(우암 송시열 찬)

[原文] 이초려(李草廬)에게 제(祭)를 올린 글 우암 송시열 찬(尤庵 宋時烈 撰) 숭정 병인년(1686, 숙종12) 6월 계축 삭 20일(임신)에 은진 송시열은 삼가 종소(宗少 일가 되는 아랫사람이란 뜻) 송상엄(宋相淹)을 보내어 간략한 찬구(饌具)로 초려(草廬) 이공(李公)의 무덤에 제(祭)를 올립니다. 아, 나와 공이 함께 노선생(老先生 김장생(金長生)을 가리킴)을 계상(溪上)에서 섬길 때에는 정이 형제와 같아서 서로 깊은 관심으로 보살펴 주었고 학문을 닦고 서로 경계를 해 주면서 두 사람이 다 유치한 생각을 버렸는데, 선생이 돌아감에 미쳐서는 그대로 문경 선생(文敬先生 문경은 김집(金集)의 시호임)을 섬기기를 한결 같이 전날처럼 하여 정의(情義)의 도타움은 더욱 오래도록 변함이 없었으니, 비록 부자..

초려 이유태 선생 묘(草廬 李惟泰 先生 墓)

■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선생 묘. ↑초려 이유태선생 신도비 ↑초려 선생 묘소(후)와 손자(이단몽)의 묘소(전) 전경-상복을 입으신 분은 역사유적을 지키고자 애쓰시는 이성우 교수이시다 귀신도 울고 갈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선생의 유택(幽宅) 충청 땅 대전지역에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선비들이 많이 세거(世居)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른바 충청오현(忠淸五賢-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 미촌 윤선거, 시남 유계 선생을 일컬음)이라 불리우는 대학자들 중 초려(草廬)선생이 있었는데, 그분이 지금 매우 외롭고 처절한 몸부림에 떨고 있다. 어제 예정에도 없던 일정으로 문헌공(文憲公) 이유태 선생 유택(幽宅)을 찾게 되었는데, 과연 그곳에선 귀신도 울고 갈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