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섬계 이잠 선생 묘갈문[25世]

야촌(1) 2018. 12. 22. 23:41

섬계 선생 묘갈문[25世]

 

 은진 송근수 찬(恩津 宋近洙 撰)

1818년(순조 18) ~ 1903년(고종 40)

 

청주 상당(上黨) 북쪽 십리지점에 석화리(石花里)가 있으니 고(故) 섬계(剡溪). 서계(西溪). 두 이 선생(李先生) 부자분이 여기에서 살았다.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어서 그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이 서로 가리켜서 말하기를 「서계의 학문이 사실은 섬계에서 나왔다.」고 한다.

 

대개 서계선생이 티 없고 정미한 학문을 천양하여 세상에서 이름 있는 유학자가 되어서 반드시 그 가정적인 학문의 연원(淵源>내려온 학문적 계통)을 일컬으니 그분이 바로 섬계 선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재목을 보면 그 산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그렇지 않겠는가?

 

선생이 하세 한 지 수 백년이 된다. 그런데도 묘도에는 비를 세우지 못하였다.

금년 여름에 여러 후손들이 조그만 돌을 다듬어서 묘도에 표하려 하여 나에게 글을 써서 기록하도록 하였다. 돌아 보건데 내가 남을 민몰하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 못된다.

 

황차 선생이 무궁토록 스스로 민몰하지 않는 사람이어 늘 어찌 나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누차 사양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아서 마침내 그 문인 록과 행장에 의거하여 바루어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선생의 이름은 잠(潛)이고 자는 태소(太昭)니 경주(慶州) 사람이다.

 

시조 알평(謁平)은 신라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익재(益齋) 문 충공에 이르러 현저하게 되어 우리 동방의 명망 있는 씨족이 되었다. 선생은 곧 그의 팔(八)대손이 된다. 고조 계번(繼蕃)은 낙안군사(樂安郡事=전라도 순천군수)를 지냈으며 참판을 추증 받았다.

 

증조 윤인(尹仁)은 평안 감사(平安監司=평안도 관찰사)를 지냈고 조부 공린(公麟)은 창평현령(昌平縣令)을 지냈다. 평양 박 선생 팽년(平陽朴先生彭年)의 따님과 혼인하여 대대로 전하여 내려온 음덕으로 자제를 팔형제나 두었다. 다 이름이 있다. 선생의 선고는 곤(鯤)이니 팔형제 중의 끝이다.

 

벼슬은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가마. 수레. 말 등을 맡아 보던 관아의 종5품벼슬)을 지냈다. 선비(先妣=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니 진사 규(葵)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무자(戊子=1528년) 9월 19일에 선생이 출생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위었으나 능히 스스로 힘써 공부하여 정묘년「丁卯年=1567년(명종 22)」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성균관을 떠나서 청주에 숨어서 살며 서당을 베풀어 그 고을 수재들을 가르치는 것을 일로 삼았다.

 

경서와 역사를 고수하고 격일제로 고사를 실시하여 정연히 법도가 있었다. 이에 있어서 원근 학자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모여 들어서 울연(蔚然=성한 모양)히 상당서숙(上黨書塾)의 옛 규모가 있었다. 그 재질에 따라서 각각 성취시킨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된다.

 

선생의 도량이 평탄하고 화이하며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친밀감을 주어서 한 번 교훈을 받게 되면 성심껏 사랑하고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성균관의 추천으로 영 숭 전 참봉(永崇殿參奉=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평양에 세운 전각의 관리벼슬)과 동몽교관(童蒙敎官=조선 시대, 어린이를 가르치기 위해 각 군현에 둔 벼슬)을 제수 받았다으나 다 나가지 않았다.

 

향년 48세로 하세하였으니 때는 만력(萬曆) 을해「乙亥=1575년(선조 8)」정월 22일이다.

청주 동쪽 수락동(水落洞) 자좌의 자리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진주강씨(晉州姜氏)니 응청(應淸)의 따님이다. 선생의 묘소 좌측에 합장하였다. 4남 2녀를 두었다.

 

장자 득윤(得胤)은 곧 서계선생(西溪先生)이니 군수(郡守)를 지냈다. 차자 광윤(光胤)은 교리(校理)를 지냈다. 셋째는 명윤(明胤)이고 넷째는 창윤(昌胤)이니 진사다. 따님은 각각 군수 홍순각(洪純慤)과 정영(鄭霗)에게 출가하였다.

 

큰 자제 소생 홍유(弘有)는 교관(敎官)을 지냈으며 홍복(弘復)은 서자(庶子)다. 둘째 자제 소생 홍경(弘經)은 진사고 셋째는 소생이 없다. 넷째자제 소생은 홍약(弘約)이다. 홍순각의 자제는 생원 이중(頤中). 참봉 이정(頤正). 진사 이덕(頤德)이다. 정방은 자제를 두지 못했다. 증손(曾孫). 현손(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하늘이 수(壽)를 더 주지 않아서 학업을 완수하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학자들이 한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맹자의 이른바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그중의 하나라고 하였으니 선생의 교육은 영재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서계와 같은 분을 자제로 두어 사람들로 하여금 다 선생이 서계의 어진 부형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였으니 선생의 사업은 성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고을의 인사들이 묘소 가까이에 사당을 세워서 제향을 지내고 기문에 「향선생(鄕先生=벼슬하지 않고 시골에서 학문과 도덕이 있는 사람)이 하세하면 서원에 제향지내는 법이니 선생은 곧 그러한 사람인가!」라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