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제주 훈련원판관 이윤(李火+允) 묘.

야촌(1) 2022. 10. 4. 20:36

↑서귀포시 신효동 월라봉 남쪽 정상에 있는 이윤 무덤의 전경. 혈을 달리해 부인 고씨의 무덤이 가까이 있다.

 

■국당공 후 정순공[李誠中]의 9세손

 

□ 훈련원 판관 이군 묘표(訓練院判官李君墓表)

    생졸년 : 1650(효종 1) ~ 1708(숙종 34)

 

경주이씨는 우리나라의 큰 성(姓)으로 대대로 벼슬을 하였는데,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익(瀷)은 광해군 때를 당하여 곧은 절개로 저명하여 제주(濟州)에 안치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인제(仁濟)라고 하는데, 즉 군(君)의 아버지이다.

 

군(君)의 이름은 윤(火+允)이고 자(字)는 여명(汝明)으로 숭정 후(崇禎後) 경인(庚寅:1650년, 효종 1) 8월 18일에 태어났다. 젊어서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혀 나이 31세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였지만, 나중에는 즐겨하지 않았다.

 

드디어 제주로 돌아와 절제 영(節制營)에 근무하며 초관(哨官)이 되었고, 파총[把摠=조선시대 각 군영(軍營)에 두었던 종사품(從四品)의 무관(武官)]과 천총[千摠=조선 후기 각 군영에 두었던 정삼품(正三品)의 무관직(武官職)]을 역임하고 별장(別將)이 되어 부지런히 출근하여 본보기가 되어 절제 영의 교위(校尉)들에게 격려가 되었다.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 직계(職階)를 하는 동안 진보(鎭堡)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고, 만년에는 임시로 행수(行首)들을 인솔하였다.

 

무자(戊子:1708년, 숙종 34) 7월 6일 병들어 졸(卒) 하니 나이 59세였다. 고씨(高氏)를 부인으로 맞아 두 아들을 낳으니, 중발(重發)과 중무(重茂)이고, 두 딸은 김시우(金時雨)와 양이발(梁以潑)에게 시집갔다. 정의현(㫌義懸) 월라산(月羅山)의 병(丙) 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고씨(高氏)와는 같은 언덕이지만 혈(穴)을 달리했다.

 

군(君)은 비록 먼 후예로 낳고 자라나 가세(家世)가 오래되어, 자못 사대부(士大夫)의 풍모를 사모할 줄을 알고, 또한 침착하고 굳세며 청렴하고 곧아서, 그 몸가짐과 행한 일이 움직임에는 반드시 의로움이 있는 것을 구하여 일찍이 조금도 구차함이 없을 뿐이었다.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이 일찍이 제주에 유배를 왔었는데 군(君)이 제일 먼저 와서 문안을 하였고, 거듭 정성을 다하여 섬겼다. 비록 돌아가신 아버님이 그 군(君)을 대함이 아주 두터웠다 하더라도 유배가 무릇 5~6년이었다. 제주(濟州)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선량한 사람을 말한다면 주저 없이 이윤(李火+允)이라고 하였다.

 

이윤은 내가 유배를 오게 되어서도 더 불기를 더욱 깊이 하고 더욱 자세하였는데, 군(君)의 행한 일이 아름다웠음은 죽기에 이르러 뭇사람들에게서 듣게 되었다. 대개 노인과 유식한 사람에게서부터 부녀와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하기를,“이별장(李別將)이 죽었으니 제주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 무사(武士)인 사람들은 온 삼읍(三邑)에서 서로 이끌고 달려와서 잔을 드리고 곡을 하고 상(喪)에 예(禮)를 드리니, 이것은 또한 전에 전혀 있지 않았던 일이니, 그 사람됨이 중후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에 다만 군(君)의 죽음을 매우 애석해할 뿐만 아니라, 더욱 돌아가신 아버님이 사람을 알아봄에 잘못됨이 없었음을 더욱 감탄한다.

 

돌아보면, 나는 감히 영원히 살 사람이 아니고, 중발(重發)이 매우 열심히 요청하고 또한 의리상 사양할 수도 없어, 대략 군(君)의 본말(本末)을 알고 있기에 그의 묘에 게재하여 뒷사람에게 알려 말하노라.

 

무자[戊子 1708년(숙종 34)] 12월 13일

광산(光山) 김춘택(金春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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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訓鍊院判官李君墓表 - 金春澤

 

慶州之李。稱東方大姓。世襲冠冕。有司憲府掌令諱瀷。當光海時。著直節。安置濟州。生子曰仁濟。卽君之父也。君諱字汝明。以崇禎後庚寅歲之八月二十八日生。少習弓馬。年三十一而登武科。遊京師。旣而不樂也。遂歸于濟。服事節制營。爲哨官。歷把摠千摠。爲別將。勤仕用例。得勵節校尉訓鍊院判官職階間。爲鎭堡助防將。晩以假率行首。病卒於戊子七月六日。壽五十九。娶高氏。生二子。重發,重茂。二女。適金時雨,梁以潑。葬于旌義縣月羅山之向丙原。與高氏同原異穴。於乎。君雖生長遐裔。而以家世故。頗知慕士大夫之風。性又沉毅廉直。其持身行事。動必求義之所在。未嘗或苟焉而已。余先君子嘗謫于濟。君首來候。仍盡誠事之。雖先君子。其待君也殊厚。謫凡五六年。見濟人多矣。而其言善人。輒曰李。李。及余之謫來。與之益深。益詳君行事之懿。及卒。聽於輿人。盖自耆老有識。至婦女童子。皆曰李別將亡矣。濟其無人矣。其爲諸武士者。則傾三邑相率。奔走奠哭。以禮於喪。此又前所未或有之事。其爲人所重。可知。余於是不特痛惜君之亡。益歎先君子之不失於知人也。顧余非敢不朽人者。而重發請甚勤。且義有不可辭者。略識君本末。俾揭其墓。以告于後云。戊子十二月十三日。光山金春澤。述。<끝>

 

출처 : 北軒居士集卷之十四 / 囚海錄 文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