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초려 이유태 선생 묘(草廬 李惟泰 先生 墓)

야촌(1) 2011. 12. 11. 01:24

■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선생 묘.

 

 

↑초려 이유태선생 신도비

 

↑초려 선생 묘소(후)와 손자(이단몽)의 묘소(전) 전경-상복을 입으신 분은 역사유적을 지키고자 애쓰시는 이성우

    교수이시다

 

귀신도 울고 갈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선생의 유택(幽宅)

 

충청 땅 대전지역에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선비들이 많이 세거(世居)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른바 충청오현(忠淸五賢-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 미촌 윤선거, 시남 유계 선생을 일컬음)이라 불리우는 대학자들 중 초려(草廬)선생이 있었는데, 그분이 지금 매우 외롭고 처절한 몸부림에 떨고 있다.  

 

어제 예정에도 없던 일정으로 문헌공(文憲公) 이유태 선생 유택(幽宅)을 찾게 되었는데, 과연 그곳에선 귀신도 울고 갈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귀신도 울고 간다” 함은 세상에서 가장 기막힌 일이 일어났을 때 세상 사람들이 쓰는 표현방법의 하나이다.

 

1998년의 어느 날, 한적한 시골의 들녘에 요란한 굉음을 뿜어내는 중장비들이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며 흙먼지를 날리고 있었는데, 소위 수도이전이라는 미명하에 개발되는 도시기반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쯤 이었다.

 

이곳에선 조상의 선영을 지키려는 후손들과 우리나라 대유학자의 문화유산을 수호 보전하려는 충청지역 유림들이 힘을 합하여 정부와 건설업체를 상대로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문헌공께서 잠들어 계신 이곳은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종촌리 산 324번지이다. 선생께서 하세(下世)하신지 320여년이 지나는 동안 평온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봉분이 있는 곳은 마을의 뒷산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임좌병향(壬坐丙向)에 모셔져있다.

 

 

 

그러나 이곳도 세월의 변천에 따라 개발의 압력을 몇 차례 받은 곳이다. 대한제국시절 철도부설계획에 따라 이곳이 철길로 변할 위기에 놓였으나 유림과 후손들의 청원으로 계획을 변경하기에 이르렀고, 일제강점기 때는 방목장으로 만들려다가 역시 반대에 부딪쳐 철회하기도 하였고, 현대화 바람이 불던 70년대에도 철도계획이 있었으나 청원에 의하여 우회 개설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이제껏 잘 보전되고 있었다.

 

그런데 대략 3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행정수도 건설로 인하여 선생의 묘역이 없어질 위기에 놓여 있어 이를 안타까이 여긴 충청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청와대와 관계부서에 진정 및 탄원서를 제출해 놓고 묘역수호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1년 전에 찾았을 때는 없었던 현수막이 묘역 둘레에 걸려 있었는데, 내용은 문헌공 초려선생의 묘역을 원상보존해 달라는 취지의 호소문이었다. 처음엔 필자도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묘역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중에 신도비문을 찾아보고서는 이곳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란 TV프로그램도 있지만,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수장되어버리고 만 초려이유태선생신도비(草廬 李惟泰先生神道碑)

 

신도비(神道碑)는 묘에서 묘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신로(神路 또는 墓路)에 세우는 비석으로 묘의 동남쪽 초입인 길가에 세운다. 이 비에는 비문을 새기는데 대부분이 신도비명 병서(神道碑銘 幷序)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명은 산문(散文)으로 된 본문(本文)과, 운문(韻文)으로 된 시문(詩文)으로 문장을 구성한다.

 

시문은 시부형식(詩賦形式)으로 명문(銘文)을 적어 망자의 생애 행적을 화려하게 수식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지게 한다. 이처럼 신도비는 망자에게는 얼굴이나 마찬가지고, 후손에게는 조상의 유업(遺業)이 자신들의 자부심이 되기도 한다. 그런 신도비가 지금 수장(水葬)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신도비의 가첨석(加檐石)인 팔작지붕 바로 아래에까지 물에 잠긴 흔적이 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을까? 누구나 다 조상은 있는 법인데,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은 과연 어떤 인성(人性)을 가지고 있을까? 매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당국자는 속히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우리의 대유학자인 문헌공 묘역을 원상회복 내지는 후손들의 염원대로 그 지역을 도심공원화 시켜서 그분의 학문과 사상,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보전해 주어야 할 것이다.

 

원래 公의 묘역은 고즈넉한 언덕위에 자리하여 적어도 개발이 되기 전까지는 평화로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마을은 이미 이주되었고 사방은 모두 파 헤쳐져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대 없어져 버렸다. 그저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길게 한숨 쉬고 짧게 탄식하게 하는 안타까움만 남았을 뿐이다.

 

 

 

 

↑이 그림은 신도비가 있었던 본래의 모습이다.

 

초려선생! 그는 누구인가?

초려선생은 1607년(선조 40)에 태어나 1684년(숙종 10) 7월 10일에 향년(享年) 78歲로 하세(下世)하여 9월에 공주 중동(公州 中洞) 집 뒷산에 장사지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조선왕조실록에 1881년(고종 18) 1월에 ‘文憲’으로 시호를 내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원문; 贈諡卒禮曹判書李載兢‘獻簡’; 故吏曹參判李惟泰‘文憲’。참고) 선생은 예학에 정통하였으며, 문집에《초려집(草廬集》등을 남겼다.

 

 

 

公은 선고(先考)이신 유학(幼學) 이서(李曙)와 청풍인(淸風人) 김양천(金養天)의 여식 사이에서 태어난 5남 1녀 중 셋째로, 금산군 노동리(錦山郡 蘆洞里) 집에서 태어났다. 公은 열다섯이 되던 해인 1621년(광해군 13)에 만희 민재문(晚喜 閔在汶)에게서 학문을 하다가 1624년(인조 2)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부자를 사사(師事)하여 성리학과 예학사상을 수학하였고, 스승의 문하생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미촌 윤선거(尹宣擧), 시남 유계(兪棨) 선생 등과 더불어 교우하였다.

 

1631년(인조 9) 3월에 평산인 신방헌(平山人 申邦憲)의 여식과 혼인하여 4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첫째 옹(顒)은 윤문거(尹文擧)의 딸에게 장가들고, 둘째 적(頔)은 송시열(宋時烈)의 손녀에게 장가들고, 셋째는 정(頲)이고, 넷째 고(顧)는 신계징(申啓澄)의 딸에게 장가들고, 막내인 여식은 박태익(朴泰翊)에게 하가(下嫁-시집을 가다)하였다.

 

 

 

대다수 조선의 사대부들 묘역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꾸며져 있는데 반해, 특히 유학자(儒學者)들의 묘역은 수수하기가 이를 데 없다. 오히려 서글픈 마음마저 들기도 하는데 아마도 이는 청렴과 검소함을 나타내는 잣대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이곳을 둘러보니 예외 없이 公의 묘역도 염계 주돈이 선생의 애련설(愛蓮說)을 떠올릴 만큼 도도한 군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시대 대다수의 예학자들은 자신이 죽은 후에 나라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받지 말 것과, 비석을 세우지 말 것과, 조그만 돌의 전면에다 간략한 본관과 조상의 내력과 입지, 행적만을 쓰도록 당부하여 유림인들의 소박하고 검소함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초려이선생지묘/정부인평산신씨부좌

 

公의 묘역은 모두 한 강(岡) 안에 4기의 봉분이 있었는데, 맨 아래쪽은 公과는 관계가 없는 무덤인 듯 하고, 나머지 3기 중 아래쪽의 무덤은 묘표가 없으므로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중앙에 公과 부인의 묘가 있다. 별도의 묘비(墓碑)나 모표(墓表)는 없으며, 다만 상석(床石) 전면에 향로석(香爐石)을 중심으로 동쪽면에 [草廬李先生之墓]라 하였고, 서쪽면에 [貞夫人平山申氏祔左]라 조각되어 있다.

 

묘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이다. 무덤의 형태는 둥근형의 봉분으로 장방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氣)를 많이 받으려는 듯 길게 뻗어 있어 규모면으로 매우 큰 편에 속한 무덤이다. 公의 뒤편(위쪽)으론 장자(長子)인 옹(顒)의 내외 무덤이 있는데, 모두 합장묘(合葬墓)이다.

 

봉분의 배치를 살펴보면 오늘날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데, 당시의 장례풍습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한훤당 김굉필선생, 우재 손중돈선생, 율곡 이이선생, 일두 정여창선생, 회재 이언적선생의 묘역 등이 모두 부인의 묘가 上으로 배치되어 있고, 公의 묘역 또한 아들이 上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를 소위 도장지법(倒葬之法, 즉 逆葬)이라 말하는데, 이는 추사선생이 한 말이라고도 한다.

 

 

 

석물(石物)은 상석(床石) 1, 고석(鼓石) 4, 향로석(香爐石) 1, 혼유석(魂遊石) 1, 망주석(望柱石) 2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는 둥근 머리모양으로 하고, 다음에는 연주(連柱)를 조각하였으며 다음은 운두(雲頭)를 만들었으며, 기둥을 둥글게 하였다.

 

그런데 대다수의 망주석에는 기둥면에 세호(細虎)를 조각하는데 이곳에는 세호 조각이 없다. 기둥을 하단의 대석에 심었다. 이곳 묘역의 3기에 조성된 석물 3셋트는 모두 크기와 조각기법, 돌의 성질로 보아 동시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진다. 아마도 각각의 묘소는 어림잡아 30~50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같다는 점에서 이곳이 초장지가 아닌 이장하여 온 곳으로 보아진다.

 

또 다른 정황은 기록의 “공주 중동(公州 中洞)의 집 뒷산에 장사지냈다”라 하였는데, 그곳은 지금의 공주시내 공주의료원이 있는 지역이다. 그곳에서 이곳 묘역까지는 약 17km가 되는 거리이니, 이로 미루어 대략 짐작되어진다. 公은 1634년(인조 12)에 스승인 신독재의 천거에 의하여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나 몇 달 뒤 그만두었다.

 

이어 1636년(인조 14)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이 되었으나 그 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만두고, 2년 뒤에는 무주의 덕유산 아래에 은병재(隱屛齋)를 짓고 우거(寓居)하였다. 이듬해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대부분의 관직을 마다하고 향리에서 문인들과 강학(講學)하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1648년(인조 26)엔 스승의 상례비요(喪禮備要)를 교정하였으며, 1650년(효종 즉위년) 5월 효종이 즉위하자 부름에 나아갔으나 곧 상소하고 돌아 왔고, 또 공조좌랑에 올랐으나 물러나 공주의 초외(草外)로 이거(移居)하여 살았다.

 

이후 문인들과 함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義)와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하였고, 1655년(효종 6) 신독재에게서 [가례통해(家禮通解)]와 [가례(家禮)] 등을 받아 진산(珍山)으로 이거하였다가 이듬해 공주 초외로 다시 돌아왔다. 이상의 행력에서 일부자료는 초려집 해제문(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였다.

 

조선조 최대 예학사상의 이슈로 등장했던 이른바 예송논쟁(禮訟論爭)의 주역이 되었던 公께서는 1658년(효종 9)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천거로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해 시강원진선과 집의를 거쳐 1660년(현종 1)의 복제시비 때에 호군에 있으면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1년의 복상기간을 주장)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甲寅禮訟) 때에는 복제를 잘못 정했다는 남인 윤휴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남인세력이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된 사건)으로 풀려났는데, 말년에는 송시열과의 사이가 소원(疎遠)해져 유현(儒賢)으로서 외롭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公과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이 얼마나 가까이 교류하였느냐는 초려집 초려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공주 초외에 함께 살기로 하고 지었던 터를 훗날 사람들이 삼현대(三賢臺)라고 이름 붙였을 만큼 이들은 각별한 사이였다.

 

이들 삼현이 함께 살자고 한 것은 스승인 사계선생의 장례일에 올린 연명제문(聯名祭文)에 “한 언덕을 정하여서 세 개의 초막을 짓고 서로 살펴서 서로 유익하게 하여 한결같이 스승님의 가르침을 쫓아 살자”라고 한 것이 그것이었다.

 

훗날 소론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문인들이 고향에다 금산서원(錦山書院)을 세워 제향하였으나, 1713년(숙종 39) 노론에 의하여 일시 훼철(毁撤)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公의 호를 초려(草廬)라 한 까닭은 공이 공주의 초외(草外)에 살았다 하였는데, 바로 이 초외의 우리말이 “새우”라고도 일컫는다.

 

 이 “새우”는 “초오(草塢)”의 차음(借音)으로 여기에서 빌려 초려(草廬)라는 호를 쓰지 않았겠느냐의 추측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公께서는 정치적 권력을 쫓는 리(利) 보다도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의(義)를 더 숭상하였기에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현자(賢者)로 회자되고 있는것이 아닐까 싶다. 

 

끝으로 公의 묘역수호 보전에 관해 하루속히 분쟁이 없어져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 잘 보전되어지길 바라며, 이참에 우리 유림전체가 발벗고 나서서라도 公의 유업(遺業)이 이곳 공주땅에서 세세년년(世世年年) 이어지도록 태산같은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호소해 본다. 

 

[成均館 首善志 명예기자 이효재(기사제보 lee-hyojae@hanma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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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과정에서 한때 훼손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유림과 문중 및 학계의 노력으로 이렇게 멋진 '초려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묘역 능선의 중앙에 위치해있는 초려 이유태 선생 묘.

 

 

 

 

 

↑3기의 묘소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한 묘는 초려 이유태 선생의 장자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옹 선생 묘입니다.

 

 

↑마주 보이는 묘는 초려 이유태 선생의 손자인 쌍계처사(雙溪處士) 이경의 묘이고 그 너머가 바로 초려 이유태

    선생의 묘소입니다.

 

 

 

 

↑초려선생 신도비각

초려 이유태 선생 신도비(草廬 李惟泰先生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