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원 간찰 3

이유원이 수급자 미상에게 보낸 간찰(簡札)

이유원이 수급자 미상에게 보낸 간찰(簡札) 영천이씨 농암종택 신해년 12월에 이유원이 수급자미상에게 보낸 간찰(簡札) 이유원(李裕元)이 보낸 간찰이다. 현재 자신은 입산하여 독서에 전념하고 있음을 알렸다. 늘 그리운 마음이 간절하고, 서찰을 전하는 것이 여의치 못해 안타깝다고 표현했다. 이어 귀댁 가족의 근황과 안부를 궁금해 하였다. 자신은 현재 『논어(論語)』를 탐독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선조의 연보 교열 작업 근황에 대해 언급했다. 이와 함께 조속히 상면하기를 기원하며 마무리했다. 入山讀書。是夙昔所推。而今日之會又不與吾座共之。居常歉悵。果何如哉。每欲奉尺素。以敍厥落白今執事者先之。示以誦什兩絶。其意味雋永淸越。讀之傳香人牙頰也。謹惟歲弊寒兇兩庭候。若序萬寧。餘力之學益懋乎素聞。日與季難。聯槧..

귤산 이유원 선생 간찰

귤산 이유원 선생 간찰 이유원[李裕元. 1814(순조 14)∼1888(고종 2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 묵농(默農).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규장각대교를 거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1865년(고종 2)에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다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領議政)이 되었고,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事)로 서임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반목, 대립하였고, 세자책봉문제의 이면에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