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인 3

시인 이상화의 큰집 사람들

[특집] 시인 이상화의 큰집 사람들 이상화의 큰아버지 소남 이일우 선생의 후손들은 대부호의 자손인 탓인지 대부분 잘 살고 혼맥도 두텁다.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 출판 분야 11명 등등... 또 소남의 직계 후손들은 상화 일족과 달리 지금도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육당 최남선,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연의 끈이 닿아 있다. 상악의 장남 석희 씨는 안두홍 전 경대병원장의 누나 귀홍 씨와 결혼했다. 안두홍 씨의 아들이 안종철 영남의료원장이다. 석희 씨의 자녀는 서남빌딩 주인 재철 씨, 군법무관으로 일하는 손준성 씨의 어머니인 재주 씨, 박영 소남의 맏아들 상악은 딸을 육당의 아들에게 시집보내 사돈을 맺었다. 이 인연으로 상악의 조카인 합희 씨가 ..

민족시인 이상화

영남일보 2005-01-04 09:57:09 입력 [이상화]3.1운동 때 대구서 만세운동 주도한 민족시인.ㅣ 경북 대구에 살고 지고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제52] 이상화 ●글로 몸으로 일제에 저항 ●3·1운동때 학생동원 대구서 만세운동주도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발표 ●후진양성에도 힘써…광복2년 앞두고 숨져 ●題字 : 토민 전진원 ↑아상화시인 고택(대구 중구 계산동)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 가도다. 망각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아가도다. 자갈을 밥으로 해채를 마셔도/ 마구나 가졌으면 단잠을 얽을 것을 인간을 만든 검아 하로일즉/ 차라리 주린목숨 뺏어가거라 ('가장 비통한 기욕(祈慾)' 55, 1925년) 시인의 문학작품은 식민지 대중이 처한 비참하고 고통..

이상화(李相和)

■ 39世 이상화(李相和) 이상화. 1901년 5월 9일~1943년 4월 25일), 본관은 경주(慶州). 호(號)는 무량(無量)·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 경상북도 대구 출신. 아버지는 시우(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일우(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동중학교)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 백기만·이상백(李相栢)과 《거화 炬火》를 프린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