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옛 사람들의 초상화

근암 윤급 초상화(近菴 尹汲 肖像畵)

야촌(1) 2020. 10. 18. 19:20

 

■ 근암 윤급

   [생졸년] 1697년(숙종 23)~1770년(영조 46)

   [문 과] 영조(英祖) 13년(1737) 정사(丁巳) 중시(重試) 을과(乙科) 2[探花郞]위(3/8)

   [문 과] 영조(英祖) 1년(1725) 을사(乙巳) 정시2(庭試2) 을과(乙科) 1[亞元]위(2/20)

  [진 사] 영조(英祖) 1년(172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진사] 1등(一等) 1[壯元] 위(1/100)

 

●초상화(肖像畵)

  [지정번호] 보물 제1496호 윤급초상(尹汲肖像) 

  [크기] 152.3 x 82.6cm(화면), 220.2 x 105.2cm(전체)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용산동 6가 1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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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신인 근암 윤급「近菴 尹汲 1697년(숙종 23)-1770년(영조 46))」의 영정으로 사모(紗帽)와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고 표피를 깐 교의자(交椅子)에 반우향(半右向)으로 앉은 뒤 공수(拱手)하고 있는 전신상이다.

 

쌍학흉배(雙鶴胸背)와 서대(犀帶)를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윤급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 1품에 오른 영조 38년(1762)의 66세 무렵에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변상벽(卞相璧,1730추정~1775추정)이 윤급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화재화정(和齋畵幀)”의 기록이 인용되고 있어, 동 초상이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였던 변상벽이 그린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얼굴의 사마귀와 검버섯, 붉은 홍기(紅氣)까지 정교하게 묘사한 수작이며 족자표장도 18세기 후반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중요성을 더해준다. 윤급 초상 역시 당시의 시대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얼굴 묘사는 자연스럽게 입체감을 살렸으며 오른쪽 턱의 사마귀, 눈 주위의 여러 개의 점과 검버섯 등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시원한 콧날 묘사가 돋보인다. 대상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그려낸 것이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이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초상화에 사실성이 더욱 강조된다.

70세 때, 정조가 '초상화를 그리라'는 전교를 내리면서 제작됐던 강세황의 자화상. 얼굴의 살결과 수염의 사실적인 정밀묘사와 눈동자의 기운 생동하는 표현이 압권이다.‘터럭 한 올이라도 실물과 닮지 않으면 곧 다른 사람이 된다.

 

’단지, 외형묘사에 그치지 않고 대상의 인격, 기질, 품위를 드러내야한다는 ‘전신’론을 기본으로 삼는다. 

조선 후기 초상화의 또 다른 대표작인 도암 이재 선생과 그의 손자인 이채의 초상화에서도 사실성이 돋보인다.

 

정면을 응시하는 이재의 눈동자는 엄격하면서도 당당하며 옷주름 표현과 얼굴의 육리문 등은 사실성의 극치를 추구하면서 정신적인 기품 까지 드러내어 전신에 성공하고 있다.

 

조선후기 초상화의 정직한 사실성은 대상의 묘사, 전신이라는 제작원칙에 온전히 부합하여 인물자체를 드러내 보일 뿐만 아니라 초상화를 보는 이들에게는 귀중한 감동을 선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