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면에 목사 이공 완 청덕 선정영세물망비라고 기록되어있다.
소재지 : 경기도 양주 관아지
이완의 송덕비는 방형 대좌에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 형태의 개석을 올린 형태이다.
비신의 파손이 상당하다. 앞면에는 ‘목사 이공 완 청덕선정영세불망비’라고 새겼으며, 1643년(인조 21)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완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아버지는 인조반정 공신 이수일(李守一)이며, 어머니는 완산이씨(完山李氏)로 이귀년(李貴年)의 딸이다.
이완(李浣)[1602~1674]은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인조반정 공신으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서(李曙)의 추천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가 되었고, 1627년(인조 5) 영유현령을 거쳐 1629년(인조 7) 상원군수, 이듬해 숙천부사, 1631년(인조 9)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별장(別將)으로 나가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켰다. 1640년(인조 18) 황해병사로 있을 때 청나라의 요구로 주사대장(舟師大將) 임경업(林慶業)의 부장(副將)이 되어 명나라를 치러 가게 되었다. 이완이 이런 사실을 명나라 장수에게 몰래 알린 덕분에 양쪽 군대가 종일토록 싸웠는데도 일절 사상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완은 이듬해 8월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벼슬을 받지 못하였다.
1643년 4월 양주목사로 부임했다가 5월 경기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 통어사가 되어 수도 외곽 방어를 맡았다. 그 뒤 공청도 병마절도사(公淸道兵馬節度使)로 부임하였으나 내상을 당해 칩거하였다. 인조 말년에 어영대장으로 다시 조정에 나갔다. 1653년(효종 4) 11월 그동안 훈척(勳戚)[공로가 있는 임금의 친척]들이 맡아 오던 훈련대장에 임명되어 16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면서 다른 벼슬을 겸하였다. 1659년(효종 10) 4월 임금이 죽자 훈련대장 겸 한성판윤으로 도감의 병사를 동원하여 궁성을 지켰다.
현종 즉위 후 조정은 북벌에 대한 의지가 약해졌으나 여전히 훈련대장을 맡으면서 판윤, 공조 판사·형조판서로 중용되었다. 때로는 포도대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666년(현종 7) 8월 판의금(判義禁), 그해 12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깊어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며 나아가지 않았다.
1667년(현종 8) 3월 왕이 온양에 행차한 사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도성을 지켰다. 이때 궁을 지키는 장수에게 내리는 군호 문제로 병조와 다투어 파직되었다가 그해 7월 포도대장에 복귀하였다. 그 뒤 판윤, 형조판서·병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번번이 사양하였다. 1671년(현종 12) 5월에 수어사(守禦使)에 이어 1674년(현종 15) 5월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한 달 뒤 군역(軍役) 문제에 대한 상소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상거리 산19번지에 무덤과 신도비가 있다. 이완장군의 묘는 답사한 일이 있지만, 입구 도로변의 신도비는 놓쳐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1685년(숙종 11) 8월 정익(貞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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