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남포현감 이경선 묘갈명

야촌(1) 2022. 5. 14. 14:48

■ 남포현감 이경선 묘갈명

 

증통정대부 예조참의 행 통훈대부 남포현감 겸 홍주진관병마절제도위 이경선지묘

贈通政大夫 禮曹參議 行 通訓大夫 藍浦縣監 兼 洪州鎭管兵馬節制都尉 李慶善之墓(29世)

 

공(公)의 휘(諱)는 경선(慶善)이니, 자(字)는 군선(君善)이요. 초휘(初諱)는 경징(慶徵)이고, 성(姓)은 이씨(李氏)니 경주인(慶州人)이다. 시조(始祖)의 휘(諱)는 알평(謁平)이니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이다.

 

고려조(高麗朝)에 문충공(文忠公)이요. 세상(世上)에서 익재선생(益齋先生)이라고 추앙(推仰)을 받는 휘(諱) 제현(齊賢)은 공(公)의 12代祖이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발(渤)이니 증 좌승지(贈左承旨)요. 증조(曾祖) 휘(諱)는 경윤(憬胤)이니,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요.

 

조(祖)의 휘(諱)는 대건(大建)이니, 증 좌찬성(贈左贊成)이요. 고(考)에 휘(諱)는 시발(時發). 호(號)는 벽오(碧梧)니, 증 영의정(贈領議政)이요.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덕수이씨(德水李氏)니 옥산군(玉山君) 휘(諱) 우(瑀)의 여(女)다.

 

공(公)은 1600年 경자(庚子) 5月 초(初) 2日에 탄생(誕生)하여 진사(進士)로 25세(歲)에 사마시(司馬試)에 합방(合榜)하였고, 34세(歲)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영재(英才)이다.

 

그 후 박사(博士/正七品). 저작(著作/正八品).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正六品). 호조좌랑(戶曹正郞/正五品)을 역임(歷任)한 후(後) 남포현감(藍浦縣監/從六品)으로 재임(在任) 당시(當時)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勃發)하자 인조대왕(仁祖大王)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파천(播遷)하고, 삼남근왕병(三南勤王兵)을 징모(徵募)할 때, 공(公)은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로 2,432명을 영솔(領率)하고 수원산성(水原山城) 양지읍저(陽智邑底=조선시대, 감사가 직무를 보는 감영 외의 관아가 있던 마을)를 지난 후 호병대치(胡兵對峙)로 전진(前進)하지 못하고 광주(廣州) 검천(儉川=오늘날 경부고속도로 죽전휴게소 지역)에서 포진(布陳)하였다.

 

거기에서 호병(胡兵)과 혈전중(血戰中) 충청감사(忠淸監司) 정세규(鄭世規)는 절벽(絶壁)에 떨어져서 병화(兵禍)를 면(免)하였고, 그 외 장군(將軍)은 모두 전사(戰死)하였다.

 

공(公)과 연산현감(連山縣監) 김홍익(金弘翼) 만이 살아서 사졸(士卒=兵士를 말함)을 지휘감전(指揮監戰)하며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선전선투(善戰善鬪)하여 적병(敵兵) 수십명(數十名)을 격살(擊殺=무기로 쳐서 죽임)하던 중에 우완(右腕=우측 팔)이 적검(敵劍)에 절단(切斷)되자 좌수(左手)로 장검(長劍)을 휘두르며 호병(胡兵)과 용전(勇戰)하다가 좌완(左腕) 마저 검화(劍禍)를 입고 불행(不幸)하게도 장열(壯烈)하게 순절(殉節)하셨으니 그날이 1636년(인조 14) 병자(丙子) 12월 27일이다.

 

익년(翌年) 정(正)월 19일에 형(兄) 경충공(慶忠公)이 전지(戰地)에 가서 혁낭(革囊)을 보고 시체(屍體)를 찾았으나 피상(被傷)이 대심(大甚=상처가 깊음)하여 목불인견(目不忍見)의 형편(形便)이었다.

 

즉시 수시(收屍=시신을 거두어 얼굴과 팔다리 등을 바로잡음)하여 진천군(鎭川郡) 덕산면(德山面) 산척리(山尺里) 직촌(直村)에 안장(安葬)하였다.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공(公)의 전공(戰功)을 가상(嘉賞)히 여기어 예조참의(禮曹參議)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정려(旌閭)를 명(命)하였다.

 

영조 육년(英祖 六年,1730) 11월 12일에 용인(龍仁) 공세곡(貢稅谷) 촌전(村前)에 정려(旌閭)를 건립(建立)하였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해주오씨(海州吳氏) 영의정(領議政) 윤겸(允謙)의 여(女)다.

 

기해(己亥, 1599) 5월 7일 생(生)이요. 기(忌)는 신축(辛丑,1661년 현종 2) 3월 초(初) 2일이요. 공(公)의 묘(墓)와 쌍분(雙墳)이다. 이남(二男)을 두었으니 장남(長男) 인섭(寅燮)은 사마(司馬)니 이자(二子)가 있고 차남(次男) 인형(寅炯)은 진사(進士)니 4자(四子) 이녀(二女)가 있다. 내외손증(內外孫曾)은 모두 기록(記錄)하지 못한다.

 

공(公)은 혁혁(赫赫)한 가문(家門)에 탄생(誕生)하여 선조(先祖)의 유훈(遺訓)을 계승(繼承) 앙양(昻揚) 하였도다. 병란(丙亂) 당시(當時) 국가존망지추(國家存亡之秋)를 당(當)하여 용감무쌍(勇敢無雙)하게 호적(胡敵)을 격살(擊殺) 하였도다.

 

구국애정(救國哀情)의 일념 하(一念下)에 적(賊)과 싸운 그 위적(偉績=위대한 공로)에 어느 누가 상탄(賞嘆=크게 칭찬함)치 않으리오. 적세(敵勢)가 강성(强盛)하여 끝내는 장열(壯烈)하게 순절(殉節)하였도다.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위훈(偉勳)을 세운 전공(戰功)은 충청감사(忠淸監司) 정세규(鄭世規) 일기(日記)와 나만갑(羅萬甲) 일기(日記)에 소상(昭詳)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공(公)의 충절(忠節)은 불후(不朽)의 령명(令名=높은 명성)으로 천추(千秋=한량없이 긴 세월) 귀감(龜鑑)으로 영원(永遠)히 빛나리로다.

 

무오(戊午,1978년) 조하(肇夏=초 여름) 죽산후인(竹山後人) 안형열(安亨烈) 근찬(謹撰)

 

 

 

 남포현감 이경선 선생 부부 묘.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22-18. 산직마을 숭렬사(崇烈祠) 앞에 소재한다.

 

증 통정대부 예조참의 행 통훈대부 행 남포현감 홍주진관 병마절제도위 이경선 지묘.

 

병자호란때 전사한 남포현감 이경선 충신 정려문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22-18. 산직마을 숭렬사(崇烈祠) 앞에 소재한다.

 

촬영>2022년. 9월 15일

촬영>2022년. 9월 15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시 청에 맞선 이경선 근왕병 참모관에게 100년 뒤인 1730년(영조 6)

영조가 내린 충신 정려문 편액으로 현재 필자가 보존하고 있는 선조 유물입니다.

1636년(인조 14) 1월 1일 남포 현감에 부임 재직 중, 그해 12월 9일 청나라 태종(2대) 홍타이지가 이끄는 14만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포 현감 이경선은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가 이끄는 충청 근왕병의 참모관으로 참전, 경기도 광주 검천 전투(廣州 儉川 戰鬪/지금의 경부고속도로 죽전 휴게소 지역)에서 적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듬해인 1637년 5월 26일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1730년(영조 6년) 11월에 왕명으로 후손들이 살던 오늘날의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 마을 입구에 충신 정려문이 세워졌었다.

 

그 후 왜정시대 일본이 조선인의 정신문화 말살정책에 의거 현판만 수습하고 소실되고 없어졌던 것을 2005년 11월 진천군(김경회 군수)에서 공의 묘소 아래, 새로이 건립하고 현판은 12대손인 필자가 원판을 탁본해서 과거 진천중학교 교정에 서있던 천연기념목인 후박나무 원목으로 이음매 없이 주문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