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전서숙 44

중국 이상설선생 전람관 방문

■ 중국 이상설선생전람관 방문 [訪問日字] 2011. 10. 20(木)~2011. 10. 23(日)/3박4일 [訪問目的] 李相卨先生 展覽館 記念碑 再立式 參席 [所在地] 中國 吉林省 龍井市 民生街 789號 龍井中學 [電 話] 86-433-3223649 ↑이번에 새로이 건립한 이상설선생전람관준공기비 ↑필자 입니다. ↑이필우(李弼雨) 경주이씨중앙화수회장과 도화수 여사 내외분. ↑최측에 계신분이 박철(朴哲) 용정중학 교장입니다. 앞줄 좌측이 필자 입니다.ㅎ ↑이상근(李相根) 기념사업회장. ↑우리의 독립운동 선현들이 다녔든 만주 대성중학교(오늘날 용정중학교) 옛 건물. ↑박철 교장에게 기념비 건립공사에 따른 감사패와 기념품을 증증하다. ↑이상설 정자 ↑이필우 회장께서 용정실험소학교 임금순 교장을 대리하여 임정숙..

근대수학의 아버지 이상설선생.

헤이그특사 이상설선생이 쓴 '數理'에 현대수학 등장 '수학 독립' 한국의 근대수학 자생적 연구 밝혀져… 日 "한국에 수학전수" 주장 근거 잃어 한국의 근대수학은 구한말 이후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 일본수학계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최근 조선의 근대지식인들이 자생적으로 수학을 연구했다는 사실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1899년 완성된 수학서 '수리(數理)'이다. 이 책에는 '正弦(정현·현재의 sin)', '餘弦(여현·cos)', '正切(정절·tan)'처럼 표현만 다를 뿐 그 의미는 오늘날과 똑같은 삼각함수 공식이 등장한다. 또 ³√182284263 = 567 같은 세제곱근 문제,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의 제곱은 나머지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2차 방정..

조국 광복의 지도자 보재 이상설선생 사적비

■조국 광복의 지도자 보재 이상설선생 사적비 조국을 찾아 민족의 정기를 세우려던 수많은 애국지사들 중에서도 광복의 최고 지도자는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이시다. 이상설 선생은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에워쌌던 무렵인 1870년(고종 7년) 12월 7일 이곳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탄생하시었다. 선생의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본관은 경주이씨(慶州李氏)이고, 고려 말의 명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22대 손이 되시며, 어려서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내시던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出系=양자)하여 학문에 전심하시었다. 선생은 25세가 되던 해인 1894년 갑오문과(甲午文科)에 급제하시고, 이미 율곡(栗谷) 이이(..

이상설선생 뉴욕항 입국 기록 발견

[뉴스데스크] 일제시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됐던 이상설. 이위종 선생 등이 1900년대 초 미국 뉴욕항에 입국했던 기록이 처음으로 발견됐습니다. 특히 안창호 선생의 1911년 입국 기록에는 한일합방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국적이 코리아로 돼 있는데, 이 기록들은 미국의 한 재단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 대학생이 찾아내 뉴욕 총영사관에 전달했습니다. (SBS)

보재 이상설선생 건국훈장 공적 내용

[독립기념관] 12월의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선생 전시 | 기사입력 2005-11-30 16:20 | 최종수정 2005-11-30 16:20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북간도 용정촌에 근대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 학생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네덜란드 헤이그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무효화와 일제침략의 실상을 열강에 호소하며, 한인단체의 통합을 추진.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는데 크게 기여한 보재 이상설 선생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고자 12월 한 달 동안 일제침략관 입구에서 전시한다. ■ 보재 이상설 선생 공적 내용 보재 이상설 선생(1870. 12. 7∼1917. 03. 02.금요일)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 ..

서전서숙의 영향

연변통보 l 향도의 등불 2009년 02월 06일(수요일) 서전서숙의 영향 반일‧항일운동가 가운데서 선구자로 불리었던 규암 김약연(1868~1942) 선생은 1899년 2월에 조선 종성읍과 회녕읍에서 4개 가문, 22가속, 141명(김약연 가속 31명, 김하규 가속 54명, 문병규 가속 49명, 남도천 가속 7명)을 동원하여 집단적으로 화룡현 명동촌에 이주, 정착하였다. 1901년에 규암 김약연 선생은 ‘규암재’라는 서당을 꾸렸고 소암 김하규 선생은 ‘소암재’라는 서당을, 남위언은 중영툰에 서재를 꾸렸다. 이런 서당들은 구식 유교구학서당으로 시대에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다 1906년 용정에 세워진 ‘서전서숙’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변화하는 시국과 근대 문화교육의 수요를 감안한 김약연, 정재면..

항일교육기관 "서전서숙" 재조명

■ 항일교육기관 "서전서숙" 재조명 보재 이상설이 이동녕, 여준 등과 함께 1906년 만주에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현 중국 용정 실험소학교)을 세운 지 올해로 100주년.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재정)는 이를 기념해 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 독립과 서전서숙’이란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어 서전서숙의 역할을 재조명했다. 서전서숙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맞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항일교육 학교였다. 이상설의 민족운동과 서전서숙의 근대교육사 위상을 되짚은 이날 학술대회에서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는 ‘한국 근대사상 간도와 독립운동, 서전서숙’을, 최홍빈 중국 옌볜대 교수 는 ‘서전서숙과 조선족 사회’를 주제로 발제했다. 정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