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졸년 : 이항수『李恒壽, 1675년(숙종 1) ~ 1736년(영조 12)』
현감 이공 묘지명 병서(縣監李公墓誌銘 幷序)
미호 김원행 찬(渼湖 金元行 撰)
공은 휘는 항수(恒壽), 자는 여구(汝久), 성은 이씨(李氏)로, 그 선조는 함평(咸平) 사람이다. 고조 휘 배원(培元)은 황해 감사를 지냈는데, 정축년(1637, 인조 15)에 한로(汗虜)가 돌아갈 때 국경에서 영송(迎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죄를 받아 결국 파면되었다가 별세하였다.
증조 휘 침(沉)은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냈다. 조부 휘 정현(靖賢)은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지냈다. 부친 휘 명상(命相)은 개령 현감(開寧縣監)을 지냈으며, 모친 정씨(鄭氏)는 예조 참판 휘 만화(萬和)의 따님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였다. 9세 때 한번은 밤에 누워 있다가 누가 〈우공(禹貢)〉을 읽는 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웠다. 장성해서는 과장(科場)에 다니면서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복시(覆試)에만 가면 번번이 떨어졌다.
뒤늦게 벼슬을 시작해 선공감 감역이 되었다가 빙고 별제로 승진하였으며, 의금부 도사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연기 현감(燕歧縣監)이 되었다. 공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충성스럽고 신실하며 법도를 지켜, 동료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면 모두들 공에게 자문을 구해 결정하였다. 현(縣)을 다스릴 때는 특히나 청렴하고 검약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을 주안으로 삼았다.
순찰사의 사위가 문묘(文廟)의 금지구역에 어버이를 안장하려고 매우 애걸하였고 순찰사도 누차 말을 했지만 공이 절대로 승낙하지 않아 어쩔 수가 없었으니, 뒤에 순찰사도 다른 사람에게 이에 대해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한다.
공은 방정하고 곧고 삼가고 치밀하며 지조가 있었고, 집안에서는 단정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일이 의리에 맞지 않으면 하지 않았고, 남들과 한 말은 반드시 실천하고야 말았다. 성품이 술을 좋아해 왕왕 통음(痛飮)을 하여 취하면 담론이 더욱 격앙되고 기개가 우뚝하였으니, 도량이 작은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이 연기 현감으로 있을 때 적신(賊臣) 권익관(權益寬)이 적소(謫所)에서 죽었는데, 영구(靈柩)를 싣고 지나가면서 옛 순찰사라고 둘러대고서 고을의 관아에 들어가 쉬었다.
공이 쫓아내도록 명하자, 호송해 가는 자가 말하기를 “지나온 열읍(列邑)에서 다 그랬는데, 이곳에서만 어째서 유독 그렇게 못하겠는가.” 하고는 버티며 떠나지 않다가, 공이 더 심하게 노하는 것을 보고서 감히 머무르지 못해 결국 비를 맞으며 노숙하다가 날이 밝기도 전에 달아났다.
하루는 처남 김시제(金時濟)가 공과 시사(時事)를 담론하면서 문득 저사(儲嗣)를 세운 대신(大臣)을 역신 박필몽(朴弼夢)과 나란히 논하자, 공이 너무 놀라면서 당시 날이 이미 캄캄해졌는데도 조금도 가차 없이 바로 시종을 불러 몰아내었으니, 충의(忠義)가 성정에 뿌리박히고 역(逆)과 순(順)의 분변에 엄격함이 또 이와 같았다.
공은 숙종 1675년(숙종 1)에 태어나 금상(今上) 1736년(영조 12)에 별세하여 양주(楊州) 풍양(豐壤) 백양곡(白楊谷) 선영에 안장되었고, 이듬해 겨울에 거기서 남으로 10여 리 떨어진 금곡(金谷)의 신좌(申坐) 언덕으로 천장(遷葬)되었다.
부인 김씨는 우의정 문충공(文忠公) 휘 상용(尙容)의 현손이며, 고성군수(高城郡守) 휘 성달(盛達)이 그 부친이다. 지극한 성정을 지녀 어려서 편찮으신 모친을 시봉하면서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넣기까지 하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애훼(哀毁)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이씨(李氏)에게 시집온 뒤로 친부모처럼 시부모를 섬기고 친자매처럼 동서들을 대하여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어짊을 칭송하였다. 또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대의(大義)를 알아 평생 시기하고 능멸하거나 편협하고 막힌 생각이 없었다.
가난을 싫어하고 사치를 좋아하는 세속적인 말은 한 번도 입에서 낸 적이 없었으니, 아, 옛날 여 선비(女士)에 버금간다 하겠다. 공보다 6년 뒤에 별세하여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으니, 향년 69세이다.
설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경엽(慶燁)은 출계하여 중부(仲父)의 후사가 되었고, 경갑(慶甲)은 현재 건원릉(健元陵) 참봉이며, 딸은 참봉 홍대원(洪大源)과 부사 조혜경(趙惠慶)에게 출가하였다.
경엽은 아들이 없어 족자(族子) 제운(濟運)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고, 딸은 최육(崔)에게 출가하였다. 경갑은 2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만운(萬運)과 건운(健運)이고, 딸은 김이직(金履直)에게 출가하였다.
홍대원의 아들은 상귀(相龜)ㆍ상봉(相鳳)ㆍ상린(相麟)이고, 딸은 이훈(李壎)에게 출가하였다. 조혜경의 아들은 현기(顯琦)이다. 나는 공이 김익관(權益寬)의 시신을 쫓아낸 것과 처남을 혼낸 두 가지 일을 들을 때마다 속이 후련하여 벌떡 일어나 내가 종내 그분의 얼굴을 한 번도 뵙지 못하고 세상에 이런 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이제 묘역을 조성하는 일 때문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이에 대해 기꺼이 글을 쓰며 상세히 기재하는 이유는 후세에 밝게 게시하여 뒤의 군자들로 하여금 선배의 풍도(風度)를 듣고서 퇴락한 풍속에 대해 면려함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불행히도 지우를 입지 못해 당시에 역량을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충의(忠義)에 바탕을 둔 비분감개가 왕왕 담론하거나 호통을 치는 데서 드러나면 인륜이 그로 인해 타락하지 않는 법이다.
공이 흉적(凶賊)의 시신을 몰아내고 패려한 말을 배척한 것과 같은 일은 걸출하여 공경할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조정에서 그런 의리를 실행하여 세도(世道)를 다행스럽게 하지 못하였으니, 명(命)인가?
그러나 가령 공이 등용되었다 하더라도 시속이 똑같은 양상인 걸 보고는 틀림없이 사모(紗帽)를 찢으며 분(憤)이 나서 크게 욕을 해대며 그런 이들과 구차하게 용납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니, 또한 어찌 포의(布衣)로 지내며 뜻대로 살면서 부침(浮沈)하며 생을 마치는 것만 같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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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縣監李公墓誌銘 幷序
公諱恒壽。字汝久。姓李氏。其先咸平人。高祖諱培元。黃海監司。當丁丑汗虜之還。以不迎送于境。得罪於時。遂抹摋以終。曾祖諱沉。海州牧使。祖諱靖賢。掌隷院司議。考諱命相。開寧縣監。妣鄭氏。禮曹參判諱萬和之女。公生穎悟。九歲。嘗夜卧。聞人讀禹貢。卽誦之不錯一字。長游塲屋累發解。至覆試輒不利。晩筮仕爲繕工監役。陞氷庫別提。由義禁府都事。出監燕歧縣。公居官忠信守法。爲僚寀者。遇事難决。咸諮公以定。爲縣尤以廉約不擾爲主。有爲廵相婿者。謀葬親於聖廟禁地。乞甚哀。廵相亦屢以爲言。公堅不可。無奈何。後廵相亦對人嗟嘆云。公方直謹密有內守。居家整而有威。事非義不爲。與人言。必踐乃已。性喜酒。往往痛飮至醉。談論益激昂。氣宇犖然。可知非齷齪人也。公當在燕也。賊臣益寬。死於謫以柩過。諉以舊廵相。入停邑中官廨。公命逐之。護行者曰。所經列邑皆爾。此何獨不然。抵不去。見公怒益盛。不敢留。竟冐雨露宿。未明而跳。一日。婦弟金時濟對公談時事。輒以建儲大臣。比論逆夢。公大駭。時日已黑。立呼侍者驅出之。不少假。其性於忠義而嚴於逆順之辨。又如此。公生於肅宗乙卯。卒於今上丙辰。從葬于楊州豐壤白楊谷之先兆。翌年冬。遷于其南十餘里金谷申坐原。配金氏。右議政文忠公諱尙容之玄孫。高城郡守諱盛達其考也。有至性。幼侍母疾。至斮指。及喪幾滅性。旣歸李氏。事舅姑。如其父母。遇娣姒妯娌。如其姊妹。一家咸頌其仁。又能通經史識大義。平生無忌克褊塞之念。而世俗厭貧喜侈之言。未嘗一出於其口。噫。殆古之女士者耶。後公六年而歿。祔公以窆。壽六十九。有二男二女。男慶燁出爲仲父後。慶甲今爲健元陵參奉。女洪大源參奉,趙惠慶府使。慶燁無子。取族子濟運爲嗣。女崔。慶甲生二男一女。男萬運,健運。女金履直。洪之男相龜,相鳳,相麟。女李壎。趙之男顯琦。余每聞公逐寬屍罵婦弟二事。未嘗不爽然起立。恨余終不及一見其面。而世不復有此人也。今因幽堂之役。而特於此樂爲之書而詳載之者。盖所以昭示方來。使後之君子。猶得以聞前輩之風采。而庶頹俗之有勵焉爾。銘曰。
士不幸而不遇。無所施於當時。獨其忠義感慨。往往發於談論叱嗟。而彝倫爲之不隳。若公之黜凶屍而斥悖辭。不亦偉然可敬。而不得行其義於朝廷之上。以幸世道者命耶。然使公得用而觀時俗之所同。必將毁冠裂冕。發憤大詈。不肯與之苟容。又豈若布衣肆志浮沉以自終耶。
미호집> 渼湖集卷之十五>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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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고조 …… 별세하였다 : ‘한로(汗虜)’는 오랑캐 수장(首長)으로 곧 청나라 태종(太宗)을 가리킨다. 병자호란 결과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어 청 태종이 돌아갈 때에 호행관(護行官)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나가서 대기하도록 하였다.
이에 당시 황해 감사였던 이배원이 몹시 분개하여 “진감사(眞監司)가 어찌 나가서 가황제(假皇帝)를 기다리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眞監司 豈有出待假皇帝之理乎〕” 하였다. 이후 다른 일로 파면되었다가 형조ㆍ병조ㆍ공조의 참의를 지냈다. 《三山齋集 卷9 觀察使李公行狀》
[주03]박필몽(朴弼夢) : 1668~1728.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양경(良卿)이다. 1710년(숙종36)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ㆍ사서ㆍ정언을 거쳤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실록청(實錄廳)에 사사로이 출입한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어 노론의 공격을 받고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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