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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건일기' - 경복궁 중건 일기

야촌(1) 2021. 8. 15. 01:12

작성일 : 2019. 01. 27(일)

 

경복궁 중건 과정을 담은 -  '영건일기'

영건일기 1권 표지/요시다 도고 장서인 소장을 거쳐 지금은 와세다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영건일기 1권 내용

 

↑경복궁 영건일기의 광화문 현판 설명 부분.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자를 뜻하는 ‘묵질금자(墨質金字)’로 기록돼 있다.

  ⓒ서울특별시

경복궁 영건일기 국역본. ⓒ서울특별시

경복궁 영건일기 1권 표지. 서울시 제공

서울역사편찬원은 경복궁 중건 과정을 담은 '경복궁 영건일기(營建日記)' 번역서를 6월 발간할 예정이라고 27일 밝혔다.

경복궁 영건일기(총9책)는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중건의 전체 과정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다. 1865년 4월부터 1868년 7월까지 공사 과정과 내용을 날짜 별로 보여주고, 국왕과 대신 간 논의 내용부터 관료의 고충, 원납전(기부금) 징수를 둘러싼 각종 사건·사고까지 세밀하게 기록했다.

공사가 진행된 1860년대 시점의 경복궁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1880~1900년대 경북궁 관련 도면과 자료들에서 알 수 없는 정보 수집도 가능하다. 그 동안 연구자들은 ‘고종실록’ ‘승정원 일기’ 등 연대기 자료에서 관련 내용을 취합하거나 파편화된 자료에서 일부 정보만을 취해왔을 뿐이다.

경복궁 영건일기는 20세기 초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요시다 도고(吉田東伍)를 거쳐 현재는 일본 와세다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서울역사편찬원은 지난해 6월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번역 사업을 추진해왔다. 서울역사편찬원은 번역서 발간에 앞서 이달 2019년 1월 29일 영건일기의 가치를 논의하는 전문가 심포지엄을 연다. 6월에는 경복궁 중건을 주제로 서울역사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의 공간적 상징성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의 역사로 경복궁 중건에 관한 역사성은 오늘 그리고 미래 광화문 일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라고 말했다.

2019년 1월 27일

한국일보 배성재기자 pass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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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시대 국가 프로젝트 ‘경복궁 중건’ 기록 최초 번역

서울역사편찬원, 일본 와세다대 소장 유일본 ‘경복궁영건일기’ 논의 전문가 심포지엄 추진

서울역사편찬원(원장 이상배)이 경복궁 중건에 관한 유일본 ‘경복궁중건일기’를 최초로 번역발간하고 오는 29일 오후 2~6시 서울역사박물관 2층 세미나실에서 그 자료적 가치를 논의하는 전문가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고종시대 경복궁 중건은 단순히 궁궐 하나를 새로 짓는 것이 아니었다. 궁궐 앞 광화문 일대에 ‘서울의 중심’ ‘나라의 중심’이라는 공간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부여하며 조선이라는 국가의 지향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경복궁 중건은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제도 정비와 정치 개혁의 일환이었으며 ‘의정부 중수- 삼군부 설치- 육조거리 정비’로 이어지는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였다. 세도정치기 이후 개혁정치를 추진했던 흥선대원군은 광화문 일대의 대대적인 공간 변화를 이끈 설계자이기도 했다.

개혁정치의 지향점이었던 ‘왕을 중심으로 한 조선’은 경복궁 앞 공간에 그대로 투영됐다. 흥선대원군은 광화문 일대에 국가의 주요관서를 배치시켜 도성의 중심, 나라의 중심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번에 공개된 ‘경복궁영건일기(총 9책)’는 고종시대 흥선대원군 주도로 진행된 경복궁 중건의 전체 과정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료이자 중건의 구체적인 실상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다.

경복궁 중건이 역사적ㆍ도시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음에도 중건과정 전체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등 연대기 자료에서 관련내용을 취합하거나 파편화된 자료에서 일부 정보만을 취해왔을 뿐이다.

‘경복궁영건일기’는 1865년부터 1868년까지 공사의 과정과 내용을 날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총 9책의 완질형태로 남아있는 자료는 1~2책에 불과했던 기존 자료와 비교했을 때 그 가치가 높다. 공사가 진행된 1860년대 시점의 경복궁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1880~1900년대 경복궁 관련 도면과 자료들에서 알 수 없었던 정보도 파악할 수 있다.

‘경복궁영건일기’에는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 남아 있지 않은 국왕의 전교나 신하의 계사 내용도 상당수 수록돼 있고 지방에서 재목과 비용을 마련하는 어려움, 돈을 들고 도망가는 사건들도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경복궁 중건에 대해 논의하는 국왕과 대신, 원납전 징수를 둘러싼 중앙과 지방 관료, 공사에 동원된 일반민들과 주변인들. ‘경복궁영건일기’는 경복궁 중건에 관여한 모든 사람의 다양한 양상을 담고 있다. 자료는 경복궁 중건의 역사상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서울역사편찬원은 지난해 6월 ‘경복궁영건일기’가 일본 와세다대학에 소장된 사실을 확인하고 번역사업을 추진해 왔다. 이번 심포지엄은 자료가치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첫 번째 자리이다. 2018년 6월 정재정(서울역사자문관), 이우태(서울시사편찬위원장), 기미지마 가즈히코(君島和彦, 도쿄가쿠게이대 명예교수)의 도움을 받아 자료를 확인하고 소장처 협조를 받아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물인 번역서는 오는 6월 발간할 예정이며 29일 심포지엄은 중간보고의 성격을 가진다. 번역과정에서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을 당대의 역사적 맥락 위에서 소개하며 ‘경복궁영건일기’가 단순히 경복궁 복원의 참고자료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예정이다.

서울사료총서 심포지엄은 ‘경복궁영건일기의 자료적 가치’라는 주제를 가지고 총 3개의 발표로 구성됐으며 김동욱(경기대 명예교수), 홍순민(명지대 교수) 등 궁궐 전문가가 토론자로 참여해 깊이 있는 논의의 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제1발표는 ‘경복궁영건일기와 요시다 도고’란 제목으로 ‘경복궁영건일기’라는 책의 역사를 살펴본 내용이다. 일본 와세다 도서관에 소장된 ‘경복궁영건일기’에는 ‘낙랑서재(樂浪書齋)’라는 장서인이 찍혀있다. 20세기 초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1864~1918)가 소장했던 책이다.

이우태 서울시사편찬위원장은 당시 일본학자가 ‘경복궁영건일기’를 입수했던 경위를 20세기 전후 조선의 역사적 배경 위에서 조명했다. 제2~3발표는 ‘경복궁영건일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제2발표는 ‘경복궁 중건의 미시사: 영건일기가 전해주는 새로운 사실들’이라는 제목이다.

대원군 집권기의 정치사회사, 경복궁 중건사, 도시생활문화사, 경복궁 복원 고증 등 전반에 걸쳐 자료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포괄적으로 검토했다. 배우성 서울시립대 교수는 “경복궁영건일기는 경복궁 중건에 관한 모든 것들의 연대기”라고 강조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대원군은 ‘18학사(學士)’라 불리는 막료 그룹에 의존해 경복궁 중건을 추진했으며 중건을 둘러싼 대원군집권기 권력 간의 정치적 긴장이 존재했다. ‘천명(天命)’으로 합리화된 중건공사는 더위와 전염병, 심지어 병인양오에도 강행됐다.

이는 병인양요로 공사가 지체됐을 것이라는 기존에 알려진 사실과 다르다.

또 중건 과정에서 궁궐 주변의 대저택을 매입 혹은 원납 받은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궁궐 안팎의 물리적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경복궁 수문(水門)ㆍ수도(水道)ㆍ도회은구(都會隱溝)의 모습을 비롯해 조선 초 경복궁과 어떻게 다르게 지어졌는지, 연길당과 응지당이 강녕전의 동서 퇴선간이었다는 점 등이 ‘경복궁영건일기’를 통해 발견된 사실이다.

이밖에 공사장 안팎의 인간 군상과 공사장 풍경에 대한 묘사는 기존의 관찬 자료을 통해 알 수 없었던 자료이다.

공사 현장에는 역부를 상대하는 주점과 식당, 사탕장수와 담배 장수, 심지어 기생들이 있었다. 문학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었던 모습을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의 역사상으로 재현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3발표는 ‘고종대 경복궁 중건 원납전의 납부 실태와 배경’을 주제로 진행된다. 흥선대원군의 폐정(弊政)으로 평가받는 원납전 문제를 다뤘다. 원납전(願納錢)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수를 위해 받아들인 기부금으로 ‘원해서 납부하는 돈’이라는 뜻이지만 징수 과정에서 많은 민폐를 유발, ‘원납전(怨納錢), 원통하게 납부하는 돈’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했다.

나영훈 한중연 연구교수는 ‘경복궁영건일기’를 통해 원납전의 구체적 실상에 접근했다. ‘경복궁영건일기’는 원납전의 월간 총액뿐 아니라 매일 누가 얼마의 원납전을 납부했는지 기록했다. 지금까지 원납전에 대한 연구는 사료 한계로 원납전의 총량적인 측면만 언급하거나 일부 상소 내용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확인했지만 원납전 성격을 규명할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그에 따르면 원납전은 명백히 강제성을 담보한 별도의 세금 성격이 있었다. 중앙에서는 항상 원납전을 절대 강요하지 말고 자원에 의해 받아야한다고 공문을 보내지만 문구 뒤에는 늘 각 군현에서 원납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는 현실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일부 개인들에게는 자원해서 내는 기부금의 성격도 분명히 공존했다. 개인이 납부한 금액은 최대 3만냥에서 10냥까지 액수가 다양한다. 하나의 군현에 상당할 정도로 많은 액수를 기부한 개인 납부자들도 있다. 대부분이 양반 계층으로 관직 획득이나 개인적 명예 즉 자신의 영화를 위한 수단으로 원납전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경복궁 중건을 위한 원납전 징수 과정에서 사건과 사고도 많았다. 개인적인 채권을 결부시켜 납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평양에 사는 김도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자 이를 원납전으로 내려고 한다며 개인의 사적 채무를 국가에 넘겼다. 이에 정부에서는 장교를 보내 채무자에게 돈을 받아오게 했다.

중앙으로 원납전을 상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폐해도 많았다. 서리배가 원납전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은 물론, 모금된 원납전을 가지고 올라간 사람이 돈을 떼어 먹는 경우도 발생했다. 홍원현의 원납전 상납을 맡은 박동인은 배가 부서져 돈이 없어졌다고 거짓보고를 하고 개인적으로 흥청망청 써버린 뒤 발각되기도 했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의 공간적 상징성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의 역사이다. 고종시대 경복궁 중건에 관한 역사상은 오늘, 그리고 미래의 광화문 일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라고 말했다.

서울역사편찬원은 올해 6월 번역서 발간에 맞춰 ‘경복궁 중건,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를 주제로 제18회 서울역사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경복궁 관련 국내외 학계 전문가 등을 모시고 ‘경복궁영건일기’에 담겨 있는 흥미로운 사실들을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자리로 6월 17일 개최할 예정이다.

오는 1월 29일 개최될 예정인 심포지엄 관련 사항은 서울역사편찬원(02-413-9622, 김현정)으로 문의하면 된다.

오늘날의 경복궁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