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書. 간찰. 시(詩)

생곡 이인환 선생 간찰

야촌(1) 2020. 11. 2. 02:39

생곡 이인환(生谷 李寅煥)

 

경기도 관찰사와,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진천 출신 문신 이인환(李寅煥) 선생의 정축(1699)년 간찰 한 점으로 전체 배접이 되어있으며 가운데 부분 약간 손상 외 상태 양호하다.

<참고> 이인환(李寅煥.1633~169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문백(文伯), 호는 생곡(生谷).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이대건(李大建)이고 할아버지는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이며, 아버지는 지제교(知製敎)·이조판서를 지낸 이경휘(李慶徽)이고, 어머니는 심대복(沈大復)의 딸이다.

 

큰아버지 이경연(李慶衍)에게 입양되었다. 동생으로 매산(梅山) 이인혁(李寅爀)·이인욱(李璘煜)·이인찬(李寅燦)·이인희(李寅熹)·이인식(李寅烒)이 있다. 28세 때인 1660년(현종 1)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33세인 1665년(현종 6)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대교·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거쳐 사헌부지평·홍문관부수찬을 역임하였으며, 1675년(숙종 1) 홍문관부교리로 있으면서 암행어사로 나갔다. 당시 서인(西人)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덕원(德源)으로 유배하려 하자, 그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힐책을 받고 호서염문사·천안 군수·표양부사 등의 외직으로 밀려났다.

 

1679년(숙종 5)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호를 ‘생곡’이라 짓고 아우 이인혁과 한가로이 지냈다.

이듬해인 1680년(숙종 6) 남인(南人)에 대한 경신출척(庚申黜陟)[경신환국]이 단행된 이후 다시 기용되어 사간원사간·대사헌집의를 지냈다. 이듬해 응교·승지, 1682년(숙종 8) 형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승정원좌부승지를 거쳐 1684년(속종 10) 사간원대사간에 특진되었다.

 

1685년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신원(伸寃)을 극력 주장하여 관작이 복구되도록 하였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된 이후 다시 청송부사로 밀려나자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재기용되어 형조참의에 올랐다.

 

뒤이어 성균관대사성·경기도 관찰사·개성부유수를 지냈으며, 1697년(숙종 23) 승정원도승지를 역임하고 이조참판에 올랐다. 천성이 어질고 미더웠으며, 효우(孝友)에 돈독하고 몸가짐이 간결하고 옳았다. 또한 시비에 공정하고 당쟁에 조심하여 격심한 당파 싸움 속에서도 천수(天壽)를 누려 1699년(숙종 25)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크기> 48 ×3 2.1cm

 

 

 

↑조선국 가의대부 행 이조참판 생곡 이공 인환 지묘/ 증 정부인 완산이씨/ 증 정부인 청주한씨 부좌

(朝鮮國 嘉義大夫 行 吏曹參判 生谷 李公 寅煥 之墓/ 贈 貞夫人 完山李氏/ 贈 貞夫人 淸州韓氏 祔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