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03. 21
■ 이빈(李彬)
[시대] 고려 말
[생년] 미상
[본관] 다시 고증 요함
[졸년] 1410년(태종 10)
[경력] 회군공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원종공신(原從功臣),
경기우도관찰출척사(京畿右道觀察黜陟使), 사평부좌사(司平府左使), 형조 및 호조판서(1409)를 지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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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무관으로. 본관은 미상(未祥)이다.
1388년(우왕 14) 동북면 부원수로서 요동 정벌(遼東征伐)에서 이성계(李成桂) 등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뒤 우왕의 후궁들을 모두 사가(私家)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아버지는 모두 멀리 유배를 보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조영길(趙英吉)이 몰래 도망 나와 개경에 들어온 것을 알고서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1390년(공양왕 2) 회군공신에 봉하여졌으나, 김종연(金宗衍)과 판사 조유(趙裕)가 이성계를 해치려 한 음모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아 다시 안협(安峽)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 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의 일당으로 몰려 다시 탄핵을 받았다.
그 후 조선이 개국한 뒤인 1395년(태조 4) 3월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올랐다으며, 1393년(태조 2) 경기우도관찰출척사(京畿右道觀察黜陟使)에 임명되고, 1395년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다음해 축성제조(築城提調)로서 공사감독을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삭직되어 영해부로 유배되었다.
1399년(정종 1) 왜구가 서북면 선천·박천에 침입하자 충청도조전절제사로 출정하였다. 1402년(태종 2) 서북면도순문사·사평부좌사(司平府左使)를 거쳐 서북면도절제사가 되고, 그 뒤 우군도총제를 겸직, 다음해 사평부좌사로 민무휼(閔無恤)과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서 종계변명주본(宗系辨明奏本)을 올렸다.
1404년 참찬 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순금사만호(巡禁司萬戶)를 거쳐, 1409년 형조·호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이해 민무휼사건에 관련된 윤목(尹穆)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사형 당하였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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