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이화중선. 이중선 명창 자매

야촌(1) 2022. 10. 8. 11:41

전라북도 부안 명창 이중선(李仲仙)의 묘.

[소재지]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566(매창공원 내)

 

민족수난기 명창을 통해 울분을 퇘내다.

 

이중선은 가선 (아름다운 신선)의 칭호를 받은 여류명창이며, 그의 언니 이화중선(李花仲仙)은 제 강점기에 가장 많은 레코드판을 냈던 유명한 명창  이었다. 그는(李花仲仙) 100여장의 음반을 취입하는데 그의 등장으로 우리나라의 음반시장은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일본의 콜롬비아 음반사는 이화중선(李花仲仙)의 등장으로 돈방석에 앉게되며 판소리의 대중화를 이끌게 된다.

한편 1927년의 경성방송국(JODK) 개국과 함께 전통음악이 정기적으로 라디오 전파를 통하여 방송되었다.

이 때 활약했던 명인들로는 김죽파(金竹坡), 지용구(池龍九), 이화중선, 신쾌동(申快童), 강태홍(姜太弘), 정남희(丁南希) 등 내로라하는 명인,

명창들이었으며 김죽파는 자신의 예명인 운선(雲仙)이란 이름으로 출연하여 가야금병창, 산조, 단가 등을 연주했다.

 

부안 매창공원에는 이매창의 묘 말고 또다른 묘 하나가 있다. 바로 명창 이중선 선생 묘이다. 원래 이곳은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그러다 매창공원이 들어서면서 다른 분들의 묘는 다 옮겼지만 이매창 묘와 이중선 묘만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 

 

 

이중선 묘는 청룡자락이 잘려나가고 가파르게 되어 바람길에 놓여있다. 좋은 기운이 들어온다고는 볼 수 없다.가시덤불로 덮혀있던 묘역을 국악인들이 뜻을 모아 지금처럼 꾸며놓았다고 한다. 조상을 모시고 먼저간 선사들을 모시는 것도 예의 기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명창(名唱) 이중선(李仲仙)

 

명창 이중선은 언제 어디서 누구의 딸로 태어났는지 잘 모른다. 다만 그가 전라도 어느 경주이씨 집안에서 1920년대 이 땅의 실의에 빠진 겨레 혼을 소리로 달래고 가락으로 부추기다기 몸과 마음을 한마당 소리고 불사르고 겨우 서른을 넘긴 꽃다운 나이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사라져 간 명창 이었다는 것를 우리는 알 뿐이다. 

 

 중선의 언니 화중선은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서 특히 춘향가 중의 사랑가를 잘 불러 사람들의 얼을 사로잡을 때 중선은 애절한 흥타령과 육자배기 가락으로 우리의 한을 달래 주었다.

 

중선이 언니와 함께 이 나라 방방곡곡의 소리마당을 누리다가 1932년 부안읍 어느 집 골방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치자, 나라 안의 모든 명기 명창 등이 소복차림으로 상여채를 메고 소리 장으로 애도하니 원근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슬픔을 함께 하였던 일은 지금도 이 고장에 전설처럼 전해온다.

 

이곳은 여류시인 이매창이 쉬고있는 오리현의 매창뜸이다. 중선이 간지 56년 봄가을로 꽃 한 송이, 술 한잔 따르는 이 없으니 표석은 마멸되고 가시덤불은 묘를 덮어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이 고장 국악동호인들이 뜻을 모으고 국악협회 부안 지부장 김종낙님이 주선하니 인간문화재 박동진, 김소희. 박귀희 여사 등 많은 국악인들이 뜻을 같이하여 이제 묘역은 다듬어지고 돌비도 세워졌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한 많은 세월을 살다가버린 우리의 명창 이중선은 삼가 이곳에 편히 쉬시라.

 

<묘비문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