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성여신(成汝信)

야촌(1) 2022. 6. 3. 22:43

■ 성여신(成汝信)

 

[생졸년] 1546년(명종 1) ~ 1632년(인조 10) /壽 87歲

[본관] 창녕(昌寧)

[거주지] 진주(晉州)

[저작] 부사집(浮査集)

 

[가족사항]

◇부(父) : 성두년(成斗年)/관직 : 참봉(參奉)

◇형(兄) : 성여충(成汝忠)

◇형(兄) : 성여효(成汝孝)

 

[과시(科試)]

[진사] [진사] 광해(光海) 1년(1609) 기유(己酉)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34위(64/100)

[생원] 광해(光海) 1년(1609) 기유(己酉) 증광시(增廣試) [생원] 2등(二等) 7위(12/100)/합격연령 6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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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浮查)·야로(野老)·부사(桴槎). 홍문관교리 성안중(成安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성일휴(成日休)이고, 아버지는 경기전봉사(慶基殿奉事) 성두년(成斗年)이다.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충순위(忠順衛) 변원종(卞元宗)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3년 8세에 신점(申霑)에게 글을 배웠다. 일찍부터 문명을 떨치다가 1609년(광해군 1) 64세로 사마양시에 합격하였다. 성여신은 불세출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스스로 호를 ‘부사야로(浮査野老)’라 하였다.

 

특히 불교배척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이후 투박하고 문란해져가는 풍속을 바로잡기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과 퇴계동약(退溪洞約)을 본떠 이를 지방에 심는 데 힘썼다.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과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부사집(浮査集)』이 있다.

 

●부사선생세계도(浮査先生世系圖)

 

 

1세

성인보(成仁輔) - 중윤호장(中尹戶長)을 지냈다. 묘는 창녕(昌寧) 맥산(麥山)에 있다. -

 

2세

송국(松國) - 문하시중(門下侍中) 수태위(守太尉)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지냈다. 묘는 창녕 우항산(牛項山)에 있다. -

 

3세

한필(漢弼) - 도첨의(都僉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다. -

 

4세

군백(君百) -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냈다. -

 

5세

리(履) - 검교(檢校) 문하시랑(門下侍郞) 우문관(右文館) 대학사(大學士)를 지냈다. 부인은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 장씨(張氏)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지낸 장득운(張得運)의 따님이다. 묘는 창녕 효자암동(孝子巖洞)에 있다. -

 

6세

을신(乙臣) - 정의대부(正議大夫) 검교(檢校)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부인은 익화군부인(益和郡夫人) 이씨(李氏)로 전법총랑(典法摠郎)을 지낸 중홍(仲弘)의 따님이다. -

 

7세

사홍(士弘) - 초명은 원도이다.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집현전대학사를 지냈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공의 문장은 당대의 으뜸이었다.”라고 하였다. 충목왕 원년 을유에 서연을 설치하여 채하중, 한종유, 이제현, 박충좌, 성원도 등이 번갈아 모시고 강독하였다.

 

갑신년 봄에 영남루(嶺南樓)에 올라 으뜸으로 사운시(四韻詩)를 지었다. 부인은 철원군부인(鐵原郡夫人) 최씨(崔氏)로, 대호군(大護軍) 직(直)의 따님이다. -

 

8세

만용(萬庸) - 봉상대부(奉常大夫) 판원판서(版園判書) 보문각(寶文閣) 대학사(大學士)를 지냈다. 고려의 운수가 장차 다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선이 개국된 뒤로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부인은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 이씨(李氏)로, 익산 군사(益山郡事)를 지낸 서(犀)의 따님이다. -

 

9세

경(踁) - 중직대부(中直大夫)를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 특별히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제수되었다. 부인은 함안 정씨(咸安鄭氏)로 언이(彦怡)의 따님이다. -

 

10세

자량(自諒) - 좌사간(左司諫)을 지냈다. 세종 원년 기해 방목(榜目)에는 ‘자량(子諒)’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인은 초계 정씨(草溪鄭氏)인데, 팔계선생(八溪先生)으로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낸 전(悛)의 따님이다. 묘는 거창(居昌) 가조(加祚)에 있다. -

 

11세

우(祐) - 자는 경부(敬夫)이다. 장흥고 부사(長興庫副使)를 지냈는데, 초야에 은거하면서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향년 83세이다. 부인은 진양 강씨(晉陽姜氏)로 현감을 지낸 소산(小山)의 따님이다. 묘는 진주 동쪽 마진(麻津)에 있다. -

 

12세

안중(安重) - 자는 덕여(德輿)이다.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지냈다. 성종 임자 문과방목에는 ‘안동(安童)’으로 기록되어있다.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이 지은 묘갈문에서는 “사람 됨됨이가 성실하고 반듯하였으며 말할 때도 법도에 들어맞았지. 효성스럽고 우애도 깊었으며 맑은 성품에 몸가짐을 삼갔으니, 이것이 공이 남긴 귀한 유산이네. 그 덕을 이 비석에 새기니, 부끄러울 바가 없음을 알겠구나.”라고 하였다.

 

부인은 진양 하씨(晉陽河氏)로 지평(持平)을 지낸 충(漴)의 따님이다. 묘는 부사공묘의 안쪽 등성이에 있다. 조정에서 공의 어버이가 연로하시다는 이유로 공을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제수하여 봉양을 잘 하도록 하였는데, 정치가 깔끔하고 송사를 쉽게 처리하였다. 대여리(代如里) 귀동촌(龜洞村)으로 이거하였다. -

 

13세

일휴(日休) - 자는 자경(子慶)이다.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문장과 효행으로 당대에 이름이 났다. 초야에 자취를 감추고 영화와 이익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무심옹이라 자호하였다. 손수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띠 풀을 엮어 지붕을 이고 대나무 심어 울타리 만들고, 푸른 이끼 바위를 깨어 작은 연못을 만들었네. 세상 명리에 마음 버린 지 오래라, 그저 청풍명월만 알아주기를 허락한다네.”라고 하였다.

 

구암(龜巖) 이정(李楨)이 지은 묘갈문을 요약하면 “한 세상 소요하며 영리를 구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다. 묘는 진주 동쪽 용심동(龍潯洞)에 있다. 부인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부사정(副司正)을 지낸 창조(昌祖)의 따님이다. 묘의 위치는 같다. -

 

14세

두년(斗年) - 자는 추지(樞之)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었으며, 죽을 먹으면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부인은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충순위(忠順衛) 원종(元宗)의 따님이다. 묘는 용심동에 있다. -

 

15세

여신(汝信) -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浮査)이다. 행장과 연보에 사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만호(萬戶) 사신(士信)의 따님인데, 영의정(領議政) 개국공신(開國功臣)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 영균(永均)의 7대손이다. 묘는 진주 북쪽 설매곡(雪梅谷) 감암산(紺巖山)에 있다. 부인의 모는 진주 동쪽 송곡(松谷)에 있다. -

 

16세

박(鑮) - 자는 이선(而善)이다. 진사이다. 매죽헌이라 자호하였다. 아들이 넷으로 한영(瀚永)ㆍ해영(澥永)ㆍ낙영(洛永)ㆍ제영(濟永)인데 낙영은 양자로 갔다. -

 

용(鏞) - 자는 이문(而聞), 호는 모성재(慕省齋)이다. 아들 셋이 있는데 수영(洙永)ㆍ사영(泗永)ㆍ문영(汶永)이다. -

 

광(鑛) - 자는 이광(而廣)이다. 외아들 창영(淐永)이 있는데, 후사가 없어서 호영(灝永)을 양자로 들였다. -

 

순(錞) - 자는 이진(而振), 호는 천재(川齋)이다. 아들 셋이 있는데, 원영(源永)ㆍ치영(治永)ㆍ호영(灝永)이다. 호영은 양자로 갔다. -

 

황(鎤) - 자는 이화(而和)이다. 아들로 기영(沂永)ㆍ운영(澐永)ㆍ만영(滿永)과 서자(庶子) 타영(沱永)ㆍ택영(澤永)이 있다. -

 

17세

한영(瀚永) - 자는 혼연(渾然)이다. 아들이 넷으로 건(楗)ㆍ린(橉)ㆍ로(櫓)ㆍ원(杬)인데, 로와 원은 양자로 갔다. -

 

해영(澥永) - 자는 호연(浩然)이다. 아들이 셋으로 격(格)ㆍ련(槤)ㆍ장(樟)이다. -

 

제영(濟永) - 자는 패연(沛然)이다. 양자 원(杬)이 있다. -

 

수영(洙永) - 자는 양연(瀁然)이다. 우후(虞候)를 지냈다. 아들 진(榗)과 서자 익(杙)ㆍ백(栢)이 있다. -

 

사영(泗永) - 자는 함연(涵然)이다. 통사랑(通仕郎)이다. 아들 우(楀)ㆍ안(楌)이 있다. -

 

문영(汶永) - 자는 문연(汶然)이다. 만호를 지냈다. 아들 단(檀)과 서자 집(?)이 있다. -

 

창영(淐永) - 후사가 없다. -

 

호영(灝永) - 서자 항(杭)ㆍ운(橒)ㆍ삼(杉)이 있다. -

 

원영(源永) - 자는 연연(淵然)이다. 아들 규(楏)ㆍ흔(㯊)이 있다. -

 

치영(治永) - 자는 환연(渙然)이다. 진사이다. 아들 보(?)ㆍ윤(橍)ㆍ희(橲)가 있다. -

 

기영(沂永) - 자는 형연(瀅然)이다. 아들 근(根)ㆍ호(椃)가 있다. -

 

운영(澐永) - 자는 숙연(淑然)이다. 아들 구(構)와 식(栻)이 있는데, 식은 양자로 갔다. -

 

만영(滿永) - 자는 원연(源然)이다. 양자로 들인 식(栻)과 서자 억(檍)이 있다. -

 

타영(沱永) - 무과에 급제하였다. 아들이 셋으로 담(橝)ㆍ림(林)ㆍ재(梓)이다. -

 

택영(澤永) - 아들이 둘인데 량(樑)과 철(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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