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神道碑)란? 예전에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행적(行跡)을 기리는 비석을 이르던 말이다.
『쌍오비각(雙梧碑閣)』 현판(懸板)
비각안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모셔져있는데 좌측의 조금 작은 비가 오촌 이대건『梧村 李大建,1550 ~1574)』 신도비이고 우측의 큰 신도비가 그의 아들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 1569년(선조 2)∼
1626년(인조 4)』 의 신도비입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142호
오촌 이대건(梧村 李大建)과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선생 부자(父子)의 신도비각을 『쌍오비각(雙梧碑閣)』이라 합니다. 부자(父子)의 호(號)에 똑같이 梧(오)자가 들어 있는 것은 두분이 살았던 청주 梧根里(오근리/지금의 장대리)와의 연고 때문 입니다. 벽오 이시발 선생은 선조 2년(1569)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장대리(오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비각의 후면에서 촬영한 사진 입니다.
비각의 후면 사진 입니다.
『쌍오비각』의 현판 글씨는 1985년(乙丑) 당시 성균관대학교 국어 국문학 이춘희 교수의 글씨 입니다.
비각 안 왼쪽에 있는 벽오 이시발 선생의 부친 오촌 이대건 신도비 입니다.
1658년(효종 9)에 세워진 이대건(李大建)의 신도비이다. 조선시대의 문인이자 학자인 최립(1539~1612)이 비문을 짓고, 손자인 이경휘(李慶徽, 1617~1669)가 썼다. 전서·주서에 뛰어났던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전서(篆書)하였다.
오촌 이대건『李大建,1550(명종 5)~1574(선조 7)/향년 24세』은 조선전기 우의정에 추증된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립(汝立), 호는 오촌(梧村). 이원(李黿)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증 좌승지 이경윤(李憬胤)이며, 어머니는 원주이씨(原州李氏)로 병절교위 이은(李垠)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증광향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유중영(柳仲郢)이 한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 시행한 시험에서 1등을 하였다. 그 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일찍 요절하지 않았다면 훗날 나라를 위해 큰 인물이 되었을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숙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어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비각의 오른쪽에 위치한 벽오 이시발 선생의 신도비이다.
이시발 선생의 묘(墓)는 충북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지금의 장대리)에 소재하던 것을 1658년(효종 9) 이곳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로 이장하였는데, 자손들이 번성하여 훌륭한 인물을 줄이어 배출되어 사람들은 그들을 초평이씨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도 선생의 13대손이다.
<쌍오비각 뒤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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