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한음 이덕형 행장(漢陰李德馨行狀)

야촌(1) 2021. 4. 14. 16:39

■ 한음 이덕형 행장(漢陰李德馨行狀)

 

    이덕형『李德馨, 1561년(명종 16) ~ 1613년(광해군 5)』

 

지은이 :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

 

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덕형(德馨)이며, 자는 명보(明甫)이고 자호(自號)는 한음(漢陰)이다. 족계(族系)가 광주(廣州)에서 나왔는데, 명망이 있는 가문이다.

 

그 선대 가운데에 이름난 분들이 있으니, 고려 말에 집(集)이라는 분이 있어 문장(文章)과 기절(氣節)로 세상에 크게 이름이 났다. 신돈(辛旽)이 그의 곧음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하자, 아버지를 업고 도망쳐 영천(永川) 땅에 숨어 살다가, 신돈이 주벌된 뒤에야 비로소 돌아왔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아주 친하게 지냈다. 지금 《포은집(圃隱集)》 가운데에 <둔촌을 곡하다.[哭遁村]>라는 시가 있는데, 둔촌은 바로 이분의 호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인손(仁孫)이란 분이 있어 관직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희공(忠僖公)이다. 또 극균(克均)이란 분이 있어 관직이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연산군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화를 당하였다. 이분이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는 휘가 세준(世俊)으로,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지내고 중묘조(中廟朝=중종)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화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증조는 휘가 수충(守忠)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고는 휘가 진경(振慶)으로, 어질어서 뛰어난 행실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셨으며,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고는 휘가 민성(民聖)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비(妣) 유씨(柳氏)는 현령(縣令)을 지낸 유예선(柳禮善)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신유년(辛酉年,1561, 명종 16)에 출생하였는데,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자질이 있었다. 침착하고 굳세고 순후하고 신중하여 장난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8세 때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뜻에 대해 알려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의정공이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능히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자, 다시는 더 묻지 않으니, 의정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11세 때 글을 지어 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12세 때 대성(大成)하여 장편(長篇)과 대작(大作)을 붓 가는 대로 도도하게 써 내려갔다. 14세 때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지나가다가 들러 서로 손을 잡고 수석(水石)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율시(律詩) 한 수를 짓자 공이 화답하는 시를 지어 이르기를, “들판은 넓어서 저녁 빛은 얇고, 물은 밝아서 산 그림자 많네.[野闊暮光薄 水明山影多]”라고 하니, 양사언이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스승이다.” 하였다.

 

만력(萬曆) 경진년(庚辰年,1580, 선조13)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뽑혀 들어갔다가 곧바로 한림(翰林)의 천거에 뽑혔는데, 장인인 이산해(李山海)와 외삼촌인 유전(柳琠)의 친족이라는 혐의스러움이 있어 강(講)에 응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선조가 장차 《훈의강목(訓義綱目)》을 강(講)하려고 하면서 재주가 있는 신하를 뽑으라고 명하고는 특별히 내장(內藏)하고 있던 어질(御帙)을 하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충분히 익혀서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는데, 모두 다섯 사람을 선발하는 가운데 공이 뽑혔다.

 

임오년(壬午年,1582, 선조 15)에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한강에서 유람(遊覽)하였는데, 공이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수행하였다. 왕공(王公)이 공의 명성을 듣고는 서로 만나 보고자 하자, 공이 ‘예에 있어서 다른 나라의 신하와는 사사로이 만나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니, 왕공이 감히 억지로 만나 보지 못하였다.

 

그러고는 절구 한 수를 지어 보내어 신교(神交)를 맺었는데, 그 시 가운데 “널따란 길 천리에서 천리마를 보았다네.〔通衢千里見神駒〕”라는 구절이 있었다. 얼마 뒤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고사(故事)에 옥당(玉堂)의 참하관(參下官)으로서 사가독서하는 것을 첫째가는 청망(淸望)으로 여겨 영주(瀛洲)에 오른 것에 비기기까지 하였다.

 

공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이 선발에 뽑혔는데, 시론(時論)이 흡족하게 여기면서 제대로 인재를 뽑았다고 하였다. 당시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문형(文衡)을 잡고 있으면서 실제적으로 이 선발을 주관하였는데, 어떤 한 재상이 한밤중에 이이를 찾아가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두 이씨(李氏)가 과연 인망(人望)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향(意向)이 어떠한지를 모르니, 가벼이 이끌어 주어서 혹시라도 시사(時事)를 어그러뜨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공이 말하기를, “사람을 천거함에 있어서는 인재를 얻는 것이 귀한 법입니다. 그러니 어찌 의향이 어떠하냐를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다투었으나 한밤중에 이르러서도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을유년(乙酉年,1585, 선조 18)에 상이 서총대『瑞葱臺: 임금이 무관(武官)의 활 쏘는 것을 점검하던 대(臺)』에 행차하였는데, 공이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차지하니, 이로부터 명성이 더욱 자자해져 감히 겨룰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문신들에게 명하여 대정(大庭)에서 시재(試才)하게 하였는데, 같은 반열에 있으면서 벼슬길을 다투는 자들이 승정원에 묻기를, “내일도 이덕형이 또 수석을 차지할 것인가?” 하였다.

 

공이 그 소리를 듣고는 다음 날 병을 칭탁하고 응시하지 않으니, 식자들이 큰 그릇감으로 여겼다. 부수찬에 승진되었다가 정언, 부교리, 이조 좌랑을 역임한 다음 교리로 옮겨졌는데, 벼슬길에 있는 것이 학문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그러자 상이 그 뜻을 가상스럽게 여겨 체차한 다음 직강(直講)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무자년(1588, 선조 21)에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가 조빙(朝聘)을 왔다. 상이 관계되는 바의 일이 아주 중대하고 또 현소는 문장의 재주가 있으니, 선위사(宣慰使)를 잘 가려 뽑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전조(銓曹)에서 공을 뽑아 전지(傳旨)에 응하니, 상이 특별히 공을 이조 정랑으로 옮기고서 보내게 하였다.

 

공이 이르자 현소 등이 멀리서 공의 의표(儀表)를 바라보고는 깜짝 놀라 공경심을 일으켰다. 서울에 들어감에 미쳐서는 보빙(報聘)하기를 온 힘을 다해 청하였는데, 조정의 의론이 어렵게 여겼다. 어느 날 공이 연석(宴席)에서 차분히 말하기를, “두 나라가 서로 우호를 닦음에 있어서는 본디 신의를 중하게 여기는 법입니다.

 

지난번에 우리나라의 역적 사화동(沙火同)이 일본으로 도망쳐 들어가 적왜(賊倭)들을 꾀어 이끌고 와 우리나라의 변방 백성들을 약탈하였는데도 그대 나라에서는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신의라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갑작스럽게 보빙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현소 등이 급하게 졸왜(卒倭)를 보내어 한 달도 채 못 되어 사화동 및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100여 인을 데리고 와 바치니, 상이 몹시 가상하게 여겼다.

 

경인년(庚寅年,1590, 선조 23)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시켜 제수하고는 은대(銀帶)를 하사하였다. 가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는데, 공은 상소를 올려 너무 빠르게 승진하였다고 하면서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서차(序次)에 따라서 우승지로 옮겨졌으며,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대사성(大司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신묘년(辛卯年,1591, 선조 24)에 귀근(歸覲)하기 위하여 말미를 받으니, 상이 표피(豹皮)로 된 욕(褥)을 하사하여 가지고 가게 하였는데, 이는 아주 특별한 은혜였다.

 

얼마 있다가 품계가 승진되니 특별히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공은 젊은 나이에 등급을 뛰어넘어 빠르게 승진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며, 또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문형(文衡)을 맡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라는 이유로, 여러 차례 상소하여 간절하게 사임시켜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상은 너그러운 말로 장려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임진년(壬辰年,1592, 선조 25) 봄에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체차되고 중추부(中樞府)에 제수되었다. 4월에 일본이 대거 쳐들어오면서 이 선위사(李宣慰使)를 만나 화친(和親)에 대해 의논하고 싶다고 선언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적들이 깊이 들어왔는데 어찌 어렵다는 이유로 사피(辭避)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들어가 면대해서 가게 해 주기를 청한 다음, 단기(單騎)로 용인(龍仁)으로 달려가니, 적들이 이미 깔려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도로 돌아와 한강(漢江)에 도착하니, 대가(大駕)가 이미 서쪽으로 행행(幸行)한 뒤였다. 이에 사잇길을 따라 올라가 평양(平壤)에 이르러서야 어가를 따라잡았다. 왜적들이 패강(浿江)으로 압박해 들어와서 또 공을 만나 보기를 요청함에 따라 공이 한 척의 쪽배를 타고 가 강 한가운데에서 만나 보았다.

 

이날 강 언덕에 서서 바라보는 여러 신하들과 장수들이 모두들 두려운 마음에 실색을 하였는데, 공은 적을 만나 보면서도 사기(辭氣)가 태연자약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의 죄를 꾸짖기를, “너희들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군사를 일으켜 수백 년 동안 통호(通好)해 오던 것을 무너뜨렸으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자, 현소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길을 빌려서 대명(大明)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비유하자면 마치 다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득불 먼저 울타리를 철거하는 것과 같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가 부모로 섬기는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협박해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그러니 나라가 망할지언정 길은 빌려 줄 수가 없다. 이로부터 두 나라 사이의 우호 관계는 끊어진 것이니, 어찌 화친에 대해서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목소리와 기운이 모두 강직하여 왜적들이 감히 다시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그 뒤에 현소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창황스러운 즈음에도 언어와 기색이 지난날 연회석에서 보았을 때와 다름이 없으니, 남들로서는 미칠 수가 없는 바이다.” 하였다. 공은 이 왜적들은 우리나라에서 대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헤아리고서 중국 조정에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려고 하였는데, 대신이 곤란하게 여겼다. 이에 공이 굳게 간쟁하니, 상이 그 의론을 옳게 여겨 공을 파견하여 요동(遼東)으로 가게 하였다.

 

중국의 순안(巡按) 학걸(郝杰)이 공의 말투가 강개한 것을 보고 애처롭게 여겨 얼굴빛을 고치고는 곧바로 편의에 따라 조승훈(祖承訓) 등 세 장수를 파견해 먼저 적의 예봉(銳鋒)을 맛보게 하였는데, 모두 패하여 돌아왔다.

 

이에 중국 조정에서는 드디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파견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동쪽으로 정벌을 나서게 하였다. 다음 해 봄에 중국의 대군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 공은 대사헌으로서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 당시에 삼경(三京)이 모두 폐허가 되고 팔로(八路)가 모두 무너진 탓에 모든 일들이 탕연하기만 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공은 그 사이에서 주선함에 있어 온 힘을 다하고 마음을 애태우면서 날마다 여러 장수들을 접대하고 꼴과 군량을 조달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러자 제독이 몹시 기뻐하였다. 드디어 평양에서 승리하고 송경(松京)을 회복하였다. 상은 그 공을 훌륭하게 여겨 직질을 올리고 형조 판서로 삼았다.

 

4월에 중국 군사들이 한양(漢陽)에 들어왔는데, 병화(兵火)가 휩쓸고 간 뒤끝이라 굶어 죽은 시체들이 길에 가득하였다. 공은 남은 군량을 끌어 모아 사민(士民)들을 진휼(賑恤)하였는데, 구활하여 살린 사람들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보다 앞서 상이 숙천(肅川)에 계실 적에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을 시켜 어가(御駕)를 호위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서애(西厓) 유 상국(柳相國)과 마음을 합해 규획하여 그 일을 더욱 확장시켰는데, 진을 설치하고 병기를 만들고 하는 것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모방해서 하였으며, 둔전(屯田)을 널리 설치해 군수(軍需)를 돕게 하니, 공사(公私) 간에 모두 이를 힘입었다.

 

갑오년(甲午年,1594, 선조27) 여름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상은 국사가 어렵고 위태로운데 공이 아니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겨울에 기복(起復)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공이 아홉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서 기복하지 않으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적들이 물러가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이 조정에 나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하였는데, 말뜻이 아주 간절하고 준엄하였으며, 명령에 따라 조정으로 나오라고 재촉하였다.

 

이에 드디어 억지로 조정으로 들어왔다. 이조 판서를 거쳐서 병조 판서로 옮겨졌다.

을미년(乙未年,1595, 선조28)에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호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가 얼마 뒤에 패하여 복주(伏誅)되었다.

 

남은 잔당들을 체포하여 국문하게 됨에 미쳐서는 역적들이 공의 훈명(勳名)이 성대한 것을 빙자하여 공을 끌고 들어갔다. 이에 공은 40일 동안 석고대죄(席藁待罪)하여 명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는데, 상이 따스한 내용의 비답을 내리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부득이하여 일을 보면서 또다시 열 차례나 상소를 올려, 비로소 체차되는 것을 허락받았다. 병신년(1596)에 도로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정유년(丁酉年,1597, 선조30)에 왜적들이 다시금 준동하였다. 천자가 사대장(四大將)을 파견하여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도록 하고는 어사(御史) 양호(楊鎬)를 감군경리조선사(監軍經理朝鮮事)로 삼았다.

 

양호는 나이가 젊은 사람으로서 협기(俠氣)가 있어 천하의 선비들을 모두 깔보는 탓에 걸핏하면 기세를 돋우고서 다른 사람들을 능멸하였다. 그러므로 선성(先聲)이 이르러 오자 사람들이 모두들 겁을 내면서 두려워하였다. 상은 공이 전에 이 제독(李提督)의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능히 상하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다는 이유로, 가서 양호를 맞이하게 하였다.

 

양호가 공을 한 번 보고는 마음이 쏠리기를 마치 옛날 친구를 만난 듯이 하였다. 공은 이로 인하여 말하기를, “지금 왜적들이 이미 경기 지방을 핍박하고 있는데, 만약 한강을 지켜 내지 못한다면 일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이제 능히 앞으로 달려 나아가 도성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만 한다면 왜적들의 형세를 막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양호가 그 말에 따라 곧바로 단기(單騎)로 말을 달려 도성으로 들어와 싸움을 독려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였으며,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직산(稷山)에서 왜적들의 예봉을 대파하니,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 등이 모두 패주하였다.

 

양호가 남하하여 도산(島山)을 포위한 다음 외성(外城)을 함락시키자 왜적들이 퇴각하여 토굴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으면서 조석 간에 항복할 판이었다. 그런데 마침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려 인마가 얼고 굶주렸으므로 중국 군사들이 험고한 곳에 주둔해 있기만 하였다.

 

당시에 공은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기운을 더욱 가다듬으면서 조금도 좌절되지 않으니, 양호가 몹시 기이하게 여겨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이 배신(李陪臣)은 비록 중국 조정에 있더라도 마땅히 묘당(廟堂)의 자리를 맡을 만하다.

 

그런데도 아직 백료(百僚)의 자리에 있으니, 또한 이상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얼마 뒤에 양호가 참소를 받아 중국으로 돌아갔으며, 공은 조정으로 돌아왔다. 무술년(戊戌年,1598, 선조 31)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제독 유정(劉綎)이 장차 남하하려고 하면서 상에게 말하기를, “조선에서 제일가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사람을 얻어 함께 갔으면 합니다.”하니, 상이 우의정으로 있는 이항복(李恒福)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의중에 둔 사람이 있는 것인가?”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반드시 이덕형일 것입니다.”하니, 상이 드디어 종정(從征)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유정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길 것입니다.” 하였다.

 

군사가 순천(順天)에 도착하자 적추(賊酋) 평행장(平行長)의 형세가 더욱 궁박해져 성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고 나오지 않았다. 유정은 성품이 교활하여 싸우기를 꺼리면서 공만 탐하였다. 이에 간첩을 들여보내어 소서행장(小西行長)에게 몰래 말해 그로 하여금 도망쳐 돌아가게 하고, 이를 자신의 공으로 삼고자 하였다.

 

공은 홀로 그러한 정상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밤중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에게 급히 통보하여 그로 하여금 주사제독(舟師提督) 진린(陳璘)과 함께 바다 한가운데에서 요격하게 하여 대파하였다. 공은 유정이 한 짓이 미워서 몰래 조정에 아뢰었는데, 공과 틈이 벌어져 있던 자가 이 사실을 떠들어 대어 유정으로 하여금 그 말을 듣게 하였다. 그러자 유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나의 30년 공명이 이덕형으로 인하여 모두 다 무너지게 되었다.” 하였다.

 

기해년(己亥年,1599, 선조 32)에 홍여순(洪汝諄)이 이 일을 가지고 몰래 공을 탄핵하였다. 공이 상소를 올려 해직시켜 주기를 요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심사(心事)는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으니 광풍괴우(狂風怪雨)가 제아무리 발작하고자 하더라도 그 본체는 참으로 예전 그대로이다.

 

경은 이미 안으로 자신의 마음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밖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 그러니 유씨(劉氏)의 아들이 어찌 능히 나라를 해치고 경에게 흉측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스스로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서 여러 차례 사직하여 체차된 다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신축년(辛丑年,1601, 선조 34)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남쪽 지방에 한 해 남짓 머물러 있으면서 군정(軍政)을 진숙(振肅)시키고 민폐(民弊)를 제거하니, 남쪽 지방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냈다. 공은 특히 왜적들의 형세를 헤아리는 데 뛰어나 계책을 세움에 있어서 잘못된 계책이 없었다. 어느 날 왜사(倭使) 귤지정(橘持正)이 서계(書啓)를 가지고 나와 공갈을 하면서 화친을 구하고자 하였다.

 

공은 ‘이것은 필시 마도(馬島)에서 사칭(詐稱)한 것이지, 일본에서 가지고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여겨, 상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다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일본은 반복무상(反覆無常)하여 믿을 수가 없다는 이유로 본국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으면서 뒷마무리를 잘할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이러한 때 경솔하게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러고는 이에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중국 군사들을 끌어모아 한 둔(屯)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여 주었으며, 형 군문(邢軍門)에게 게첩(揭帖)을 보내어 보고해 유왜고시(諭倭告示)를 내어 부영(釜營)에 내걸어 놓아 왜적들이 공갈하면서 위협하는 계책을 꺾었다. 변경 지역이 지금까지 무사한 것은 공의 덕분이다.

 

임인년(壬寅年,1602, 선조 35)에 조정으로 들어와 영의정이 되었다. 계묘년(1603)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이변이 일어나자, 상이 이품관(二品官) 이상에게 명하여 시정(時政)의 득실에 대해 말하게 하였는데, 공은 일에 대해 말하였다가 성상의 뜻을 거슬러 엄한 내용의 전교를 받았다.

 

이에 곧바로 병을 핑계 대고 해직시켜 주기를 요청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선무 공신(宣武功臣)과 호성 공신(扈聖功臣)의 여러 공훈을 녹훈(錄勳)하라고 명하면서 하교하기를, “이덕형은 왜적들이 몰아쳐 들어오던 날 조각배 하나를 타고 가서 적추(賊酋)를 만나 보았는데, 이는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면서 녹훈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공이 여덟 차례나 차자를 올려 강력히 사양하였으나, 상은 고집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공훈을 감정(勘定)하는 날에 유영경(柳永慶)이 수상으로 있으면서 공이 사양하기 위해 올린 차자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실제의 기록이다. 한음(漢陰) 노인네가 녹훈을 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면서, 마침내 녹훈하지 않으니, 물의(物議)가 억울하다고들 하였다.

 

무신년(戊申年,1608, 선조41)에 선조가 승하하여 재궁(梓宮)이 아직 빈전(殯殿)에 있었는데,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삼사(三司)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안율(按律)하기를 청하니, 광해군(光海君)이 대신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공은 좌상 이항복(李恒福)과 말을 같이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온전히 하여 임해군으로 하여금 죽음에는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상소를 올려 진달하면서 “이 의론은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 역시 차자 안에서 언급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당시에 논하는 자들이 온 힘을 다해 시끄러이 공격하면서 역적을 비호한다고 지목하였다. 이로부터 조정의 의론이 드디어 양쪽으로 나뉘어져, 시간이 갈수록 더 격렬해졌다. 이보다 앞서 광해군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중국 조정에서 “장성한 자를 놓아두고 어린 자를 세웠다.”라고 하면서, 동궁으로 책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고부사(告訃使) 이호민(李好閔)이 도착하자, 중국 조정에서는 엄일괴(嚴一魁)와 만애민(萬愛民) 두 차관(差官)을 파견하여 임해군이 미치광이 병을 앓고 있는 상황을 조사하게 하였다. 어느 날 차관이 어전(御前)에서 그 허실에 대해 직접 대놓고 질문하였는데, 입시하고 있던 여러 신하들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라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광해군이 공을 명소(命召)하여 들어오게 하였는데, 공이 들어가서 말하기를, “동생을 보고 형에 대해 증명하게 하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안 되는 일이다.” 하니, 차관이 감히 다시는 더 캐묻지 못하고서 물러갔다.

 

당시에 중국 조정에서는 논의가 분분하여 즉시 책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호민이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러 달 동안 허락을 받아 내지 못하였으므로, 온 나라 안이 황황해하였다.

 

광해군이 공에게 명하여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 공은 ‘이제 차관이 장차 출발하여 돌아갈 것인데, 불행히도 무함하는 말이 먼저 들어가게 되면 사신이 뒤늦게 가 제아무리 온 힘을 다해 변론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경사(京師)에 도착해서 실상을 낱낱이 갖추어 진달하느니만 못하다.’라고 여겼다. 그러고는 밤낮없이 길을 가 27일 만에 경사에 도착하였으며, 5개월 동안을 머물러 있으면서 정문(呈文)을 올려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광해군이 몹시 기뻐하면서 공의 아버지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리고 판결사(判決事)에 제수하게 하였으며, 아들에게는 6품관의 직을 제수하고 토전(土田)과 장획(臧獲)을 배로 주게 하였다. 기유년(己酉年,1609, 광해군 1) 가을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임자년(壬子年,1612, 광해군 4) 봄에 해서(海西)의 역옥(逆獄)이 일어나 진신(搢紳)들 가운데 이름난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계축년(癸丑年,1613, 광해군 5)에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등, 옥사가 아주 많이 일어나 궁금(宮禁)을 무함하여 끌고 들어가는 것이 임자년에 비해 더욱더 참혹하였다.

 

광해군은 평소에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전후로 일어난 옥사에 대해 반드시 날마다 친히 국문하였으며, 일찍이 유사에게 맡겨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다가 화를 즐기는 간사한 자들이 또 광해군의 심복이 되어 아첨하면서 종용하였으므로, 차마 말할 수조차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공은 수상으로 있으면서 날마다 입시(入侍)하여 바른 도리를 지켜 옥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으며, 강직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아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억울하게 걸려들었던 자들이 대부분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에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가 아주 어린 나이였는데도 이이첨(李爾瞻) 등이 화(禍)의 뿌리라고 지목하고는 삼사(三司)를 사주해 번갈아 가면서 상소를 올려 주살하기를 청하게 하였으며, 또 “삼공(三公)은 의당 백관들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나아가 간쟁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광해군이 잠깐 안에 들어간 사이에 대사헌 송순(宋諄)과 대사간 이충(李沖)이 전상(殿上)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조정의 뜻이 모두들 대신이 즉시 복합(伏閤)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그르다고 하니, 감히 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공이 일어나 나와서는 이항복과 더불어 모의하여 말하기를,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말하기를, “그대는 수상으로서 마땅히 이 논의를 결단하여야만 할 것이네. 만약 영창대군을 대궐 바깥에 나가 있게만 한다면 나는 마땅히 머리를 수그리고 따를 것이네. 그러나 만약 삼사에서 논하는 것과 같이 반드시 전인(甸人)에게 넘겨 목을 매단다면 부득불 이론(異論)을 주장하지 않을 수가 없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 것이네.” 하자, 공이 이르기를, “그게 바로 나의 뜻이네.” 하였다.

그다음 날 백관들이 복합하여 대궐 밖으로 내쫓기를 청하였는데, 광해군이 들어주지 않았다.

 

며칠 뒤에 이이첨이 대신들에게 항의하여 말하기를, “조정의 의론은 모두들 처형시키고자 하는데 대신은 단지 내쫓기만을 청하였으니, 백료들이 종사(宗社)를 위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말투가 매우 협박조였다. 그러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벌써 알고 있소.” 하였다.

 

그러나 계사(啓辭)를 기초함에 미쳐서는 전의 의론을 그대로 견지하면서 변하지 않았다. 다음 날 이이첨이 병이 들었다고 핑계 대고 오지 않고는 말하기를, “구차스럽게 의견을 같이할 수가 없다.” 하니, 공이 그 말을 듣고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오지 않았는가? 사람마다 각자 주견이 있는 법이니, 내버려 두라.” 하였다.

 

그 뒤에 옥사가 날이 갈수록 급해져 외간에서는 혹 장차 모후(母后)를 폐할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대관(臺官) 윤인(尹訒)과 정조(鄭造)가 피혐(避嫌)하는 가운데에서 그런 의론을 발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항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일을 어찌 일각이라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 있겠는가. 나는 가슴속이 불타는 것만 같다.

 

오늘은 자네와 함께 나아가서 먼저 성효(誠孝)를 능히 다하여 자전(慈殿)의 뜻을 편안하게 하라는 뜻으로 반복하여 개진해 상께서 깨우치기를 기다리고, 이어서 이 자들의 부도(不道)한 상황을 극력 말해 온 힘을 다 기울여 남김없이 깨뜨려야만 한다.” 하니, 이항복이 말하기를,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계사(啓辭)를 반도 채 읽기 전에 상의 위엄이 진노하거나 아니면 대간들이 저지할 경우에는 형세상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이 이미 《춘추(春秋)》의 설을 거짓으로 끌어대어 상의 귀를 현혹시켰으니, 이 일을 반드시 대신들에게 물어볼 것이다.

 

그러니 헌의(獻議)하는 가운데에 경전(經典)을 인용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조목조목 공격해 깨뜨리고, 인하여 영창대군을 주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하는 것이 옳다.” 하자, 공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을 하기도 전에 이항복이 탄핵을 입어 조정을 떠나갔다.

얼마 뒤에 대비(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모역(謀逆)을 하였다는 무함을 받아 죽었다.

 

이에 대비에게 부음을 고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의논하게 되었는데, 공이 《춘추》에 나오는 “아들은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거나 어머니를 원수로 삼을 수가 없다.”라는 따위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을 하자, 시의(時議)가 몹시 경악하였다.

 

얼마 뒤에 광해군이 정청(庭請)을 윤허하여 영창대군을 대비의 곁에서 빼앗아다가 강화(江華)로 내쫓아 안치(安置)시켰다. 그러자 의논하는 자들이 기필코 법을 들어 처형하고자 하여, 공으로 하여금 먼저 말하라고 재촉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 한 통을 올려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니, 이이첨의 무리가 크게 노하여 역적을 편든다고 하였다.

이에 이성(李惺)과 박정길(朴鼎吉) 등이 이이첨의 뜻에 영합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처형하기를 청하였는데, 삼사(三司)가 한 달이 넘도록 쟁집하였으나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고 단지 관직만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용진(龍津)에 있는 별장(別莊)으로 물러가 있으면서 국사를 생각하고는 천장을 바라보고 눈물을 삼켰으며, 밥조차 물리치고 먹지 않은 채 지냈다. 이로 인해 병을 얻어 병세가 날로 심각해져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는데, 바로 10월 9일의 일이었으며, 향년은 53세였다.

 

원근에서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들 혀를 끌끌 차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이로부터 나라에 기강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광해군 역시 몹시 애도하였으며, 곧바로 관작을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다음 해 정월 3일에 양근(楊根)의 아무 산에 있는 부인의 묘에 합장하였다. 공은 정신이 맑고 빼어났으며, 풍도(風度)가 묵중하고 심원하여 약관(弱冠)의 나이가 채 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이미 재상감으로 기대하였다.

 

천부적인 재능이 아주 높아서 같은 또래들에 비해 훨씬 뛰어났으나, 겸손하고 근신하여 스스로 몸을 낮추어 일찍이 털끝만큼도 자만하거나 교만한 기색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평상시에 거처함에 있어서는 매우 무능한 것 같았으나, 일을 당하여서는 영특한 기운을 분발하여 날랜 백정이 칼을 놀리듯 시원스럽게 처리하였다.

 

조정에 있는 34년 동안에 일신을 돌보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부지런히 일을 보았으며, 험난하고 평탄한 것을 가리지 않고 맡아서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라를 중흥하는 업적을 세우는 것을 곁에서 도와 이루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자신을 항상 부족한 듯이 여겨 공을 세웠다고 자처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서로 대함에 있어서는 화락한 모습으로 대하여 따사로운 기운이 상대방을 감쌌다.

 

공이 전후로 접반사(接伴使)가 되었을 때에는 중국 장수들이 모두들 친구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면서 마치 진한 술에 마음이 취한 것만 같이 여겼다. 무신년(戊申年,1608, 선조 41)에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중국에 갔을 때에는 이름이 중국에 진동하였으며, 돌아오는 일로(一路)에 있는 여러 진(鎭)의 장관(將官)들이 술과 음식을 마련해 놓고 영접하거나 혹 선물을 주면서 행차를 호위하는 자들이 길에 서로 잇달아 있었다.

 

그 뒤로는 본국의 공사(貢使)가 북경(北京)에 도착하면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즉 《시경(詩經)》에서 이른 바 “저기에 있어도 미워하는 이가 없으며, 여기에 있어도 싫어하는 이가 없도다. 거의 밤낮없이 노력하여, 명예를 길이 마칠 것이로다.[在彼無惡 在此無斁 庶幾夙夜 以永終譽]”라고 한 것이 아마도 공을 두고 읊은 것일 것이다.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이 공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으면서는 단정 지어 말하기를, “어진 이를 추천하고 능한 이에게 양보하는 것은 자피(子皮)와 같았고, 빈객을 응대하는 것은 숙향(叔向)과 같았고,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음은 송경(宋璟)과 같았고, 유학(儒學)을 높이고 선(善)을 좋아하기는 유정(留正)과 같았고, 사사로운 당파를 세우지 않기는 사마광(司馬光)과 같았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겸하여 행하였으니, 위로 진(晉)나라와 정(鄭)나라의 사이에 태어났더라면 명대부(名大夫)가 되기에 무난했을 것이요, 아래로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현재상(賢宰相)이 되는 데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군자들이 모두들 사람을 잘 알아보고서 한 말이라고 하였다.

 

공은 지은 시문(詩文)이 아주 많았으나, 병화(兵火)에 거의 다 산실되고 몇 권 정도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夫人)의 성은 이씨(李氏)로,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따님이며, 목은(牧隱) 선생 문효공(文孝公) 이색(李穡)의 후예이다.

 

시부모님을 섬기기를 예로써 하였으며, 남편을 섬김에 있어서 덕을 어그러뜨리는 일이 없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의 난리 때 28세의 나이로 절사(節死)하여 정문(旌門)되었으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 여규(如圭)는 전 부사(府使)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이고, 차남 여벽(如璧)은 현감(縣監)이고, 삼남 여황(如璜)은 지금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다. 딸은 현감 정기숭(鄭基崇)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側室)에게서 아들 셋을 두었는데, 여박(如璞)ㆍ여방(如?)ㆍ여선(如璇)이고, 딸 셋을 두었는데, 전 만호(萬戶) 이징(李憕), 의관(醫官) 허목(許楘)에게 시집갔고, 한 딸은 일찍 과부가 되었다.

 

부사 여규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상건(象乾)ㆍ상겸(象謙)ㆍ상정(象鼎)이고, 딸 넷을 두었는데 승지 이기조(李基祚), 사인(士人) 최유석(崔有石), 사인 홍휘(洪彙)에게 시집갔으며, 한 딸은 아직 어리다. 현감 여벽은 후사가 없다.

 

감사 여황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며, 딸 여섯을 두었는데, 진사(進士) 오정규(吳挺奎), 진사 목행선(睦行善)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정기숭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정진(鄭鉁)ㆍ정린(鄭鏻)ㆍ정민(鄭鈱)이고, 하나는 아직 어리며, 딸 둘을 두었는데, 사인 이명징(李明徵)에게 시집갔고 한 딸은 아직 어리다. 내외의 증손은 열네 명이다.

 

처음에 공이 죽었을 때는 바로 군소배들이 야유를 보내던 때라서 여러 아들들이 감히 시호(諡號)를 청할 계획을 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뒤인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 1)에 하늘의 해가 다시 밝게 빛나서 여러 간흉들이 모두 주살되었다.

 

그러자 어느 날 두 아들이 가장(家狀)과 백사(白沙)가 지은 묘지명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공의 글을 얻어서 위로 조정에 청하여 시호를 하사받고자 한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 일은 글 솜씨가 거친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평생토록 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알아줌과 장려해 줌을 아주 두텁게 받은 것을 생각하매, 지금 시호를 청하는 글을 지음에 있어서 의리상 사양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이에 드디어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 알고 있는 것만을 모아 대략 이상과 같이 서술하여 태사씨(太史氏)가 채택해 쓰는 데에 대비하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우부빈객 정경세(鄭經世)는 삼가 시장(諡狀)을 짓는다.

---------------------------------------------------------------------------------------------------------------------------------------------------------------

[原文]

 

漢陰李公行狀 - 鄭經世

 

公姓李氏。諱德馨。字明甫。自號漢陰。系出廣州。望族也。其先世有聞人。在麗季有曰集。以文章氣節有大名於世。辛旽惡其抗直欲殺之。負父而逃。匿於永川地。旽誅始還。判典校寺事。與圃隱甚相▣。今圃隱集中有哭遁村詩。卽其號也。入我朝。有曰仁孫。官至右議政。諡忠僖。曰克均。官至左議政。燕山甲子被禍。寔於公爲五代祖。高祖諱世俊。南陽府使。中廟朝。贈兵曹參判。以與父同被禍故也。曾祖諱守忠。贈吏曹判書。祖諱振慶。賢而有行。不幸早世。贈議政府左贊成。考諱民聖。知中樞府事。贈議政府領議政。妣柳氏。縣令禮善之女。公以嘉靖辛酉生。有異質。沈毅醇謹不好弄。八歲讀小學。請問元亨利貞之義。議政公曰。非幼子所能曉。義有不學也。議政公大奇之。十一歲。吐詞驚人。十二而大成。長篇大作。信筆滔滔。十四。楊蓬萊士彥來過。相携遊水石間。占一律。公和曰。野闊暮光薄。水明山影多。楊嘆曰。君我師也。萬曆庚辰。捷大科。選入槐院。旋被翰薦。以外舅李公山海及舅柳公㙉親嫌。不得應講。時宣祖將講訓義綱目。命選才臣。特賜內藏御帙。使之溫習備顧問。一時榮之。凡得五人。公與焉。壬午。詔使王公敬民遊觀漢江。公以製述官隨。王公聞其名。與相見。公以禮無私覿辭。王公不敢強。遺一絶以結神交。有通衢千里見神駒之句。尋拜弘文館正字。賜暇書堂。故事以玉堂參下得賜暇。爲第一淸望。至比登瀛。公與白沙李公恒福同登是選。時論翕然。稱爲得人。時栗谷李公珥典文衡。實主是選。有一宰夜訪李公。屛人謂曰。兩李果人望。然未知意向。不可輕易引進。或壞時事。李公曰。薦人貴於得才。何論意向。其人爭之。至夜分不得而去。乙酉。上幸瑞蔥臺。公應製居首。自是聲名藉甚。無敢爭鋒。一日。命文臣試大庭。同列爭道者問於政院曰。明日李某又占高第耶。公聞之。稱疾不就試。識者器之。陞副修撰。歷正言,副校理,吏曹佐郞。遷校理。以仕宦妨學。上疏辭。上嘉其志。命遞授直講。戊子。日本使玄蘇,平義智來聘。上以機關甚重。且玄蘇有文才。命極擇宣慰使。銓曹以公應旨。上特遷公吏曹正郞以遣之。公至。玄蘇輩望其儀表。灑然起敬。及入京。請報聘甚力。朝議難之。一日。公於宴席從容語曰。兩國修好。本以信義爲重。頃者我國賊沙火同逃入日本。誘率賊倭。寇掠邊民。而你國不之禁。信義安在。未可遽議報聘也。玄蘇等急遣卒倭。不踰月。以沙火同及被擄男女百餘人來獻。上嘉之。庚寅。超拜直提學。賜銀帶。秋陞同副承旨。公上章辭以驟。不許。序遷至右承旨。歷大司諫,副提學,大司成,吏曹參議。辛卯。以覲受暇。上賜豹皮褥令歸遺。異數也。尋進階。特授禮曹參判。兼大提學。公以年少躐陞未安。又以嘉善典文衡。前所未有。累疏懇辭。優奬不許。壬辰春。拜大司憲。尋遞授西樞。四月。日本大擧入寇。宣言欲見李宣慰議和。上會群臣議。莫能決。公曰。寇深矣。何可辭難。入對請行。單騎馳至龍仁。則賊已散漫不可入。還到漢江。大駕已西幸矣。從間路追及於平壤。賊進逼浿江。又請見公。公片舸會于江中。是日。群臣諸將在江岸。望見者無不竦然失色。公見賊。辭氣自若。數之曰。若等無故興兵。壞却數百年通好。是何意耶。玄蘇等曰。吾欲假道入大明。而朝鮮不許。譬如將入人家。不得不先撤藩籬也。公曰。你欲犯我父母之邦。而脅我假道。國可亡。道不可假。自此兩國之好絶矣。何和可議。聲氣俱厲。賊不敢復言。後玄蘇亟稱於人曰。倉皇之際。言語氣色與昔日尊俎時無異。人所難及也。公料此賊非本國所辦。請乞援天朝。大臣持難。公固爭之。上可其議。遣公行至遼東。郝巡按杰見公辭語慷慨。爲之愍然改容。卽便宜遣祖承訓等三將。先嘗賊鋒。皆敗還。天朝遂大發兵。遣提督李如松督諸將東征。明年春。大軍到義州。公以大司憲爲接伴使。時三京丘墟。八路潰裂。百度蕩然。無着手處。公周旋其間。竭力焦心。日應待諸將。辦給蒭糧。不致乏絶。提督大悅。遂克平壤復松京。上懋其功。增秩爲刑曹判書。四月。天兵入漢陽。兵火之餘。餓莩滿路。公搜聚餘餉。賑給士民。所全活不可勝數。先是。上在肅川。令募兵敎鍊。扈衛帳殿。至是。公與西厓柳相國協心規畫。張大其事。置陣製器。皆放中朝制。廣設屯田以助軍需。公私賴焉。甲午夏。丁內憂。上以國事艱危。非公不能濟。冬。命起復治事。公九上章不起。上曰。予不以賊不退爲慮。以卿不出爲憂。辭旨切峻。促令赴召。遂黽勉入朝。由吏判移判兵曹。乙未。逆賊李夢鶴起兵湖西。未幾敗伏誅。逮餘黨鞫之。賊以公勳名盛大藉口焉。公席稿待命四十日。上溫諭不許。不得已起視事。又十上章乞遞。始得命。丙申。還判兵曹。俄遷吏曹。丁酉。賊再動。天子遣四大將發兵十萬。以御史楊鎬監軍經理朝鮮事。楊公年少有俠氣。輕視天下士。動以氣勢凌轢人。先聲至。人皆恟懼。上以公前在李提督軍中。能得上下心。命往儐之。楊公一見傾倒如舊。公因言曰。今賊已逼畿甸。若失漢江則事危矣。今能疾馳進以鎭都城人心。賊勢可及遏截也。揚公從之。卽單騎馳到。督戰益急。遣偏師大破賊鋒於稷山。賊將淸正等悉敗走。楊公南下。追圍於島山。拔外城。賊退入土窟。朝夕且降。會天大雨雪。人馬凍飢。天兵左次。時公在軍中。氣益厲不少挫。楊公甚奇之。謂諸將曰。李陪臣雖在中朝。亦當端委廟堂。而尙屈百僚。不亦異乎。未幾。楊公被讒去。公還朝。戊戌。拜右議政。提督劉綎將南下。言於上曰。願得本國第一人文武備具者同行。上顧右議政李恒福曰。意有在耶。恒福對曰。必李某也。上遂命從征。綎喜曰。吾濟矣。兵至順天。賊酋行長勢益窘蹙。堅壁不出。綎性狡。憚戰而貪功。令間密諭行長使遁去。欲因爲己功。公獨鉤得其狀。卽夜急通於統制使李舜臣。令與舟師提督陳璘邀擊于洋中大破之。公惡綎所爲。密啓于朝。有惎公者宣之。故令綎聞之。綎大怒曰。俺三十年功名。因李某墜落盡耶。己亥。洪汝淳以此事密劾公。公上疏乞解職。上答曰。卿之心事如靑天白日。狂風怪雨雖欲發作。其體固自若也。卿旣內不愧心。外不愧人。劉氏之子焉能害于國凶于人哉。公終不能自安。累辭得遞。授判中樞府事。辛丑。以都體察使居南方歲餘。振肅軍政。蠲除民瘼。南土晏然。尤長於料敵。算無遺策。一日。倭使橘持正持書啓出來。有恐喝求和意。公以爲此是馬島詐稱。非日本所持。不許下陸。遣人語之曰。天朝以日本反覆難信。屯兵本國。以爲善後之計。不可於此時輕易發此口也。乃收聚天兵之落留我境者作爲一屯。以示之揭報。郉軍門出諭倭告示張掛釜營。折其哄脅之謀。邊陲之至今無事。公之力也。壬寅。入爲領議政。癸卯。白虹貫日。上命二品以上言得失。公言事忤旨。有嚴敎。卽引疾乞解。移拜領中樞府事。時命策宣武扈聖諸勳。下敎曰。李某當倭寇衝斥之日。以扁舟往見賊酋。非忘身殉國者不能也。命錄勳。公入上箚力辭。上執不許。勘定日。柳永慶爲首相。指公辭箚曰。此實錄也。漢老辭勳宜矣。竟不錄。物議稱屈。戊申。宣祖上賓。梓宮在殯。臨海獄事起。三司交章請案律。光海下大臣議。公與左相李恒福同辭以爲宜全私恩。俾不至死。未幾。鄭寒岡逑以都憲疏陳是議。李相國元翼亦於箚中及之。一時論者譁然力攻。目爲護逆。自是朝議遂分。久而愈激。先是。光海在東宮。天朝以捨長立少。不許冊封。至是。告訃使李好閔至。則天朝遣嚴萬兩差官査問臨海病狂狀。一日。差官於御前面質其虛實。入侍諸臣。錯愕莫能措語。光海命召公入。公趨入曰。以弟證兄義不可。差官不敢更問而退。時天朝論議紛然。不卽許封。李好閔留玉河。累月不得請。擧國遑遑。光海命公爲陳奏使。公以爲今差官將發還。不幸誣言先入。則使臣繼至。雖力辨無益。不如先至京師。備陳實狀。遂星夜兼程。二十七日而至京師。留五月呈辭。竟得竣事而還。光海大悅。命父某超陞通政。除判決事。官其子六品職。賜土田藏獲倍。己酉秋。復拜領議政。壬子春。海西逆獄起。逮及搢紳名人。癸丑。朴應犀等獄繼起。則獄事狼藉。誣引宮禁。比壬子尤慘。光海素蓄疑忌。前後獄事。必逐日親鞫。未嘗委有司淑問。奸人樂禍者又入左腹從臾之。事有不忍言者。公以首相日入侍。守正平反。棘棘不阿。橫罹者多得釋。時永昌大君㼁齒纔齔。李爾瞻等指爲禍本。嗾三司交章請誅。且言三公宜率百僚庭爭。一日。光海入更衣。大司憲宋諄,大司諫李沖於殿上揚言曰。廷議皆以大臣不卽伏閤爲非。不敢不告。公起與恒福謀曰。事將若何。恒福曰。子以首相。當斷此論。若令出置闕外。則我當屈首從之。若如三司之論。必欲磬于甸人。則不得不立異。死生。命也。公曰。吾意也。明日。百官伏閤。以出置請。光海不聽。居數日。爾瞻抗言於大臣曰。朝議皆欲致辟。而大臣只請出置。非百僚所以爲宗社意也。語極侵軼。公笑曰。已領矣。及草啓。持前議不變。翌日。爾瞻稱疾不來曰。不可苟同。公聞之笑曰。不來耶人各有見。可任之也。獄事日急。外間或傳言將廢母后。臺官尹訒,鄭造於避嫌中發其議。公謂恒福曰。此事何可一刻容忍。我心如焚。今日請與君同進。先以克盡誠孝。慰安慈殿之意反復開陳。以待上悟。因極言此輩不道之狀。悉力擊破之無遺可也。恒福曰。不可。吾啓辭未半。天威震怒。或臺諫狙擊之。勢難畢說。彼旣誣引春秋。眩惑上聰。此事必詢于大臣。當於獻議中引經據義。段段攻破。因及永昌不可誅之義可也。公諾之。事未及而恒福被劾去。已而。大妃父金悌男以謀逆受誣死。方議告訃當否。公引春秋子無絶母讎母等語。時議大愕。未幾。光海允庭請。取永昌于大妃側。出置江華。論者必欲置之法。促公先倡。公進一箚以示意。爾瞻輩大怒。以爲黨逆。於是李惺,朴鼎吉等希意揚臂。請按律。三司爭之踰月。而光海不許。只命削職。公退歸龍津別墅。眷顧國事。仰屋飮泣。却食不進。因得疾日劇。遂不起。十月初九日也。年五十三。遠近聞之。莫不傷嗟出涕曰。自此國無紀矣。訃聞。光海亦震悼。卽命復爵。以明年正月三日。合葬于楊根某山夫人之墓。公精神明秀。風度凝遠。未弱冠。人已以公輔期之。天分甚高。絶出流輩。而謙謹自持。未嘗有一毫矜高色。平居粥粥若無能。而遇事英氣奮發。恢恢有游刃地。立朝三十四年。匪躬盡瘁。不擇夷險。卒能贊襄中興之業。而方且自視欿然。不以功自居。與人相接。色笑雍容。和氣襲人。前後儐接。天將莫不懽然相得。有如醇醪醉心。戊申陳奏之行。名動中原。其往返一路。諸鎭將官或酒饌出迎。或贈贐護行者相屬於道。每本國貢使至京。必問公安否。詩曰。在彼無惡。在此無斁。庶幾夙夜。以永終譽。殆公之謂也。白沙李相國誌公墓而斷之曰。推賢讓能似子皮。應對賓客似叔向。知無不爲似宋璟。尊儒樂善似留正。不立私黨似司馬光。率是以行。上而出於晉鄭之間。不害爲名大夫。下而出於唐宋之際。不愧爲賢宰相。君子以爲知言云。公所爲詩文甚多。而兵火中散失殆盡。只有若干卷藏於家。夫人姓李氏。領議政山海之女。牧隱先生文孝公穡之後。事舅姑以禮。事君子無違德。壬辰之亂。年二十八。以節死。旌其門。贈貞敬夫人。公有三男。長如圭。前府使通政。次如壁。縣監。季如璜。今爲黃海監司。女適縣監鄭基崇。側室有三男。如璞,如?,如璇。三女。前萬戶李憕,醫官許楘。一早寡。府使有三男。象乾,象謙,象鼎。四女。承旨李基祚,士人崔有石,士人洪彙。一幼。縣監無後。監司有一男幼。六女。進士吳挺奎,進士睦行善。餘幼。鄭基崇有四男。珍,鏻,鈱。一幼。二女。士人李明徵。一幼。內外曾孫又十四人。始公之歿。正在群小揶揄之日。諸孤等不敢爲請諡計。後十一年天啓癸亥。天日淸明。群凶悉誅磔。一日。二孤以家狀及白沙誌來曰。願得公文字。上請於朝。圖所以易其名者。余惟此事非蕪拙所及。而獨念平生出入公門墻之下。辱知奬甚厚。今於此役。義有不可辭者。遂略敍其在人耳目者如右。以備太史氏之採摭焉。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右副賓客鄭經世。謹狀。

 

우복집>愚伏先生文集卷之二十 > 行狀

---------------------------------------------------------------------------------------------------------------------------------------------------------------

行狀 - 李埈

 

公諱德馨。字明甫。漢陰卽號也。其先出廣州。廣州之李。爲海東望族。麗季。有諱集。號遁村。忠穆王丁亥歲。登科。文章志節。有名當世。恭愍戊申歲。以抗直。觸忤賊僧辛旽。旽將捕殺之。竊負老父。投于慶尙道永川地。及恭愍辛亥歲。賊旽伏誅。始還家鄕。以得免慘禍。自是。無行世之意。爲奉順大夫判典校寺事。遁村生諱之直。官至直提學。直提學生諱仁孫。官至右議政。諡忠僖公。沈毅有大略。不喜聲色。忠僖公生諱克均。官至左議政。燕山甲子被禍。於公五代祖。左議政生諱世俊。官至南陽府使。以燕山朝被禍之故。追贈兵曹參判。府使生諱守忠。爲進勇校尉龍驤衛副司果。贈吏曹判書。司果生諱振慶。賢而有行。不幸早世。贈議政府左贊成。振慶生諱民聖。娶金城縣令柳禮善之女。辛酉二月十二日巳時。生公于漢陽之南部誠明坊。公生有異質。沈毅醇謹。不事遊戲。人之見者。無不奇之。八歲。公父始敎小學書。至元亨利貞。公請釋其意。公父曰。此理微妙。雖釋之。非幼兒所能曉得。公曰。讀書。必先詳其文義。乃知意味。強爲論說。十一歲。受學於隣丈家。有盆竹枯死。隣丈呼韻。使占一絶。卽對曰。春夏秋冬長作春。歲寒然後獨靑新。如今憔悴群芳盡。恰似離騷澤畔人。座客皆閣筆難和。十二。能作表,策,序,記等文。意圓辭暢。文章夙成蓋如此。十四。公從外舅柳相。讀書於抱川地。一日。楊安邊士彥兄弟來過。與公論文。甚奇之。仍携往永平牛頭淵。安邊先占一律。公卽和曰。野闊暮光薄。水明山影多。綠陰白煙起。芳草兩三家。仍唱和數十首。安邊深歎曰。公我師也。公之文章。非我敵也。遂刻詩巖石而還。十八。捷司馬初試魁。終屈於覆試。人皆怪訝。考官亦歎其失才。二十。登別試乙科第一人。分差承文院。首被翰薦。以公婦翁及外舅相避。不得應講。遷陞本院著作。公外舅柳相於筵中啓曰。臣姪李某。才望俱出臣右。以臣之故。久廢史官之路。妨賢不可。請遞臣職。上曰。予素知李某之才。終可大用。而大臣不可輕遞。時大提學李珥選將來典文衡之人。而公與其選焉。時有一宰相夜訪栗谷。屛人曰。李雖有人望。未知意向。不可輕薦致壞時事。栗谷曰。李聲譽方盛。何可蔽賢。且薦人。貴得人才。何論意向。其人至夜分爭之。不能得。上命除漢語試射等事。各賜綱目一帙。使專意讀書。以備顧問。時詔使王公敬民遊觀于漢江。公以製述官隨去。有相工李時芳者。卽詔使之友也。見公語深服焉。言于詔使。詔使曰。朝鮮有李某。願一見之。公辭以禮無私覿。詔使卽書贈一絶曰。吾友鍾峯李公。偶遇李吉士於舟中。風度氣象。遠超凡群云。余未獲相接。書此以贈。爲神交焉。其詩曰。風流李白元供奉。年少終軍更棄繻。百代聲華君不忝。通衢千里見神駒。癸未北虜之變。公爲事變假注書。從仕累月。政院以病重啓遞。上曰。此時非此人之才不可。特命調理行公。公歷撰其時事蹟以進。則上稱歎不已。其後特令公書進御覽題目。筮仕之初。人皆以公輔期之。二十四。拜弘文館正字。被選書堂。公上章力辭。上優答以奬之。玉堂參下書堂賜暇。爲第一淸選。至比登瀛。俄陞本館博士。上親幸瑞蔥臺。設文臣庭試。出三箭定天山二十韻排律。公應製居首。自是戰輒冠軍。無敢爭鋒。一日。判下文臣庭試。則同選爭道者先問政院。明日。李某就試。又占高第耶。公聞之。稱疾不試。論者謂戰必勝攻必取。固難也。敵弱而韜鋒退舍。爲尤難也。二十五。陞副修撰。歷司諫院正言,弘文副校理,吏曹佐郞。又遷弘文校理。公欲爲讀書。上疏辭職。上嘉其意。命換閒官。公以成均直講。賜暇湖堂。唯以讀書爲事。戊子。歸省安峽縣。時倭使玄蘇,平義智等將出來。宣慰使該曹循例擬啓。則自上還下其望。仍傳曰。倭使接待。機關甚重。且聞倭使能文云。自古宣慰之任。必如金安國,蘇世讓等人差遣。今書堂官員中。有文才可合人。極擇以送。該曹以公爲擬。上命公乘馹上來。特除吏曹正郞。差宣慰使以遣。公前往東萊。留四日。倭使出來。設宴接見。從容談話。以書相答。製詩酬酢。凡干施措。咸得其宜。倭使望其儀表。灑然起敬。雖以蠻貊之無知。亦甚歎服。己丑。倭使入京。請遣通信使。言辭不遜。朝廷深以爲難。公與禮判柳西厓商議。以圖善處。率倭使還下東萊。仍謂倭使曰。兩國修好有年。頃者。叛賊沙火同逃入日本。誘率賊倭寇掠邊民。此等賊若捉送。則爾國所望可諧云云。玄蘇等留釜山。先遣卒倭。未滿一月。沙火同及被虜男女百餘名卽出來。翌年。上嘉其功。超拜直提學。且賜銀帶。同年秋。遷陞同副承旨。公以早陞堂上爲未安。上疏力辭。上不允。轉陞右承旨。歷大司諫僉知中樞府事,副提學,大司成,吏曹參議。辛卯。又以歸覲峽縣乞由。上特賜豹皮阿多介。使之歸遺老親。眷渥之隆。前古罕聞。同年。超拜禮曹參判兼弘文館大提學。公以嘉善。兼是任。曾所未有。且年少遽陞。又極未安。累上辭章。優奬不允。前是。特陞嘉善者。蓋欲兼提學故也。壬辰春。拜司憲府大司憲。遞拜同知中樞府事。四月。倭奴動兵。直指京城。譯官景應舜持倭書出來。書契中。欲見李某講定和事云。自上命會朝以議。朝廷莫知所處。公於榻前。請往見賊酋。探問事情。少緩其勢。上甚危之。不忍明言。然事勢急迫。終乃遣公而去。及到龍仁縣。先送一譯于倭中。諭以欲見之意。譯官被賊鋒所害。無可見之勢。計沒奈何。還到京城。則大駕已西狩矣。公蒼黃狼狽。從間路。追及行在於平壤。賊鋒已逼浿江。上揮淚語群臣曰。卿等願爲祖宗。勉圖恢復之計。公又自請往。以單舸見賊曰。我國與爾國。數百年通好。一朝有何嫌怨。而乃爲此擧耶。賊盛張兵戈。故示威勢。顏色不變。言語自若。賊卽解兵威。仍語公曰。吾欲假道。而朝鮮不許。如欲入人之家。先撤藩籬。勢所然矣。公嚴辭峻斥曰。爾欲犯我父母之邦。而以假路爲言。非但難從爾請。自此兩國。將爲讎敵。據理明言。終始大責。諸賊酋不敢復有所言。其後玄蘇亟稱公度量曰。蒼黃之際。言語辭色。少無異於昔日宣慰之時。人所難及。公料此賊非本國所敵。與宰相李鼇城。首出乞援上國之計。上可其議。仍遣公入遼東。告急于中朝。中朝初疑本國與倭相通而有此請。不肯出兵救之。公呈文泣訴。竭力周旋。中朝始信本國危迫之狀。先遣摠兵祖承訓。率三千兵來援。及至本國。賊勢甚盛。孤軍莫能敵。中朝繼遣提督李如松。大發兵東征。公以大司憲。爲提督接伴使。力贊謀議。親冒矢石。竟復三京。時倭奴遍滿浿江以南。郡縣空虛。許多蒭糧。無計辦供。公周旋轉輸。俾免絶餉。終乃進戰以收偉功。癸巳。拜刑曹判書。四月。入都城。兵火之餘。腥尸載路。飢民塡壑。公搜聚餘餉。分給賑恤。所活不知其幾。又收諸處書籍及貨財。分送該司。以補國用。提督聽宋應昌之言。纔到忠州。旋欲班師。公曲勸南下。盡逐餘賊。提督令家丁出示應昌密通長帖曰。事勢如此。不得不撤歸。卽拔帖以去。公瞥眼之間。能誦傳啓。不錯一字。同僚見之者以謂若神明焉。公隨提督將送別于義州。適値大駕於黃州。公謁上。上曰。聞卿驅馳戰陣。備嘗艱苦。患疾深重。良用憂慮。親賜御藥。使之調治以行。提督渡江。公卽旋歸。仍覲于通津縣。是年冬。拜兵曹判書。時天兵撤廻。大駕還都。朝廷草創。萬事無形。加以南徼一帶盡入賊窟。國勢汲汲。朝不慮夕。公與西厓柳相公。協力規畫。新設訓鍊都監。募聚良民。作隊敎藝。逐日勸課。且給糧餉。以濟其飢。公私兩便。軍額漸多。扈衛防戍。始得成形。且造各樣兵器。皆法紀效之制。廣設屯田。以繼軍國之需。撫恤軍卒。如愛己子。著念官務。有甚家事。晝夜思量。寢食具忘。憂國之誠。出於天性。甲午夏。丁憂。居廬于通津地。執禮過毀。幾不能起。及其襄葬也。都監諸卒。裹糧自來。至誠赴役。猶恐或後。其德澤之入人深者蓋如此。同年冬。自上以爲國家危急。當此之時。非李某不能爲矣。今聞已過襄事。促令起復。以紓國難。且曰。予不以賊不退爲憂。以卿不出爲憂。嚴旨累降。必欲出仕而後已。公九上辭章。泣血陳懇。自上特下嚴旨曰云云。終不得命。黽勉赴召。復拜兵曹判書。公官務雖劇。執喪愈嚴。居喪飮食。一從禮文。咸謂三年之內。必不能支保矣。乙未。逆賊李夢鶴出於湖西。時公聲名表著。爲賊口所浼。公席藁待命。至於四十日之久。自上累下溫諭曰。予喜卿姓名出於賊口。若因此罪卿。適足以墮兇賊之計中。公惶悚感激。出謝恩命。仍上辭章。多至十餘度。始乃得遞。丙申。還拜兵曹判書。遷吏曹判書。注擬之際。至公無私。每當一窠。必求其人。得之則喜。不得則憂。箚記姓名。臨政以擬。王子宰執。不敢有所私囑。親戚朋僚。亦不敢有所希冀。而草野之名一善者。無不誠咨力擧。必置於百執事之列。丁酉。倭奴再動。天朝大發水陸兵。以御史楊鎬爲經理朝鮮。楊公性峻氣俠。待之極難。及聞先聲。人無不大爲疑慮。朝廷以公爲儐接。往迎于鎭江城。經理與公論說軍國諸事。一見便卽推許。公之所言無不從焉。留住箕京。聞倭寇已犯湖西。公投呈稟揭。日累十度。請進住漢陽。以遏賊勢。楊公果有其計。卽單騎馳到。督戰益急。大敗賊鋒於稷山地。賊之不再犯京城。皆公力也。公以爲倭奴雖退。尙屯兩南。一番掃蕩。勢不可已。曲勸經理。遂下嶺南。先拔蔚山賊窟外城。進圍賊將淸正於內城。多至一旬之久。賊將勢迫幾降。天不助順。雨雪交作。人馬凍餒。三軍少退。時公暴露忘飧。效死不懈。經理深歎。顧謂諸將曰。李陪臣風度雅量。雖出天朝。亦做閣老。俄而經理被言西歸。公亦隨還。戊戌。右相有窠。西厓柳相公薦公爲右議政。俄陞左議政。提督劉綎南下時。言于主上曰。願與本國文武第一人同行。料理諸事。上曰。意有在耶。相臣李恒福在傍曰。必李某也。上許之。公又作南行。前到順天倭橋。指告提督急攻賊城。公亦不避死生。隨入戰場。交鋒大捷。賊遂退縮。城中賊酋行長在圍日久。糧盡勢窘。頻請出降。將不日捕獲。劉綎爲人。性本驕詐。欲得僞功。密諭行長。使之遁逃。有若敗走者然。公先知其意。卽達夜急通于統制使李舜臣與舟師提督陳璘。要水路挾擊。大敗之。自征倭以來。前後獻捷。未有若此之大者。公深憤劉綎所爲。密啓于朝廷。群小據朝。故欲陷公。反示其狀啓於郉軍門。劉綎探悉其狀。大怒曰。三十年功名。因李某都墜了。怨公欲害之。人皆爲公懼。公往見劉綎。穩敍夙昔。不露聲色。綎雖內懷不平。外實尊敬。臨別至贈贐物。留詩以美之。己亥。公被數三奸臣密劾。上章辭職。上曰。卿之心事。如靑天白日。狂風怪雨。雖或發作。其體固自若也。今卿所爲。內不愧心。外不愧人。劉氏之子。焉能害于國匈于人哉。天寵雖隆。勢不能安位。累辭得遞。移拜判中樞府事。辛丑春。自上軫念南事。以公爲四道都體察使。公承命南下。修擧軍政。務除民瘼。規畫百爲。一出至誠。黜陟臧否。一任公道。毫無容貸。方伯守令或有望風解印者。時倭使橘持正輩持書契出來。公以爲此是馬島所遣。日本必不能盡知。不許下陸。乃設館於島中。使之留處。說稱天朝方憤爾國所爲。善後兵馬尙屯國中。修好一事。安敢於此際開口。然爾國若革面輸誠。盡變前日之事。則終必有善處之端。其後揭報軍門。累出諭倭告示。張掛釜營。以折哄脅之言。邊事到今無事者。無非公周旋之力也。公素諳賊情。凡有度如合符節。少無差失。壬寅春。還拜領議政。是年夏。逆變起於湖西。公以首相平反理獄。所活甚多。參鞫諸官。以緩治逆獄。必激上怒。皆爲憂懼。上又下敎曰。春秋。緩治逆獄。則是亦逆也。諸官相顧失色。公怡然不動。以婉辭直言。備細覆啓。上怒卽解。橫罹逮獄者得放釋。癸卯春。白虹貫日。上命二品以上。各書啓所懷。時臨海有殺害宰臣之變。其子柳?欲爲復讎。反被臨海所陷。幷與捕盜大將邊良傑繫獄受刑。幾至死域。國人擧切嗟痛。天怒甚峻。大小之官。緘口莫言。公甲辰春。不避私嫌。冒進長箚。極陳其冤狀。上怒益激。乃下嚴敎。公卽引疾呈告。三度得遞。移拜領中樞府事。其後臨海常怨公欲陷之。時勘定請兵扈聖宣武等諸功。上因元勳啓辭。傳曰。李某當倭奴充斥之日。以扁舟見賊。非忘勞循國者。不能也。命收錄。公八箚辭勳。上猶不允。公遞相之後。權臣專政。不錄公名。人皆憤鬱。而公自謂快於心矣。丙午。權臣當局。僞致犯陵賊講和而誤邊事也。公獻議累百言。痛斥其非。權臣甚疾之。終不能害公。戊申春。先王賓天。臨海之變。出於殯側。三司俱請以按律。公首發全恩之說。乃被時輩極斥。呈病在家。未幾。鄭寒岡以都憲。亦疏陳是議。李完平,李鼇城相繼箚及之。時輩謂之護逆。禍將不測。夏。天朝欲査臨海狂病與否。出送嚴,萬兩差官。擧國遑遑不知所爲。一日。差官於御前。請質臨海之事。入侍諸臣莫能發一辭以答。特命召公入。公卽入對曰。以弟證兄。於義不可。一言明釋。差官深服公言。卽罷出。時天朝流言橫播。有不忍聞。差官査質之外。又有多官會議之論。告訃之行。累月留京。趁不準請。朝廷驚惶悶慮。又特命公爲陳奏使。公乃自辟黃愼爲副。星夜奔馳。發行廿七日。乃抵北京。逐日呈文。血誠號愬。每見閣老及該部諸官。泣陳本國悶迫事情。辭意懇惻。閣老及該部諸官。亦皆動念。屢上催本。留館五箇月。竟得準事。而其往返一路也。天朝諸鎭之官。或盛設酒饌。出迎路左。或貽書贈贐。無不款遇護行。此二百年來。前所未有。而公之見重於上國之人如此矣。還朝之日。卽命公父超陞堂上。拜判決事。且敍子弟爲六品職。給與田結奴婢以勞之。己酉秋。還拜領議政。壬子春。金直哉之獄起於海西。連及朝士名人。至癸丑年。朴應犀之獄繼起。事連宮禁。時事日漸危懼。逐日親鞫。絲毫以上。未嘗委有司淑問。又有奸臣作孼事。有至難不忍言者。公以首相日侍庭鞫。守正平反。棘棘不阿。若涉於無辜之人。則忘身趨出。至誠陳懇。多所生活。時三司交章。請誅永昌。且言三公宜率百僚庭爭。一日。兩司長官揚言於殿上曰。廷議以大臣不卽伏閤爲咎。公聞此言。退而歎曰。天若助國。必無此事。凝然不動。翌日。奸臣稱疾不來曰。不可與大臣苟同。公聞之。笑曰。其人不來耶。人各有見。任自爲之。同僚大臣。爲公危之。公曰。死生命也。持前議不變。獄事日急。外間或傳言將廢母后。翌日詣闕。公語僚相曰。我心如焚。今日吾二人同進。先以克盡誠孝。慰安慈殿之意。反覆陳啓。因言時輩不道之狀。僚相曰。徐觀事勢爲之。已而。金悌男以國舅賜死。方議告訃當否。公引春秋子無絶母讎母等語爲獻。時議大愕。未幾。廷議請誅永昌。公進一箚。示其不可誅之意。時輩承望奸臣旨意。竟爲按律之議。三司同辭。逐日陳啓。逾月不已。竟至削職。八月。退歸于楊根村舍。乃於十月初九日。病暴重不救。享年五十三。聞公之訃。尺童走卒。莫不垂淚。深山窮谷。亦皆傷痛。公天稟極高。神通夙成。謙謹自持。若無能焉。立朝三十四年。未嘗以才智先人。而至其臨亂不爽。當變盡常。確乎其操守。有賁育不能奪者。居家奉先以誠。事親以孝。雖官高之後。滌器之事。灑掃之禮。必躬親之。公所著封事詩章甚多。而盡喪於兵火。只有若干稿行於世。少負時望。早致宰列。雅以國事爲憂。不知家人產業。一畝田一口奴無買占者。入閣幾廿年。家無擔石之儲。聞人之善。雖在微賊。必取焉。見人之過。雖在疏遠。亦未嘗出于口。有一邊倅。適公所擧人。以苞苴潛焉。公大怒。卽令還給。使子弟貽書大責之。自是其人遂絶跡於公之門矣。平生少交游。大小之官。絶無非公事到公門者。亦不見公因私出入也。敦睦九族。顧護隣里。凡有婚喪。盡力救濟。每當受祿。必周其急。公配贈貞敬夫人李氏。卽議政府領議政諱山海之女。文孝公諱穡之後。事舅姑。奉祭祀。一從禮制。壬辰之亂。先公早世。旌門。享年二十八。有三男一女。長如圭。前楊根郡守。次如璧。前殷山縣監。次如璜。中壬子增廣。前侍講院說書。女適成均生員鄭基崇。側室有四男三女。皆幼。如圭生二男三女。長象乾。次象坤。女適士人李基祚。二女皆幼。如璜有二女。皆幼。鄭基崇有三男一女。皆幼。甲寅正月初三日。合葬於楊根夫人之墓。<끝>

 

한음문고 >漢陰先生文稿附錄卷三 / [附錄]

---------------------------------------------------------------------------------------------------------------------------------------------------------------

效忠奮義炳幾翼社奮忠秉義决幾亨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弘文館藝文館觀象監事世子師漢原府院君李公墓誌

 

萬曆癸丑冬十月。明甫卒于龍津江上。訃聞。上爲之震悼。命復其爵。於是大夫之賢者。士之良者。皆曰國其如何。甚至於吏胥軍民商旅老幼。踽踽茫茫無所恃。各出貨財。奉裞於門者踵相接。時余與明甫同獲罪。屛居蘆原。馳及大斂。主人絶踊而拜之。旣事還。客有言者曰。近世栗谷之卒。三學生徒禁旅會哭于第。西崖之卒。市人亦哭于第。今公名在司敗。三司交章。死之日又如是。亦何施而得斯於上下也。余曰。聖人云。生則不可奪志。死則不可奪名。其是謂矣。且其立朝三十有四年。其所立與所施所被於遠近者。如日月之麗于天。無愚智賢不肖。擧知其爲淸明。則一朝亡焉失之。不可復見已。則咨嗟痛悼。人情之常也。嘗儐日本之聘。日本服其德。嘗從天朝之軍。天朝高其才。我使朝京。必問其起居。以其出處。占國之汚隆。此其人聞之其傷而惜之必萬倍矣。然則何獨於一邦。將日月所照。霜露所墜。無所往而不然。德之所被。如是之遠。而一邦之人。則並世而生。同朝而立。不唯不悅。從而忌之。忌之不足。必欲殺之。至於聖明上臨。日月傍照。鬼神昭布。愚智具瞻。而乃敢反天蔽明。肆言可誅。是其心以爲眞。可誅耶否耶。客嘿而哂之。居數日。其孤如璧。纍然服斬。越紼而來。哭捨杖拜。獻狀曰。吾父嘗有言於子曰。老夫心事。有友李某知之。今父不幸死。凡與父游而有文者。唯大夫在。敢以幽堂之辭爲托。余曰。吾聞昔司馬侯死。叔向撫其子曰。自此其父死。吾蔑與比而事君矣。此其父始之。我終之。我始之。此其父終之。晉國賴之。吾於今。不亦悲哉。且余於若父。計年則差先一飯。語德則常後三級。平世文昌。鴈序而進。當國板蕩。迭居中兵。衰年伴食。塤箎莫逆。終與相竟。平生䆠迹。略相先後。知我者君。慕君者我。少得倚麻之益。今有附驥之望。敢不樂爲之志。因泣而叙之曰。明甫諱某。漢陰其號也。李出廣州爲望族。至麗季當恭愍朝。有以抗直聞。辛旽將殺之。負父逃隱。有大名於世者。曰集。號遁村。二世三世。至諱仁孫及克均。仍父子爲相。李氏遂大。又二世而至守忠。守忠生振慶。振慶生諱民聖。娶縣令柳禮善女。以嘉靖辛酉。生明甫。生有異質。沉毅淳謹。不妄遊戱。十一。吐辭驚人。十二。大成。十四。楊蓬萊士彦過訪。屛所挾。爲唱酬數十篇曰君我師也。二十。登第。選入槐院。宣宗將講訓義綱目。命選才臣。特賜內藏御帙。使之講讀。以備顧問。栗谷薦進五人。余與明甫同登薦書。一時榮之。甲申。黃,王詔使遊漢江曰。聞朝鮮有李某者。願一見之。明甫辭以禮無私覿。王公書贈一絶。有小序。略云。聞君風度氣象。遠超凡類。余未獲相接。書此以贈。爲神交焉。故事。以玉堂參下書堂賜暇。爲一時第一淸選。至比登瀛。時宣宗旣命賜綱目。繼催玉堂書堂之選。栗谷方典文衡。實主是事。當癸未之後。朝論携貳。可否不濟。明甫以後輩。聲名藉甚。余亦謏聞。俱有應選之望。有一宰相。夜訪栗谷屛人曰。兩李。果有人望。未知意向。不可輕薦致壞時事。栗谷曰。二人聲譽方盛。何可蔽賢。且薦人貴得才。何論意向。其人至夜分爭之不能得。明年春。上幸瑞䓗㙜。明甫應製居首。自是戰輒冠軍。無敢爭鋒。嘗命庭試。入彀有日。同選爭道者。先問政院。明日李某必當就試。又占高第耶。明甫聞之。稱疾不試。論者謂戰必勝攻必取。固難也。敵弱而韜鋒退舍。尤難也。陞副修撰。歷司諫院正言,副校理,吏曹佐郞。戊子。日本使玄蘇,平義智來聘。使明甫迎儐。特陞吏曹正郞。二使望其儀表。已洒然起敬。及步爵。力請報聘。明甫數以日本頃歲入寇。虜我邊民。何無信耶。日本聞之。卽還我人百餘名。宣宗嘉之。超拜直提學。仍賜銀帶。庚寅。陞同副承旨。歷右承旨,大司諫,副提學,大司成,吏曹參議。辛卯。超拜禮曹參判。兼大提學。時年三十一。本國官職。以文衡爲重。雖鴻才碩儒。非履歷旣久。品秩崇重。鮮能居之。明甫望實俱隆。朝中老師。皆袖手讓登。牛耳之執。無敢援其手者。上之特陞嘉善。亦所以先爲之地耳。及朝廷會薦。僉擧無他。明甫獨少一圈。滿座愕然曰。此何耶。東園金相公貴榮笑曰。老夫所爲。人皆失色。金徐曰。年少位卑。行先諸老。稍待才老德熟。如何。人或訝其不然。而明甫聞之。欣然深服。一時士論。兩美而並稱焉。壬辰。日本大擧入寇。宣言請見李某講和。宣宗會群臣議。朝廷不知所爲。時余以都承旨。在賓廳。明甫立門外。請與相見。余出見。則引余手曰。今賊求見我。我欲請往。寇深矣。若之何。辭難。及入對請往。單騎馳至龍仁。則賊已散漫。不可入。還到漢江。則大駕已西幸矣。追及於平壤。賊進逼浿江。又請見。明甫又請往。單舸會于江中。是日羣臣諸將。見其會者。無不悚然變色易容者。明甫見賊。責以大義。辭氣猶烈。後玄蘇亟稱於人曰。倉卒辭語。無異平日。信不可及也。初明甫追及行在。夜渡浿江。直抵余所。同宿數日。時余忝中兵。連衾夜話。謂之曰。我欲乞援天朝。廷議掉臂。㦖塞到今。明甫卽拊髀曰。吾意也。明日吾兩人力爭。事可成矣。因與定計。遅明入朝。明甫言其便。大臣初難之。明甫抗言固爭。庙議乃定。賊勢日逼。宣宗又發平壤。行到定州。引羣臣問計。余與明甫。爭請入天朝。上書求救。至夜分。上猶沉吟不決。副提學沈忠謙進曰。臣聞天下。勢而已。今勢若可救。微二臣往。兵自當出。勢不可救。雖二臣並往。無益也。二臣在國。人固信服。在中朝。則不過一介陪臣。中朝何知其賢否。而肯爲此二臣者。回已定之議也。况李某方在本兵。尤不可遠離。無已則德馨可遣。上曰。吾意政如是。於是遂遣明甫。翌日將發。余送之南門。明甫曰。恨無快馬兼程疾馳。余卽解所乘馬與之曰。兵不出。君當索我於重獲。無相見也。明甫曰。兵不出。吾當棄骨於盧龍。再不渡鴨水也。二人洒涕而別。及至。六上書泣愬。郝廵按杰。見明甫辭語慷慨。愍然爲之改容。未及上奏。便宜遣祖承訓等三將。先嘗賊鋒。皆敗退。遂大發兵五萬。衆號十萬。明年春。到義州。明甫以都憲。儐接大兵。時三京丘墟。八路潰敗。明甫在軍日。應對諸將。督辦粮餉。常參幕籌。提督累黜己見。遂克平壤。復松京。收漢陽。宣宗嘉之。增秩爲刑曹判書。四月。天兵入漢陽。時舊都新刳於兵。遺骸滿路。餓殍塡壑。明甫賑活士民。仍使處業。收聚書籍。以備購遺。師旋。乞歸覲其父。冬。天子命世子督率兵,戶曹官。駐全,慶間。策應軍事。余以兵判分曺從行。明甫代判本兵。先是。上在肅川。令募兵敎鍊。扈衛帳殿。至是。明甫與柳西成龍。協心規畫。張大其事。置陳製器。皆倣中朝。仍設屯田。以助軍需。公私有賴焉。甲午。丁內憂。其年冬。宣宗以爲國事方艱。非李某不能爲。未沒喪而奪情。明甫九上章辭不起。上曰。予不以賊不退爲慮。以卿不出爲憂。辭旨切峻。促令赴召。黽勉入朝。由吏曹移判兵曹。湖西賊。夢鶴煽亂敗斬。逮捕餘黨。賊以明甫勳名盛大。置對之際。藉以爲言。明甫席藁待命。至四十日。宣宗執不許。不得已起視事。又十上章。始得許遆。丙申。還判兵曹。俄遷吏曹。余又代之。丁酉賊再動。天子遣四大將。發兵十萬。御史楊鎬監軍。楊公年少氣銳。輕視天下士。動以氣勢壓倒。人皆洶駭。宣宗以明甫前在李提督軍中。能得上下心。命往儐之。楊公一見傾倒。明甫仍言曰。今賊已逼畿甸。若一渡漢。則江以西。無復著手處。及今馳往。猶可及救。楊公遂單騎入京。責戰益急。嘬鋒稷山。京都再安。明甫之力也。及楊公南征。圍淸正於蔚山。明甫亦隨大軍。在幕府。會天大雨雪。人馬凍飢。天兵左次。時楊公見明甫在軍曁曁。氣益厲肅。深加器異曰。李某雖在中朝。當端委廟堂。尙屈百僚。不亦異哉。宣宗聞卽登庸。時年三十八。俄陞左議政。余躡其後。及劉提督綎分道而南。宣宗祖送。劉縷縷言。須得才能臣文武備具。爲本國第一人。事乃可成。宣宗顧余曰。意有在耶。余對曰。必李某也。因命從征。劉喜曰。得李公。吾濟矣。至順天。賊酋行長。勢益窘蹙。劉行間密喩。縱使遁逃。明甫鉤得其狀。先令統制使李舜臣。轉告水軍提督陳璘。同伏要港。挾擊大敗。辛丑。以都體察使。居南歲餘。壬寅。入爲領議政。癸卯。白虹貫日。宣宗命二品以上。言得失。明甫言事忤旨。遆領西樞。時命策扈聖宣武等勳。余因事指陳明甫亂初請兵事。上曰。李某當倭奴充斥之日。以扁舟往見賊酋。非忘身殉國者。不能也。命使幷錄。明甫聞命。箚辭甚力。勘定之日。大臣有忌之者。指其辭箚曰。此皆實錄。漢老辭勳宜矣。持之甚力。左右爭之。不能得。戊申。宣廟禮陟。今上改玉。遭臨庶人獄。上問處珒之宜。余議以爲宜全私恩。俾不至死。朝臣見者錯愕相顧。明甫曰。我亦同辭。郞官來告。余驚曰。恐上相未察末段語。試往更稟。明甫笑曰。第聯我名。怡然不動。未幾。鄭寒岡逑以都憲。亦䟽陳是議。李完平因箚略及之。於是一時論者。紛然力攻。謂之護逆。事將不測。上兩可而幷止之。朝議遂分。有執法全恩之異。至于今逾甚。其年夏。中朝遣嚴,萬兩差官。査問本國事。又告訃使臣在京。馳啓中朝。不卽許封。上下㦖急。上又遣明甫陳奏。明甫以爲嚴,萬將發。萬一不幸先誣本國。則使臣繼至。雖工言不入。不如先至京師。備陳實狀。遂星夜兼程。二十七日。至京師。留五月幹事而廻。上大悅。命其父某超陞堂上。除判决事。又官其子六品。仍賜土田臧獲倍。己酉秋。復拜領議政。壬子春。海西逆獄起。至癸丑。應犀之獄繼起。事連宮禁。比壬子尤危。上連年逐日。親鞫絲毫以上。未嘗委有司淑問。又讒說惎撓。事有至難不忍言者。明甫爲首相。余以左僚。日侍鞫庭。明甫守正平反。棘棘不阿。時三司交章請誅永昌。且欲三公宜率百僚庭爭。一日。上入更衣。兩司長官。於殿上揚言曰。廷議以大臣不卽伏閤爲咎。不敢不告。余出外。明甫亦隨以退。問曰。廷議如是。禍將先及於大臣。子將如何。余曰。吾之意。在戊申之議矣。明甫曰。然則死乎。余曰。禮云內亂不與焉。我何必爲永昌死也。明甫曰。然則何居。余曰子以首相。當斷此論。若令出置闕外。則我當屈首從之。若如三司之議。必磬于甸人。則不得不立異。死生。命也。明甫笑曰。吾意也。明日百官伏閤。明甫以出置爲辭。居數日。有柄臣言曰。朝議欲置辟。而大臣啓辭。只請出置。非百僚所以爲宗社意也。辭極侵軼。明甫笑曰。已領僉意。及草啓。持前議不變。翌日。其人稱疾不來曰。不可與大臣苟同。明甫聞之笑曰。不來耶。人各有見。任自爲之。獄事日急。外間或傳將廢母后。鄭造,尹訒。以㙜官避嫌。首發是論。余謂明甫曰。吾得死所矣。今時人所持以罔上。亦所以䝱下者。有三說焉。一曰義理不明。吾亦曰義理不明。二曰討逆不嚴。吾亦曰討逆不嚴。三曰庇護逆黨。吾亦曰庇護逆黨。但所由言者異耳。其所謂逆者。未見其爲逆狀。故不敢嚴討。至於讞議。辭亦依違。苟逆焉而有司如是。則義理果不明矣。今臣而廢君之母。眞逆臣也。眞知逆狀。則凡在官者。討何敢不嚴。黨何敢有護也。前日爲永昌死則傷勇。今日爲母后不死則傷義。憗使吾君爲造與訒之蔽也。而負累於天下耶。明甫曰。吾二人同進。先以克盡誠孝。慰安慈殿之意。反覆陳啓磨礪。以待上悟。因言㙜官不道之狀。悉力擊破之無遺。其可也。余曰。不可。吾等啓辭未半。天威震怒。或㙜諫狙擊。勢難畢說。㙜官旣誣引春秋。眩惑上聡。此事必詢大臣。我粗習春秋。當引經據義。段段攻破。今已具腹藁。或因獻議。或進一箚。因及永昌不可加誅之意。可也。明甫曰。試具草示我。翌日詣闕。明甫附耳謂余曰。此事何能忍待數日。我心如焚。今日入啓如何。余曰。不可。因以具草示之。明甫喜曰。甚善。越二日。兩司先劾余。余竢罪東江。自余去國。明甫益倀倀無所聊。睠顧國事。憂累聖德。每歸私第。仰屋飮泣。輒却食不進。唯索冷酒。熙然而已。金悌男以國舅賜死。方議告訃當否。明甫引春秋子無讐母絶母等語爲議。時議大愕。未幾。上又允庭請。出置永昌。論者又欲置法。不知吾儕始議。本只此而止。又不知明甫嶽立難撓。謂可以禍福動。至促先倡。明甫乃進一箚以示之意。於是物議洶洶。前所侵軼者欲因此去之。一二新進。承望旨意。攘臂玉堂。倡爲按律之議。三司同辭。庭爭之强。逾月不已。上只命削職。八月。退歸龍津。時年五十三。得疾日惡。遂不起。今所大恨者。廢后之議起。明甫欲急攻。余欲待時。卒從余議。余先敗退。明甫孤立。未盡所言。泯泯而歿。使後志士。殞淚千古。余之誤明甫多矣。其配曰。故領議政李山海女。生三男一女。長如圭。蔭補郡守。次如璧。縣監。次如璜。文科侍講院說書。女生貟鄭基崇。側室生四男三女。如圭有二男。象乾,象坤。一女李基祚。餘二人幼。如璜有二女幼。明年甲寅正月三日。合葬於楊根山夫人之墓。明甫天分甚高。精神秀朗。謙謹自持。不色於藝。平居粥粥若無能。萬不施其二三。而猶爲天下之聞人。若使遭遇。叩其囊底而盡出之。則其功德之及人而人之慕尙。宜如何也。至於奉先之誠。事親之孝。睦族恤鄰之仁。非明甫所以輕重者。不具載。余嘗謂明甫。推賢讓能。似子皮。應對賓客。似叔向。知無不爲。似宋璟。尊儒樂善。似留正。不立私黨。似司馬光。率是以行。上以出於晉鄭之間。不失爲名大夫。下以出於唐宋之際。不愧爲賢宰相。又謂李某心大。能臨事不動。果以是獲戾于時。亦以是揚名於後。事雖可諱。言不可沒。輟哭記事。哀不能文。忘其質俚。竊言而隱書以埋之。

[주01] 崖 : 厓

[주02] 敦 : 數

 

백사집 >白沙先生集卷之三 / 墓誌

---------------------------------------------------------------------------------------------------------------------------------------------------------------

神道碑銘 幷序 - 趙絅

 

故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漢陰李公。葬在楊根之龍津江上。漢陽趙絅刻其墓碑曰。昔我宣祖大王平夷亂還舊都。以恢中興之業。聽輿人之誦。咸曰。姓李三相。輔之翼之。左之右之。以有今日云。三相卽李完平,李鼇城,漢陰公也。公於三相中年最少。才最雋。協心同德。與俱上下。知有國而不知有身。公實爲最。公諱德馨。字明甫。居在漢山之陰。故自號漢陰。其先廣州人。有諱集。以文行致大名。當恭愍世。賊僧旽惡而欲害之。負其父唐。逃隱永川。旽誅。仕爲判典校寺事。事載麗史。與鄭圃隱相善。及卒。圃隱以詩哭遁村是也。入我朝。曰仁孫。曰克均。公子爲相。李氏遂大顯。克均被燕山甲子禍。於公五代祖也。諱世俊。府使。爲公高祖。諱守忠。贈吏部尙書。爲公曾祖。諱振慶。賢而早世。贈貳相。爲公祖考。考諱民聖。知中樞。贈領議政。室文化柳氏。縣令禮善之女。公生於嘉靖辛酉。生有異質。沈毅醇謹。不喜嬉戲。八歲。入學。刺口難疑。非孺子爲者。未舞象。卓然早成。楊蓬萊士彥携遊山水間。有唱斯和。愈出愈佳。蓬萊嗟賞曰。子我師也。公所唫綠陰白煙等四句。刻之錦水溪石。至今宛然。二十。對策登上第。由槐院。薦史苑。時外舅鵝溪公方主中祕書。公嫌不應講。宣廟將講綱目。命選備顧問才臣五人。出御府冊畀之。公與焉。一時榮之。壬午。詔使王敬民來。遊漢江曰。聞東國李某好人。得見否。公以外臣無私交辭。王公書贈一絶。敍曰。聞君風度出乎類。余雖未獲交䞇。贈此以爲神交云。俄拜弘文正字。且賜暇。與白沙同升淸選之極。栗谷公方握文衡。主是選。有一宰夜抵栗谷所曰。兩李果人望。公如未諳意向薦之。恐壞了時事。栗谷曰。薦人在得人。胡論意向。其人爭之不得。夜深乃去。明年。上幸瑞蔥臺。公應製居第一。自是戰藝常冠軍。然不欲多上人。公志也。嘗於庭試。同進者出噎媢語。公遂稱疾讓登。聞者偉之。陞副修撰。歷正言,副校理。爲選曺員外。戊子。日本玄蘇,平義智來聘。公以吏曹正郞。任宣慰。二倭望公儀觀。不覺起敬。及入京享燕。蘇等請報聘甚力。公正色曰。交隣修好。舍信義無適。日者。爾國封疆臣。挾我亡虜沙火同。憑陵我邊陲。係虜我人民。爾國莫之禁。信義惡在。語未卒。蘇,智遣卒倭。不踰月。執沙火同及被虜髦倪百餘。指以獻。上嘉之。特拜直提學。賜銀帶。庚寅。陞同副承旨。歷右副,副提學,諫長,國子銓議。辛卯。超拜禮曹參判兼大提學。時年三十一。自春亭以後。典文衡者。皆用宿德峻秩。未有如公妙齡得之者。當時老於文學及畜銳超乘者不止若而人。至登壇執牛耳。咸曰。莫先李某。壬辰。島夷爲封豕長蛇。荐食我國。宣言要見李某議媾。宣廟歷問于朝。囁嚅不能對。公進曰。急病臣職也。請單騎馳至駒城。翟氛散漫。無隙可投。還渡漢江。則大駕已西狩矣。從間道及平壤。賊逼浿水。又請見公。公又請往。單舸會江中。群臣諸將望見者。無不變色易容。公見賊氣自若。責之曰。爾等無故興兵。壞百年好何。蘇等曰。吾欲入大明。朝鮮不假軍塗之故。公乃竦顏折之曰。爾欲寇我父母國。我國有亡而已。何以和爲。其後蘇等嘖嘖稱公曰。對壘辭語。無異昔日樽俎間。信難及也。公夜渡大同。上謁帳殿。與大戎鼇城。合力陳乞救天朝事。大臣難之。公抗言不已。議遂定。駕次定州。乃遣公行。與鼇城班荊而別。其贈處之言。壹似申胥我能興楚者。人皆知公必能辦也。及至遼。雀立不轉。沫血飮泣。上巡按書者六。巡按郝杰歎公竭蹶露衷。不暇以聞。便宜發祖承訓等三將。先嘗倭少衂。天子於是赫怒大發兵。李如松爲大都督。諸將賈勇競勸。一鼓而熸丸都賊屯。於是東人凜凜。始有恢復之望矣。明年。公以都憲出儐都督。左參幕籌。右主軍餉。雖以都督之嚴。遇事肯䋜。則必問公斷。當是時。血流原野。都鄙赤立。公徒以忠義。激瘡痍心。飛輓未嘗乏絶。兵馬賴以飽騰。卒使天兵長第。復三京如指掌焉。論其功懋。孰與高下。上嘉悅。增秩大司寇。夏四月。公導天兵入漢陽。汛掃廟社灰燼。大臨故老餘存者。無不涕泣。見公如見父母。京城新刳於兵。飢疫交熾。父子齩骨之民。嗷嗷荊棘中。僵殍縱橫道路。公拮据卒食之踦。賑活翳桑。殆不可數。又鳩書籍散逸者。以備講帷。頃公代鼇城。授本兵。與西厓柳相撫綏都民。甲午。丁內艱。上以爲虞危未弭。李某國之楨榦。一日不可無。命起復。公九上章辭。不報。下峻批。至曰。予不以賊不退爲憂。以卿不出爲憂。公不得已飮泣赴朝。拜吏判。陳時務八條。鑿鑿中端。若兪扁之用藥。皆可以起死回生也。其中穀飢民丁壯。充禁旅。號曰訓鍊都監。凡戈楯砲鈹。皆倣戚繼光書也。廣設屯田于中外。以贍國用。以足軍餉。趙營平之策。無以過也。識者謂中興之本。實在此擧云。乙未。移兵判。丙申。湖西賊夢鶴稱兵陷二邑。洪州牧洪可臣討誅之。餘黨被逮。誣引公名。若己酉之變。李相浚慶名出賊口者。公席藁待命。上數下溫諭。且使參鞫。公十上章堅懇不已。始釋本兵。丁酉。倭再踏我郊。天子遣四大將。率兵十萬。御史楊鎬爲監軍。楊公年少作氣勢。奴視天下士。東人聞聲洶洶。上察群臣。惟公曾入李提督幕府。得上下心。命公往儐。楊公一見傾倒。公乃言曰。今賊氛甚惡。渡漢不朝伊夕。一失天塹。雖天兵之威。難以爲力。楊公聞言。卽投袂入城。責戰益急。麻貴鐵騎縱鏖賊稷山素沙郊。京都再安。公力居多云。楊公乘勝而南。圍淸正於蔚山。鏟其外壘。賊衆多死。淸正郤入土窟。雌聲乞降。會天大雨雪。軍馬餒而股弁。天兵遂左次。公雖在危急中。意氣自如。楊公獨視偉之曰。李某雖在中朝。端委廊廟。尙屈百僚。異哉。上聞卽爰立作相。時年三十八。無何。陞左台。劉提督綎。引兵南下。宣廟祖送。劉斤斤言本國文武備具者第一人。吾與之俱足矣。上顧右相李恒福曰。意有在耶。對曰。必是李某。上遂令從行。劉喜曰。吾濟矣。至順天。賊酋行長窮蹙死咋。殲可指日。劉性狡獪。恐人分功。陰諭行長遁。公鉤得其狀。令統制使李舜臣。約水軍提督陳璘。隘諸要港。大破之。行長僅以身免。綎聞之。大恚曰。李某墮我三十年勛名耶。己亥。洪汝諄摘此媒孼公。公十上章乞解。上批曰。卿之心事。如靑天白日。狂風驟雨。雖或間發。其體自若。卿旣內省不疚。劉氏之子。焉能害之哉。公猶不自安。累控解相印。授判中樞。辛丑。以都體察使鎭南徼。肅軍政。爬民瘼。湖嶺以寧。公長於料敵。敵之情僞。效於指詘。倭使橘智正把書契來。虛喝求和。公以爲此馬島諼。非日本事也。郤而不內。且語橘倭曰。天朝以女倭傾側反覆。留兵本國。以備非常。女敢於此時。以躗言慢我。仍集天兵之落南不歸者娖隊。馳告郉軍門博諭帖。張諸釜營。賊關口而退。壬寅。入爲領議政。癸卯。白虹貫日。上命二品以上言事。公進言忤旨。遞拜領中樞。時策宣武扈聖等勳開局。宣廟下敎曰。李某當倭寇充斥日。單騎見賊酋。非忘身殉國者。不能。趣命錄勳。公八上箚辭。上不許。及勘勳。時相柳永慶反指公箚曰。此實錄也。漢老辭勳宜矣。遂不錄。物議譁然。戊申。宣廟上賓。梓宮在殯。人告臨海叛。三司直請按律。光海下大臣議。公與左相李恒福。同言恩當掩義。鄭寒岡逑以都憲陳疏主全恩。李相元翼箚辭。亦主全恩。時論鵲起呶呶。目全恩爲護逆。殊不知尺布之謠。文帝終身病之也。先時。天朝以捨長立庶。不許光海封典。至是。告訃使李好閔至京。則輒遣嚴,萬差。査臨海病狂狀。擧朝錯愕留噤而已。不敢措一辭。公趨而進曰。以弟證兄。雖下國。不敢聞命。差官聞是語。不復更問。蓋萬曆末。建儲久未定。雖藩國請封。皇朝例以靳許。故光海命公爲陳奏使。公兼程疾行。二十七日。入京。五閱月幹事而回。光海大悅。陞公父通政判決事。官其子六品。賜土田臧獲倍敦。己酉秋。復拜領議政。辛亥。仁弘誣詆晦,退兩先生。公三上箚。痛斥仁弘之妄。壬子春。海西獄起。癸丑。應犀之獄麇起。考一連十。誣引狼藉。至焄宮禁。比壬子尤慘。讒諂態臣。先中君心。光海親鞫。慮囚無虛日。入侍諸臣盡慴。公守正不阿。務在平反。被誣者頗釋。群宵甘心永昌大君。指爲禍本。大君纔八歲矣。嗾三司請甸磬。又欲驅大臣庭請。大司憲宋諄,大司諫李沖。揚言殿上曰。廷議皆以大臣不率白官伏閤爲非。居無何。爾瞻直怵大臣曰。朝議欲致辟於永昌。大臣只請出置。非吾等爲宗社意也。公笑而不動。草啓猶持前議。不少變。瞻等慍而無奈何。始公與鼇城議斷此事。鼇城曰。若出永昌於外而止。吾等無以死爭理。故公詘意從之。然請出永昌。亦非公之素志。永昌旣詘。猰狗舐糠。必欲及米。臺官鄭造,尹訒,丁好寬等訟。共發廢母后論。公謂鼇相曰。生乃見此事。何可一刻容忍。我心如焚。今日。請與君進一箚。首以盡誠孝安慈殿。反覆開陳。仍切劾言群小無天不道。叩頭流血。期以回天。庶幾哉。吾責塞矣。鼇相曰。不可。吾啓辭未半。上或震電馮怒。或臺諫狙擊。吾何從畢吾說。然玆事體大。終必詢大臣。吾等少安無躁。瀝盡肝血於獻議中。何摩厲如之。公亦然之。俄鼇相先被參去。公獨奈何哉。國舅金悌男被誣矺死。耽耽慈殿。迫無日也。廷臣方議告延興訃于慈殿。公引春秋子無讎母絶母等語。爲立議頭腦。群小大愕。爾瞻,纘男,拉惺,鼎吉爲助。操戈弩眼。以爲黨逆無過李某。三司幷請按律者浹月。光海不許。秖命削職。公退歸龍津。眷顧王國。仰屋咄咄。繼之以泣。却食不食。夜不能寐。遂得疾日惡。竟不起。卽十月九日也。春秋五十三。訃聞。光海震悼。命復原官。於是上自大夫士之賢者。下至吏胥軍旅闤闠小民。聞公之卒。無不咨嗟涕洟曰。吾其如何。或罷市巷哭。或相率出貨財。裞其門趾。相嚙不止。此在宋時。京師之民。哭司馬溫公如是云。抑不知公何以得此於人。公之純忠一德。自壬辰浹人心腹。刃莫畢屠斯民者。三代之直道而行者也。其欲爲公死無所辭。奚收司之律足顧。公事宣廟二十九年。始也左詩右書。賁飾文治。人莫敢望焉。然功用旣興則未也。及至龍蛇大難。洪水滔天。二百年宗社生靈。呑吐於鯨鰐之喙。公以孤身。重趼奔命。凡上之所急。下之所戴。眼顒望者。出隻手。掉寸舌。無不得宜。此之爲功。雖古誰亢。公猶執謙。避之不居。君子以是尤多公云。公事光海。自戊申始也。當是時。新遭天崩之慟。虞危萬端。公竭忠盡智。追先后之際遇。欲報新君者。諸葛武侯之心也。觀於戊申新政箚。公可謂社稷臣也。累累數千言。上言全臨海。次言畏天命。中言盡孝母后。下及輔導儲位。開言路。納忠直。嚴宮禁戚畹事。出入詩書易春秋。指前代以爲鑑戒。光海如用其中什一二。安有厲憐王事者。悲夫。惟公一人之身。遇宣廟則謀行功從。夷亂安邦。如板上走丸。遇光海則其所匡君者。人以爲誹。其所盡忠者。人以爲訐。逢君慫慂之徒。擧文罔而閃鑠之。公安得脫乎。千秋之士。必有讀公文。於邑流涕者矣。公歿未幾。鼇相謫北靑。梧相配洪川。輿人所誦姓李三相。不死則遷。邦國安得不殄瘁而卒之亡也。公精神秀朗。風度凝遠。未弱冠。人見者咸以公輔歸之。所與遊。未嘗見公有喜慍色。處群從間。常持卑。克伐嫮誕。一不出諸口。兒時見鄕族之貧無者。必思濟之。及貴。內外親戚無疏遠如歸。至於事親。每懷孺慕之心。天植然也。白沙李相。與公肝膽相照。死生靡間。公捐館時。含沙待影者何限。白沙作公誌。不遺一事。戒公胤子勿泄。斷公平生曰。推賢讓能。似子皮。應對賓客。似叔向。知無不言。似宋璟。尊儒樂善。似留正。不立私黨。似司馬光。世以爲知言。公文章出於六經。佐以洛建諸老書。斷事則主魯史聖經。稽古之力。藉涑水資治。泛濫外家。爲深博無涯涘。凡所述作。立就數千言。故丙丁年間。天將文移書牘旁午。左酬右酢。公筆居多。有韻之文。風流雅致如其人云。夫人姓李氏。領議政山海之女。牧隱先生穡之後。婉嫕有操。事舅姑。佐君子。皆盡禮敬。壬辰亂節死。年二十八。旌其門。贈貞敬夫人。生三男一女。長如圭。通政判決事。次如璧。縣監。早世。次如璜。嘉善監司。女適府使鄭基崇。側室男三。如璞,如?,如璇。女三。郡守李憕,醫官許楘。一早寡。判決事生四男。象乾。禁府都事。象坤,象謙,象鼎。判書李基祚,士人崔有石,洪彙,李龜徵。壻也。縣監無子。以判決第四子象鼎爲后。監司一子。象震。六女。進士吳挺奎,參議睦行善,縣監鄭儋,士人趙德潤,李玄年,進士徐來益。鄭基崇四男。珍,鏻,鈱,鈗,鏻。文科府尹。士人李明徵,正字韓五相。其壻也。內外孫,曾凡幾人。公沒後十一年。仁祖大王正宗祊。公嗣子如圭始請諡狀于太學士鄭公經世。上太常入奏。諡以文翼。又四十年。公孫都事象鼎。奉鼇相所爲竁銘及愚伏堂所爲諡狀。扣不佞于靑城山下。涕泗而言曰。祖父之墓木。不啻拱矣。於今式宜有顯刻。而顧諸父諸兄。不克永世。今不肖獨存。且念今之世與大父幷世者。不憖遺一人。聞大父風烈跂而慕之者亦少。竊聞執事樂道人之善。多銘賢大夫功德。敢藉先靈。以樂石顯刻。累執事。不佞於是蹴然辭曰。先相國偉忠大業。不獨人口皆碑。太史氏旣以大書特書之不足也。奚待老傖之翦翦冷言。況不佞。委巷晩出也。雖嘗承乏。幸忝文任。蓬心蒿目。隔重膜作者蹊逕。何敢形容大君子事蹟。此事之屬。惡可輕。願子更思之。都事公揖而退而復進者三。觀其色。不得拙文。不休不去。意者繆謂不佞稍能耳剽壬辰戊申事。性且不喜諛。如是強之歟。義實有不得竟辭者。遂剟李,鄭二公所撰。檃括焉。又續以謏聞之萬一。序以銘之。銘曰。

維廣李先。遁翁其倡。孝節竝峙。于后趾美。忠僖喬梓。左相是繼。出將入相。克文克武。天全魄毀。淮水不絶。維嶽降神。維公繼起。公之器宇。仡自髫齔。覯者嘖嘖。天人之對。拉鼂駕董。一發破的。翔于郞署。盛之玉堂。天寵日渥。峻之文柄。才踰而立。國朝疇敵。逮于壬辰。鯨浪掀天。天步跼蹐。公於是時。南北惟命。誓天殲賊。口伐虺毒。誠動帝庭。帥渡鴨綠。長轂雷野。大礮震堞。蟻屯褫魄。三京盡復。山河湔羞。公不有力。出入矢石。雍容無怖。經理攸伏。上籍其實。錫秩三事。群黎加額。哭廟灰燼。糜粥餓隷。若乳于席。簽丁較技。庸備禁旅。厓相與畫。火鷄之訌。孰警長沙。危妥擔釋。統制偕璘。幾馘呑舟。惟公之策。魚水穆陵。退讓南宮。大樹是則。于黃猿春。靈壇夜矣。大節尤卓。三進及霤。知死不回。目無鼎鑊。鑿齒麻牙。祥麟屛跡。嘔血仰屋。一昔訃聞。當宁亦恫。奈何乎國。癸亥改玉。天日重明。公名始易。好丘龍津。梓木已拱。公事如昨。刻詩牲繫。如復見公。庶過者式。

 

한음문고 > 漢陰先生文稿附錄卷三 / [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