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취재파일] 임상범 기자 입력 2021. 04. 04. 09:09 수정 2021. 04. 04. 09:48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1395년 경복궁을 창건합니다. 경복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따왔습니다.
조선 국왕들의 유교 정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상징과도 같았던 경복궁은 엄격한 대칭과 비례에 따라 지어졌습니다. 경복궁의 원래 모습을 담은 조선시대 북궐도나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고적도보 등을 보면 그 균형미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북궐도
↑조선총독부 제작 경복궁 배치도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가 거행됐던 근정전을 중심으로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과 북문인 신무문이 축이 됐고 동문인 건춘문과 서문인 영추문이 좌우 대칭을 이뤘습니다. 유교사회에서 군왕이라는 것이 조화, 중용의 도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상하, 좌우, 동서남북의 정확한 방형 대칭 구조를 가지고 궁궐이 만들어지는 것이 궁궐 건축의 대원칙이었던 겁니다.
조선왕조의 정궁이자 법궁인 경복궁은 굴곡 많던 조선의 역사만큼이나 이런저런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1553년, 왕의 침전인 강녕전에서 시작된 불로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됩니다. 이듬해에 강녕전 외에 교태전·연생전·흠경각·사정전을 복구했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경복궁이 길하지 못하다는 얘기까지 나오면서 왜란 후 경복궁 대신 창덕궁이 재건됐습니다.
그러다 경복궁이 중건된 것은 흥선대원군 때의 일입니다. 1865년 시작된 중건 공사는 1867년 말에 끝났습니다. 대원군의 강력한 의지로 원래보다 훨씬 큰 규모로 다시 세워졌는데 건물이 7천225칸 반에 궁성 담장의 길이도 1천765칸에 달했습니다.
궁이 완성되자 고종은 경복궁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경복궁 곳곳이 훼손됐고, 본 모습을 잃어갔습니다. 박정희 정권 이래 경복궁의 옛 모습 찾기가 시도됐지만 그 복원에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1. 비뚤어진 궁궐
광화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나중에 중앙청으로 사용)은 김영삼 정부 시절 독립 50주년을 맞아 철거됐고, 노무현 정부 때는 조선총독부 정문 자리에 틀어진 채 서 있던 광화문을 철거하고 원래의 위치에 남북 축선을 바로잡아 복원했습니다.
남북은 바로 잡았다지만 경복궁의 동서, 좌우의 날개는 제대로 되어 있을까요? 서문인 영추문은 1926년 석축 붕괴를 이유로 일제에 의해 철거됐습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담장 옆으로 전차가 보이는데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경복궁 내 공사장까지 전차로 공사자재를 실어 날랐고 전차의 진동으로 인한 충격이 누적돼 영추문이 무너졌다는 게 정설처럼 돼 있습니다.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세상을 떠난 지 이틀 만인 1926년 4월 27일 벌어진 일이었는데 항간에는 순종의 승하를 슬퍼해 영추문이 무너졌다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이 지난 197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복원됐습니다. 그런데 원형인 목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었습니다.
역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더 문제는 동과 서, 두 문이 균형이 깨진 채 틀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근정전을 드나드는 양쪽 통로도 비뚤게 나 있습니다. 서쪽 영추문을 복원하면서 제자리보다 50미터 북쪽에 지었기 때문인데, 복원 당시 경복궁에 주둔하던 군부대, 수도경비사령부를 피해 지으면서 생긴 일입니다.
예전 사진을 보면 신무문을 드나드는 무장병력 장갑차의 모습도 보이고, 광화문 안 쪽에서 집단 구보중인 군인들도 찍혀 있는데, 군부가 실세였던 시절, 청와대를 지키는 수경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자료입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수경사가 경복궁에서 나간 지도 30년이 다 돼가는데 여지껏 원형 복원을 하지 않고 균형이 깨진 상태로 방치돼 있다는 것은 문화재 복원에 있어 대단히 큰 오류이자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화재청은 영추문 복원사업이 '궐내각사 권역 복원 단계'에 따른 경복궁 2차 복원계획에 포함돼 원래 위치를 찾아 목조 건물로 2024년부터 2026년까지 복원할 예정이라고 SBS에 밝혀왔습니다.
↑일제의 영추문 철거 당시
2. 제각각 현판…뒤죽박죽인 잡상과 주련
경복궁의 수많은 궁궐 건물들의 얼굴이자 명패인 현판에도 오류가 심각합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 검은 바탕에 흰 글씨, 어떤 건 금색, 또 어떤 건 청색, 바탕과 글자색 구분이 뒤죽박죽이고 서체도 예서부터 해서, 행서까지 일관성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 기사를 보시고 경복궁을 다시 둘러보시다보면 금세 눈치채실 겁니다. 뭐가 맞는지 고증이 어렵다는 게 문화재청의 해명인데, 명성황후가 왜(倭)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비극의 장소인 건청궁과 곤령합에도 잘못된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두 현판은 박물관에 버젓이 원판이 있는데도, 엉뚱한 모조품으로 복원했습니다. 건청궁에 걸린 지금 현판은 글자색이 푸른 계통이기는 하나 코발트색에 가까운 원판의 글자와는 차이가 확연하고 현판의 테두리 장식과 두인이나 낙관 조각의 형태도 다릅니다. 곤령합 현판의 경우도 바탕은 검은색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흰색이 분명한 글자색과 달리 원판은 금색 칠이 벗져진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곤령합 현판 원판
잡귀를 쫓기 위해 추녀마루에 세워 놓는 잡상도 엉망입니다. 청연각 3개, 자경전 4개, 자선당 5개, 수정전 6개, 근정전 7개, 경회루 11개 등 개수도 제각각에 홀수, 짝수 같은 원칙도 없고 수정전 위 잡상처럼 군데군데 불량품까지 섞여 있습니다.
세자의 처소이자 우리에게 동궁이란 이름으로 익숙한 자선당은 일제 때 도쿄에 있는 오쿠라호텔로 반출됐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으로 반출된 자선당은 1923년 관동대지진때 화재로 소실된 채 건물 기단만 남아있었던 것을 1996년 건물 기단만 국내로 돌아와 1999년 복원됐는데 예전 사진과 비교하니 좀 다릅니다.
우선 잡상의 수가 무슨 연유에선지 6개에서 5개로 줄었고, 1개의 통계단이던 게 분리된 3개의 계단으로 바뀌었습니다. 문화재청은 관계전문가의 자문과 고증을 거쳐 제대로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확실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자선당 일제 반출 시절 모습(위)과 현재의 모습(아래)
많은 전문가들은 잡상의 수와 관련해 3, 5, 7, 9, 11 등 홀수가 맞다고 하지만, 문화재청은 건물 규모나 성격에 따라 개수를 달리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주련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기둥에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고 해서 주련입니다.
5언이나 7언의 유명 한시나 자작한 작품을 쓰기도 하는데 2개씩 대구를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은 순서가 뒤바뀌어 있습니다.오른쪽부터 1, 2, 3, 4, 5, 6의 순서가 1,6 2,5, 3,4로 정리되는 게 맞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인데 이미 10년 그 전부터 오류를 지적했지만 고치지지 않은 채 그대로입니다.
↑집옥재 전경
한자 문화권 관광객들 눈에는 뭔가 잘못돼 있음이 보일 수도 있거니와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문화재라는 건 원래 모습대로 제대로 복원하는게 원칙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되겠습니다. 문화재청은 주련의 경우 1920년대 사진을 보면 좌우 양측에서 점차 안쪽으로 댓구를 이루는 배치로 되어 있기도 하다고 반박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주련은 2개를 바로 나란히 거는 것이 '철칙'이라면서 1920년대 사진도 이미 잘못된 위치로 되어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재반박했습니다. 그러면서 건청궁 옥호루의 주련이 전문가들의 고증을 통해 최근 바르게 수정된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문화재청은 현판과 잡상, 주련 등의 오류 지적에 대해 향후 건물 복원 시 옛 사진 자료 등을 참조하고,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거치는 등 원형 복원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습니다.
아울러 경복궁 내 주요 건물들의 가치를 평가한 국유재산 가액이 너무 낮다는 지적에 대해 문화재청은 복원에 필요한 소요액을 기준으로 국유재산 가격을 재산정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국정감사 등을 통해 드러난 경복궁 내 주요 궁능의 국유재산 가액을 보면 국보인 근정전 32억 9천110만 원,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 18억 7천524만 원, 대비가 머물던 자경전 12억 6천904만 원, 집현전이 있던 수정전 8억 7천670만 원 등이었습니다.
문화재청은 금년에는 우선적으로 근정전에 대하여 이 기준에 따라 가격을 산정한 후 반영하였으며, 추후 궁·능 내 주요 건축물에 대하여도 지속적으로 보험 가액을 현실화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 [8뉴스] 경복궁 비뚤게 짓고 현판은 엉뚱…엉터리 복원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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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범 기자doongl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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