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이회영 일가의 오블레스 노블리주

야촌(1) 2006. 5. 9. 07:27

다시 쓰는 독립운동列傳] Ⅳ-2.

우당 이회영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경향신문] 2005-03-07 18:03]

 

↑6형제가 만주로 망명을 떠나기 전 지도를 펴놓고 망명 계획을 세우던 모습을 묘사한 그림으로 우당 기념관에 전시되 있다.

 

한국의‘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백사 이항복의 11대 후손인 우당 이회영(1867~1932) 집안을 빼놓을 수 없다. 8대를 이어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던 이 집안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1910년 12월 혹한에 59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현재 시가로 따지면 6백억원에 이르는 3만섬의 재산을 처분하고 나서 였다.
국내에서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이역땅에서 펼친 우당 일가의 치열한 독립운동 뒤엔 아나키스트적 삶을 살았으면서도 지도층으로서의 명예와 책무를 위해 재산은 물론 형제들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놓았던 처절한 가족사가 숨겨져 있다.

역사상 전례가 드문 우당 일가의 숭고한 독립투쟁은 지배층이 그에 걸맞은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외면하는 이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6형제 중 5형제가 순국=우당의 6형제 중 5형제가 사실상 중국에서 순국했다. 이회영은 마흔네살이던 1910년 만

   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20년이 넘게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마련한 자금이 떨어지고 난 뒤 22년 독립운동의 세월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91)에 따르면 “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1932년 11월 이회영은 무등(武藤) 관동군 사령관 암살과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유격대 결성 등을 위해 만주로 가던 중 대련(大連) 수상 경찰에 붙잡혀 고문치사 당하고 만다. 환갑이 훨씬 지난 예순여섯의 나이였다.

 

이회영의 형제, 그들의 자제 대부분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중 많은 수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6형제 중 첫째 이건영(1853~1940)의 둘째 아들 이규면(1893~1930)은 신흥학교 졸업 뒤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했다.

 

이건영의 셋째 아들 이규훈(1896~1950)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 뒤 귀국, 국군 공군 대위로 복무 중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제일 가는 재산가였던 둘째 이석영(1855~1934)은 자신의 농토를 팔아 망명생활비와 경학사·신흥학교 창설 운영 자금에 보탰다.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니다 상해에서 사망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1899~1927)은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했다.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한 셋째 이철영(1863~1925)도 병사했다. 넷째인 이회영의 둘째 아들 이규학(1896~1973)은 사촌 이규준과 함께 밀정 암살에 가담했다. 셋째 아들 규창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다가 광복 뒤 석방됐다.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섯째 이호영(?~1933)은 1933년 소식이 끊겼다. 이호영의 아들 이규황(1912~1933), 이규준(1914~1933)도 함께 실종됐다.

 

6형제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다섯째 이시영(1869~1953)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광복 뒤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가문의 전통을 보여주었다.

 

↑우당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회영 선생 영정

 

●아나키스트 이회영

아나키스트로서의 이회영은 덜 알려진 편이다. 2000년대 들어서야 그의 사상적 측면이 조금씩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회영은 만주 독립운동 시절 우리 민족의 사회 건설 방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유 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 국가·민족간에 민족자결의 원칙 수립
독립한 민족 내부에서 자유 평등 원칙 실현
독립 후 지방 분권적 지방자치제 확립·지방자치제의 연합으로 중앙 정치 구조 구성
일체 재산의 사회화 및 사회적 계획 아래 관리
교육의 사회적 공영화 등을 주장했다.


이회영은 일제뿐만 아니라 모든 독재를 배격했다. 스탈린 체제가 독재로 나타나자 공산주의와도 분명한 사상적 선을 그었으며 권력다툼의 모습을 보이던 임시정부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회영은 ‘민족주의적 아나키즘’을 추구했다”며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주의’가 아닌 억압당한 자로서 독재에 저항하고 되찾고자 하는 의미의 민족주의였으며 독립후에는 민족간에 호혜평등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해방의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던 시대, 그것도 이름있는 양반가 출신인 이회영이 자유와 평등, 인간의 참된 해방을 지향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것은 경이”이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 체제의 문제점이 많이 드러난 현 시점에 자유 평등에 기초한 그의 이상과 신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말했다.

 

<김종목기자>

출처 : 나라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