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기룡(李起龍),

야촌(1) 2006. 5. 21. 15:44

■ 이기룡(李起龍),

    [생졸년] 1600년(선조 33)~1643년(인조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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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군서(君瑞), 호(號)는 범은(凡隱), 동비야인(東鄙野人)으로 화원 홍규(泓虯)의 아들로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조선 중기의 화원으로 도화서 교수(圖畵署 敎授)를 지냈다. 1643년 통신사행의 수행화원으로 김명국(金明國)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그의 유작으로 1629년 서울 남대문 밖 남지(南池)에 12명의 기노(耆,老)들이 모여 계회를 열었떤 광경을 그린 기념화, 남지기노회도(南池耆老會圖)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17. 18세기의 한일간 회화교섭(韓日間繪畵交涉 : 홍선균의 고고미술, 143,144쪽).

 

 

서울대 박물관 소장

 
 

↑《남지기로회도》이기룡이 그린 기록화(1629)이다, ㅣ 보물 제866호, 116.6×72.4cm

 


■ 화원 이기룡(李起龍)이 그린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의 뒤에 쓰다./서계 박세당

이는 1629년(인조 7)에 그린 그림인데, 모인 곳은 숭례문 밖의 성남(城南)의 못가이며, 연꽃을 구경한 때가 6월 5일이다. 모인 사람은 모두 12명인데, 관작(官爵)보다 연치(年齒)를 우선하였다.

이에 송계(松溪) 이인기(李麟奇)옹이 81세로 가장 나이가 많아 상석에 앉았고, 다음 파흥군(坡興君) 윤동로(尹東老)ㆍ첨지(僉知) 이유간(李惟侃)은 모두 80세이고, 다음 연릉군(延陵君) 이호민(李好閔)은 77세이고, 다음 정랑(正郞) 이권(李勸)ㆍ동지(同知) 홍사효(洪思斅)ㆍ우윤(右尹) 강인(姜絪)은 모두 75세이고, 다음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는 73세이고, 다음 참찬(參贊) 서성(徐渻)은 72세이고, 다음 첨지(僉知) 강담(姜紞)ㆍ좌윤(左尹) 유순익(柳舜翼)은 모두 71세이다.

청평(靑平) 심논(沈惀)은 68세로 가장 나이가 어려 제공들 사이에 낄 수 없었는데도 모임에 참여하였으니, 당송(唐宋)시대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모방한 고사(故事)가 있기 때문이다.
 
제공들에게는 또 모두 시종(侍從)한 자제(子弟)들이 있는데, 많게는 3명에 이른다. 그 가운 데 가장 벼슬이 높은 사람은 판서(判書) 이경직(李景稷)과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정승,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정승과 연성군(延城君) 이경엄(李景嚴), 서경우(徐景雨)정승 과 달성 도위(達城都尉) 서경주(徐景霌가 있으며, 송계 이인기만 시종한 자제가 없다.
 
그림 아래에 모두 각각 관질(官秩)과 성명(姓名)을 열거하였는데, 이를 쓴 사람은 이경석이다. 그리고 판서(判書) 이경직(李景稷)및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나란히 서문(序文)을 지었으며, 장유는 시(詩)까지 써넣었으니, 아, 이 그림 하나에서 전배(前輩)들의 풍류를 볼 수 있다 하겠다.
 
시대가 흘러서 1629년이 지금과의 거리가 63년 정도일 뿐인데, 아득히 멀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고(上古) 시대와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이 내가 자주 손으로 어루만지며 마음속에 잊지 못하여 왕희지(王羲之)가 난정기(蘭亭記)에서 말한 “세대가 다르고 일이 다르다.”는 말에 깊은 감회가 생기는 까닭이다.

오늘날 사대부(士大夫)들을 보건대, 서로 교유하는 꼴이 한배를 타고서도 서로 해치려고 키를 뽑고 상앗대를 꺾으며, 같은 방을 쓰면서도 서로 해치려고 상을 던지고 의자를 밀치고, 심지어는 한쪽은 어육이 되고 한쪽은 식칼이 되고서도 분쟁을 그치지 않으니, 어떻게 다시 이 그림 속의 전배들처럼 학발구장(鶴髮鳩杖)으로 자제들을 거느리고 한자리 한 석상에서 술을 마시고 기쁨을 나눌 일이 있겠는가.
 
이구(李構)는 이인기의 5대손이다. 이 그림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며 말하기를, “당시에는 이 그림과 똑같은 것이 모두 12본(本)이어서 제공들이 모두 하나씩 자기 집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상란(喪亂)을 겪는 바람에 11개는 모두 없어졌고, 저희 집에 보관하던 것만 다행히 유실되지 않아 현재 이 그림만 유일하게 세상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그림에 발문을 써 주십시오.” 하기에 이 글을 써서 돌려준다.
1691년(숙종 17) 12월 11일 반남인(潘南人) 서계 (西溪) 박세당(朴世堂)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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