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심집(沈諿 )

야촌(1) 2021. 1. 2. 15:27

1569년(선조 2)~1644년(인조 22) 때의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순(子順), 호는 남애(南崖). 승문원판교 심달원(沈達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 심자(沈鎡)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심우정(沈友正)이다. 어머니는 광주 안씨(廣州安氏)로 안여경(安汝敬)의 딸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檢閱)·대교(待敎) 등을 역임하면서 사정(邪正: 옳고 그름)을 논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한때 은거하였다.

 

1601년에 예문관검열로 복관되어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수원판관이 되었는데, 당시 간관이었던 정홍익(鄭弘翼)과 함께 무고를 받은 성혼(成渾)을 변론하다가 옹진현령으로 좌천되었다.

 

1605년 전적(典籍)·예조정랑·정언 겸 문학(正言兼文學) 등을 두루 거쳐 1607년에는 죽산부사(竹山府使)로 나아갔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으로 직언하다가 다시 면직되었다.

 

그 뒤 은계찰방(銀溪察訪)·해운판관(海運判官)을 거쳐 고령현감이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당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방한 데 반발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다시 면직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양호염철조도사(兩湖鹽鐵調度使)로 나갔다가 사예(司藝)·검상(檢詳)·사인(舍人)·보덕(輔德) 등을 역임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한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인조반정 후 병조참지가 되고, 왕의 신임을 얻어 도승지·안변부사, 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636년에는 형조판서로서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이 때 화친의 조건이 되는 볼모로서 왕족인 능봉군(綾峯君)이 왕의 동생으로, 판서인 심즙이 대신으로 가장했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듬해 이로 인하여 유백증(兪伯曾) 등의 탄핵을 받아 문외출송(門外黜送: 성 밖으로 쫓겨남)되었으나, 1638년에 용서받아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1644년 아들 심동구(沈東龜)가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연좌되어 유배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뒤에 아들로 말미암아 직첩(職牒: 관원의 임명사령장)을 환수당했으나 숙종 때 송시열(宋時烈) 등에 의해 신원(伸寃: 억울한 죄가 바르게)되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이분을 짧은 말로 요약하면 소신이 분명하고 바른말(直言)을 잘해서 롤러코스트 인생을 사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