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상화(李相和)

야촌(1) 2010. 7. 16. 01:58

■ 39世 이상화(李相和)

 

이상화.

 

1901년 5월 9일~1943년 4월 25일), 본관은 경주(慶州). 호(號)는 무량(無量)·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 경상북도 대구 출신. 아버지는 시우(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일우(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동중학교)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 백기만·이상백(李相栢)과 《거화 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활동(詩作活動)을 하였다.

 

 21세에는현진건(玄鎭健)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 나도향(羅稻香)· 박영희(朴英熙)등과 함께 《백조(白潮)》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백기만(白基萬)등과 함께 대구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독립운동가인 형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말경 석방되었다.

 

그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오늘달 대륜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조선어와 영어, 작문을 가르쳤고. 학교 교가 작사와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죽었다.

 

문단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欷嘆),1922〉 · 〈단조 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 · 〈이중(二重)의 사망,1923〉 · 〈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고, 복합적인 인습에의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몽환병 夢幻病〉(개벽,1925) · 〈비음 緋音〉(개벽,1925) · 〈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의 사회참여적인 색조로 원숙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이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 嘲笑〉(개벽, 1925)·〈통곡 慟哭〉(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파―란비〉〈신여성, 1926〉·〈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 朝鮮病〉(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 逆天〉(시원, 1935)·〈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情)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의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그는 1943년 3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대구 자택에서 숨졌다.


그의 시비는 1948년 3월 14일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본명 : 구상준(具常浚)]등이 참여하고 죽순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韓國近代詩人硏究(金㶅東, 一潮閣, 1974) ◇文學과 歷史的 人間(金興圭, 창작과 비평사, 1980) ◇ 李相和詩의 硏究史的 檢討(崔東鎬, 이상화연구, 새문社, 1981) ◇現代韓國의 浪漫主義詩에 관한 硏究(金容稷, 서울大學校論文集 14, 1968) ◇파토스와 저항(金埈五, 식민지시대의 시인연구, 시인사, 1985)

 

 

상화시비(尙火詩碑). 

 

이 시비는 1948년 동향인 김소운의 발의 및 그가 재직했던 대륜고등학교 동문의

후원으로 달성공원에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졌다고 한다.


상화시비 전면 : 상화의 대표 시(詩) "나의 침실로"가 새겨져 있다. 아래의 시비 후면 사진을 보면, 이 시의 글자는 당시 11세이던 상화의 셋째 아들 "태희"가 썼다.


상화시비 후면 : 비문의 상세는 아래와 같다.
상화 시비의 글은 문인 김소운(金素雲)씨의 그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詩人(시인) 이상화(李相和)는 1901年 辛丑(신축) 4月 5日 우보(又甫) 이시우(李時雨) 公의 第2子로 태어나 1943年 계미(癸末) 3月 2日 43세로 세상을 떠나니 대구(大邱)는 그 출생지(出生地)요, 종언지(終焉地) 이다.
 
그의 시력(詩歷)은 「백조(白潮)」 동인(同人) 시대에 시작되었으니 향기(香氣) 롭고 분방한 그 시풍(詩風)은 초기의 조선시단에 있어서 청신(淸新)한 일매력(一魅力) 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나의 침실」을 비롯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역천(逆天)」,「이별(離別)」등이 있으니 비면(碑面)에 새긴 시구(詩句)는 「나의 침실 」중(中)의 일절(一節)이다.

흘러간 물의 자취를 굳이 찾을 것 아니로되 시인(詩人)의 조찰한 생애를 추념(追念))하는 뜻과 아울러 뒤에 남은 자(者)의 허술하고 아쉬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자는 생각으로 작은 돌을 새겨 여기 세우기로 한다.

무자(戊子) 정월(正月) 금소(金素) 운식제첨 위창(雲識題簽葦昌) 오세창(吳世昌) 84세서(歲書) 시구유년삼자(詩句遺撚 三子) 태희(太熙) 11세서(歲書) 배명죽농(背銘竹濃) 서동균(徐東均)" 해방 뒤인 1948년 백기만(白基萬), 김소운(金素雲)씨 등의 힘으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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