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자라를 먹지않는 집.

야촌(1) 2006. 8. 17. 10:35

■자라를 먹지않는 집

 

고려말 정승을 지내신 문충공 익재(益齋) 이제현의 7세손 공린(齊賢-達尊-德林-伸-繼蕃-尹仁-公麟)은 일찍이 사육신 박팽년(朴彭年)의 둘째 따님에게 장가 드셨는데 당시 청빈(淸貧)하기로 소문난 관찰사(觀察史) 윤인공(尹仁公)집에서 혼수 예물을 대광주리 하나에 면포 2단을 보냈다 한다.

 

이에 장모께서 예단이 이렇게 소흘함은 대가(大家)의 법도가 아니라며 크게 노하여 남편인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공에게 파혼을 청했는데 취금헌 박공(朴公)은 사람만 좋으면 됬지 다른 무엇이 필요 한가며 아내 얘기를 물리치곤 혼사를 치뤘다 한다.

 

그런데 공린(公麟)깨서 장가든 첫날밤, 큰 자라가 나타나 "내 아들 8 형제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니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공(公)은 하도 꿈이 기이해 자리에 일어나 신부를 깨워 물으니 전날 어머니 깨서 새 사위를 대접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자라를 구한후 부엌 도가니에 가둬 놓았다는 얘기였다.

 

이 말을 들은 공린은 신부와 함께 부엌에 들어가 자라 8 마리를 가까운 냇물에 살려 보냈는데(그중 한 마리는 죽었었다), 훗날 공린은 아들 8 형제를 두었고 이름을 모두 거북구(龜)자와 고기어(魚)자를 넣어 오(鼇), 구(龜), 원(黿), 타(鼉), 별(鼈), 벽(鼊), 경(鯨), 곤(鯤),자(字)로 이름 지었다.

 

그뒤 모두가 문장(文章)에 뛰어나 팔별집 팔문장 으로 일컬어 졌는데 셋째아들 원(黿)이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참형(斬刑)으로 죽임을 당하니 앞서 자라 한마리가 죽은일과 맞아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그 후 경주이씨 팔별집은 18대(약540년)가 지난 오늘날 까지도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것을 가법(家法)으로 지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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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린(李公麟)

    [생졸년]  1437(세종 19) ~ 1509(중종 4)

 

자는 임지(任之). 본관은 경주(慶州). 조선 성종때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觀察史)를 지낸 윤인(尹仁)의 아들로 태어나 나이 20세 되던해,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된 장인 취금헌 박팽년의 죄(罪)로 연좌되어 30년간 고폐(錮廢)를 받았다.

 

그후 어머니 남양홍씨의  절행(節行)으로 사면 복권되어 1482년(성종 13) 나이 46세에 처음으로 무과(武科)에 올라 창평 현령이 되었으나 다시 셋째아들 원(黿)이 무오사화에 연루된 죄로 청주 수락동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당시 아들 8 형제도 모두 귀양가 뿔뿔이 흩어졌는데, 1506년(중종 원년) 중종이 등극하자 사면 복권 되었으나 연로 하여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그곳 귀양지 수락동에서 은거하다 73세로 세상을 마쳤다. 신용개(申用漑)가 찬한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고폐 : 오늘날의 금고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공직에 나갈 수 없다.

◇관찰사 : 오늘날 도지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