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장. 시장.

국포 이익만 행장(菊圃 李翼萬 行狀) - 척암 김도화

야촌(1) 2021. 3. 21. 23:12

국포 이익만 행장(菊圃 李翼萬 行狀) / 판전공파

생졸년 : 1795년(정조 19) ~ 1870년(고종 7)

 

1795년(정조 19) 2월∼1870년(고종 7) 5월 16일.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사붕(士鵬)이고, 호는 국포(菊圃)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증조부는 이태문(李泰文)이고, 조부는 이춘선(李春善)이다.

 

부친은 이우하(李友夏)이고, 생부 이우성(李友晟)과 생모 손언두(孫彦斗)의 딸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민점로(閔漸魯)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6세에 부친에게 19사를 배웠고, 18세 때 매제(妹弟) 이찬견(李鑽堅)과 함께 비곡(匪谷) 이석호(李錫琥)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죽오(竹塢) 이근오(李勤吾)와 향리의 윤빈묵(尹璸黙)‧박희영(朴羲永)‧권찬환(權瓚煥) 등과 산사(山寺)에 모여서 학문과 과업(課業)을 갈고 닦으며 교유하였다.

 

1836년(헌종 2)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고, 연이어 중하과(中夏科) 복시(覆試)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60년(철종 11) 향리의 사림들이 행의(行誼)로써 천거하였으나 부끄럽게 여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서실을 지어 ‘국포(菊圃)’라 편액하고, 시작(詩作)에 몰두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한편 주자서(朱子書)를 읽으며, 초사(楚辭) 및 당송팔대가의 문장규범을 관찰하고 연구하였다. 향년 7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주효(李疇孝)이다.

저서로 『국포일고(菊圃逸稿)』가 있다.

 

[原文]

 

菊圃李公行狀 - 척암 김도화 찬

 

公諱翼萬、字士鵬、姓李氏、系出慶州 新羅佐命功 臣謁平之後也。中世有諱 判典客寺事、有諱萬 壽 參奉始居蔚山、有諱孝文有學行、有諱碩宗壬 辰倡義錄宣武勳、於公爲七世也。高祖曰筍、曾祖 曰泰文、祖曰春善、考曰友夏、妣星州李氏晶女、密 陽孫氏彦斗女、有婦行。健陵乙卯二月、壬申、公生于良川里第。孫氏出也姿相岐嶷、才思穎異、始 學字言下卽解。先公喜曰、吾家文種不絶矣。六歲 受十九史、朞年而訖。因學少微史、至鄧禹收十一 帝神、主公歷擧十一帝不遺、人皆驚異之。嘗有大 志與等輩遊、未嘗則劇耽讀不懈、雖有忙迫之事、 必了其所讀而后起、至舞勺之歲成誦者已多、詞 翰翩然出群矣。年十八與姊壻李公鑽堅往學于 昌星齋李公。李公一見嗟賞以爲得君晩也。因與 門下諸賢若李公稷臣李公体卿、晨夕切磋頗有 資警之益。戊寅遊貳室外舅閔公甚奇愛之、有滄海明珠之稱焉。時黌師李公覲吾與鄕秀尹公家、 默朴公羲敬及月城權正字 瓚煥。諸公會山寺講 書、課藝。公往、從之有鳳翔千仞之句、李公亟加歎 賞曰、氣象甚好矣。每遊場屋諸生以題義來問者、 應答無滯、不以已卷差遲而嫌也。性又至孝、自髫 齔時未嘗違咈。親志得一顆果一臠肉必進于父 母。旣長夙夜侍側、以讀書誦詩爲慰悅之資。或出 外而還、則詳陳所過見聞常愉愉如也。壬午遭內 艱、哀敬備至。丙申中鄕解不利南省、後又連中夏 科皆屈于覆試、而不以介懷也。庚子鄕人薦公行 義至登道啓而竟寢公議。惜之庚成丁先公憂守 制如前、喪晩築書室於後麓爲歲晩優遊之計、而 築圃種菊因以菊圃二字扁其楣、作詩與記以見 志。自是遠近從學者日益盈門、而公懇懇提誘期 於透曉而後已。公嘗於病綴中流看事文類聚及 類苑䕺寶一過矣、其後人有來問事蹟者輒口 無滯其聰明強記又如此、日必蚤起冠帶、終日危 坐不以獨處而放意。凡里巷鄙俚之語絶不上口、 雖童幼輩些有此等口業、警責不已。尤篤於追遠 每遇先忌前期齊沐及日煍然至老不衰、友誼隆至、與仲氏松坡公同爨五十餘年、人無間言、待宗 族一以敦睦爲務、每飢歲則其窮乏無依者必極 力喣濡收置失哺兒推食食之隨才敎導至於成 就皆人所難也。常愛誦朱書楚騷及韓歐蘇文數 篇以觀文章軌範、謂諸子曰、儞輩無看書之癖寧 有所得乎。庚午春遇疾呻囈猶不廢書冊、至臨化 前二日、命開箱篋手檢遺籍曰吾家世淸、寒無可 以遺子孫、但得文脈無絶、可也、翌日。鷄鳴悠然而 逝、卽五月十六日也。享年七十六、葬于後山負离 之。原配驪興閔氏漸魯女配德無違先公、歿葬在 鰲田。有一男疇孝、二女徐德秉 孫永䂀。疇孝嗣子 裕冕、二女李能浹 李章、浩餘幼嗚呼。公有厚重之 姿、有聰穎之才、而承襲於家庭詩禮之敎。滋益於 師友磨礲之間、德行足以範於鄕、文藝足以施於 世。而公議久絶、汲引無綆、卒之老死林樊、世無得 以知。漢太史非附靑雲之歎不亦可悲哉。日公之 從子庭孝、甫以遺狀授其子裕冕、跋涉數百里、囑 不佞而敍次之。自顧耄荒不足以當是寄、而竊悲 其巖穴之士名湮沒而不稱、迺於唫病之暇略敍 其槩、以俟秉筆者財擇焉。<끝>

 

拓菴先生文集卷之三十四 / 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