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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생묘표음기(李景生墓表陰記) - 병계 윤봉구

야촌(1) 2020. 11. 28. 02:03

[이경생,李景生] 1619년(광해군 11) ~ 1703년(숙종 29)

 

李君 景生 墓表 壬午

 

華陽宋文正先生以正學大道。爲一世宗師。當是時。四方之經生學子。莫不聞風興起。月城李君景生。亦自利縣至。執贄於華陽。受近思錄等書。先生手書眞實心地刻苦工夫八字以勉焉。蓋與之進也。君羣行焯焯。不可選記。而惟孝事父母。色愉婉務順志。及喪毁成疾。不許進薑桂。族祖居數里。晨昏必往省。期功喪。不飮酒食肉。終其制。所謂加人一等者也。常曰。禮者人之所大閑。一踰此。無所不爲。利者慾之所由生。一放行。百惡備至。必敬而勿失。克治益嚴。方可爲學。見人善。惟恐其或掩。而見不善。則嫉之如仇讎。與人言。有犯長上者。輒不與之酬酢。以此鄕鄰有不義者。皆憚君之知之也。貧無資。一毫不苟取。語其子。吾死。勿以紬緞斂屍。吾未曾服此。死而有知。豈能安。其守貧儉約多類此。君幼有聰明。稍長。淹貫經史。傍通外書。亦不屑爲。所願學爲己也。晩乃出入於大贒之門。見聞益廣。操履益篤。其成就不止爲北方大儒而已。當師門變起。與同門先進疏辨先生誣。己巳之禍。迎哭於南陬。君旣事親孝。於師又能盡一事之義。其可以警衰俗之渝也夫。月城之李。其始祖諱謁平。歷羅麗幾世。至我世宗朝。有諱地。以雙城君金得禮女婿。坐豪强。全家配端川。時割端川地。新設利縣。子孫仍爲利縣人。七世至諱士國。是君之祖也。考諱應男。妣梁川金氏。夢虎之女。君字伯行。生於萬曆己未。卒於癸未九月十七日。壽八十五。墓在縣東摩雲嶺下負亥之原。先兆也。配朱氏。工曹典書仁之後。其考鳳翼也。柔順慈和。事君子無違。後君三年歿。享年八十有九。男之榮,之華,之芳。女適金舜赫。之華以家學稱。孫曾多不盡錄。之華孫德符早從諸大人學。又遊李陶菴,李松菴門。知名士友間。卽來謁文者也。銘曰。
北學豪傑。宋文正語。一言之重。九鼎大呂。特書之石。我筆無怍。嗟爾後生。過此必式。<끝>

 

출처 : 屛溪先生集卷之五十五 / 墓表 - 윤봉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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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생(李景生)

     [무과] 인조(仁祖) 15년(1637) 정축(丁丑) 별시(別試) 병과(丙科) 957위(1058/5536)

 

1619년(광해군 11)∼1703년(숙종 29). 조선 중기 유생. 자는 백행(伯行)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함경남도 이현(利縣)이다.

 

조부는 이사국(李士國)이고, 부친은 이응남(李應男)이다.

외조부는 김몽호(金夢虎)이다. 처부는 주봉익(朱鳳翼)이다.


함경남도 이현(利縣)에서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화양동(華陽洞)으로 와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서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다. 우암이 직접 “심지는 진실하게 공부는 각고하게[眞實心地刻苦工夫]”라는 여덟 글자를 써주어 공부에 힘쓰도록 하였다.

 

부모를 섬길 때에는 안색을 부드럽게 하고 부모의 뜻을 따랐으며, 상례를 충실하게 따르다가 병을 얻었으나 몸을 보한다는 생강과 계피를 먹지 않았다. 몇 리 떨어져 사는 집안 할아버지를 아침저녁으로 문안하였으며, 기년복이나 대공 및 소공복에도 상제가 끝날 때까지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자라서는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하고 경서 외의 서적에도 두루 밝았으나 좋아하지 않고 오직 수양공부에만 충실하였다. 만년에 우암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견문을 더욱 넓히고 조리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묘는 함경남도 이현(利縣) 마운령(摩雲嶺)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