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灘集 2

石灘 李存吾先生祀壇碑銘 - 譯文

■ 석탄선생사단비명(石灘先生祀壇碑銘) - 譯文 아! 선생은 뛰어난 기운을 타고난 인물이다. 평생의 지절(志節)을 보건대 열일추상(烈日秋霜)보다도 늠늠(凜凜)하고 태산교악(泰山喬嶽)보다도 높으니, 하늘이 선생을 낳게 한 것이 우연치 않은 것이다. 고려말기(高麗末期)에 국정(國政)이 문란하여 요망한 신돈(辛旽)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니 선생과 같은 직도(直道)가 어찌 협박을 당하고 요사(夭死)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고려오백년간관(高麗 五百年 諫官)중에 제일가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고 알게 된 것이다. 선생(先生)은 경주이씨(慶州李氏)니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諱) 알평(謁平)으로 시조(始祖)를 삼고 휘 숙진(淑眞)은 상서중승(尙書中丞)이요, 휘 예(芮)는 감찰규정(監察糾正)이요, 휘 ..

이존오(李存吾)의 옥사(獄事)

■ 이존오(李存吾)의 옥사(獄事) 1366년(공민왕 15) 4월초.최영장군이 귀양을 간지 일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국권을 한손에 휘어잡은 신돈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으나, 조정대신 모두가 그 위세에 눌려 감히 탄핵을 하지못하고 있을때였다. 임금보다 더 큰 권력을 쥐고있는 신돈의 잘못을 간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우정언 이존오(李存吾)는 약관 26세였다. 그는 58년 전 충선왕이 복위한 해(1308)에 우탁(禹倬)이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린것을 떠올렸다. 그는‘ 나라가 어지러운데 침묵하는 건 참선비가 아니다 ’ 라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추(鄭樞)와 함께 목숨을 걸고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방약 무도한 신돈(辛旽)은 말에 오른체 궁궐을 드나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