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옛 사람들의 초상화 117

유순정(柳順汀) 초상화

조선전기 숭정대부,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지옹(智翁), 호는 청천(菁川). 유이(柳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자해(柳子偕)이다. 아버지는 목사 유양(柳壤)이며, 어머니는 정집(鄭楫)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활을 잘 쏘아서 무인 중에서도 비교할 자가 드물었다. 1487년(성종 18) 진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홍문관전적에 임명되었다. 그 뒤 훈련원정으로서 전라도 지방에 침투한 왜적을 수색, 포획하는 데 힘썼고, 1491년 함경도평사로서 도원수 허종(許琮)의 막료가 된 뒤 평안도평사를 역임하였다. 유순정 초상 유순정(柳順汀,1459~1512)은 연산군을 폐위한 일등공신으로 정국공신에 책봉되었rh. 위 은 그때 그려진 공신상으로,..

이포(李褒) 초산화

이포『李褒,?~1373(공민왕 22) 』 고려후기 검교시중을 역임한 관리.문신.본관은 성주(星州). 아버지는 예문관대제학 이조년(李兆年)이다. 아들로는 이인복(李仁復), 이인임(李仁任), 이인미(李仁美), 이인립(李仁立), 이인달(李仁達), 이인민(李仁敏) 등이 있다. 벼슬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하여졌다. 성품이 순박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1372년 왕이 손수 이포의 초상화를 그려서 아들 이인임에게 내려주는 영예를 입었다. 시호는 경원(敬元)이다. 도 처럼 성주 이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건데, 어딘가 모르게 비율이 어색해 보이지 않습니까? 후대에 석지 채용신(1850~1941)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있는 그대로 옛 사람을 그리게 되면 비율이 어색해..

영조(英祖) 초상화

20살 연잉군 시절 영조의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50살 때 영조의 모습. 영조의 초상화 2점은 불 속에서 살아남았다. 국립고궁박물관 가장 운이 좋았던 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조선 왕 가운데 유일하게 2점의 어진이 남아 있다. 2점 모두 1954년 부산 창고의 불 속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하나는 연잉군(왕자) 시절인 1714년 20살 때의 앳된 모습이다. 아버지 숙종 이돈이 선물로 그려준 것이다. 가뭇한 수염과 매부리코, 어두운 표정이 인상적이다. 또 1점은 누구나 아는 어진으로 1744년 50살 때 모습이다. 인생의 절정기에 있던 영조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 영조는 20살 때부터 거의 10년마다 7번 이상 어진을 그렸다. 1954년 부산 창고에도 6점이 있었으나, 2점만 살아남았다. 이성계..

철종 초상화

철종(죄인의 신분으로 시골에서 농사짓고 옆집 노비랑 사랑을 하던중 하루아침에 왕이됌) 일부 불에 탄 철종(哲宗)의 초상화. 국립고궁박물관 왕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어진 영조 어진 2점과 함께 부산 창고의 불에서 살아남은 철종의 어진도 있다. 철종 어진은 오른쪽 3분의 1만 타서 얼굴이 크게 상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어진 중 유일하게 군복을 입고 있다. 철종 어진은 둥글고 큰 눈, 쌍꺼풀, 사시(사팔눈), 멍한 표정 등으로 인해 왕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선 왕들의 어진은 조선 전기엔 경복궁 선원전(景福宮 璿源殿)에 모셔졌고, 건국자인 이성계 어진은 전국 5곳에도 분산돼 있었다. 임진왜란 뒤엔 창덕궁 선원전(昌德宮 璿源殿)과 영희전(永禧殿: 태조ㆍ세조ㆍ원종ㆍ숙종ㆍ영조ㆍ순조의 영정을 모셨던 전각/현..

세조 초상화

조선전기 제7대(재위:1455~1468) 왕. 생졸년 : 1417년(태종 17)~1468년(세조 14) -----------------------------------------------------------------------------------------------------------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 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세조의 모습. 초상화 초본(데생)만 남아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이조년 초상화

이조년(李兆年,1269~1343). 손에 뭘 들고 있었던 걸까? 이조년(1269~1343)은 명신이자 시인이었고, 또 훌륭한 손자(...)를 둔 덕택에 덩달아 유명하기도 합니다. 은 발립을 쓴 모습을 담았습니다. 1744년 이모한 것인데, 당시의 화풍에 따라 호피를 추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래 에서 이조년은 염주를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1559년 성주의 영봉서원을 건립할 때 이것이 문제가 되어 제향이 거절당했고, 결국 후손들이 이모하며 왼손에 든 염주를 뺀 것으로 보입니다. 아쉽게도 위 은 현재 도난당해 소재를 파악할 수 없는 상태고, 다른 하나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 중입니다. 사실 종가에서 보관하는 조상들의 초상은 도난이 용이한 편입니다. 환수했지만, 도 무려 18년 가량 해외를 떠돌아야 했습..

경신공주(慶愼公主) 초상 - 태조 이성계의 적 장녀

■경신공주(慶愼公主) 초상 - 태조 이성계의 적 장녀 은 태조의 적장녀인 경신공주(?~1426)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거이(李居易, 1348년~1412년) 의 장남 "이애(李薆, 1363년~1414년 음력 10월 6일)" 와 혼인하였다. 경기도박물관에서 소장한 은 남편인 과 한 세트로 제작된, 일종의 '부부병좌상'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외모와 몽골식 복장이 특징적인 은 원본의 박락과 훼손이 심한 편입니다. 사실, 조선 초기엔 여성의 용모를 모사한다는 것이 그렇게 터부시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후기로 들어서며 성리학적 관념이 심화하며 여성 초상화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런 면에서 은 꽤나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경신공주 부부 묘 :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 산4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