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위한 제도개혁을 주장했던 박세당도 마찬가지로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 서계 박세당
박세당(1629~1703)은 현종 1년(1660)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반주자학적 입장을 견지해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았다. 1703년 주자학과 송시열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밝힌 사변록(思辨錄)을 출간하자마자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혔다. 유배형까지 받았지만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집행되지는 않았다. 그는 사대부들의 무위도식을 질타했고 실리적 외교정책, 백성을 위한 법률의 혁신, 정치·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
윤휴의 초상화는 대구의 후손가에서 전해오는 것이다. 초상화는 40·50대의 중장년 얼굴이며 2품의 운안흉배(雲雁胸背)와 삽금대(鈒金帶)를 착용하고 있다. 허목의 초상화(보물 150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정조가 그의 인물됨에 크게 감동해 은거당이 그린 82세의 허목 초상을 당대 최고 화사 이명기에게 재현케 한 작품이다. 채제공이 이런 내용을 화폭 상단에 적었다. 허목의 호는 미수(흰눈썹)다. 그림에 희고 두꺼운 눈썹이 잘 묘사돼 있다.
윤증의 초상화(충남역사문화연구원 보관)는 총 6점이 전해오며 보물 1495호로 일관 지정됐다. 윤증 초상의 제작 기록을 담은 필사본인 `영당기적`은 1711년 변량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린 이후 1744년 장경주, 1788년 이명기, 1885년 이한철이 모사할 때까지 4번의 제작 사례를 적었다. 박세당의 초상화는 숙종 어진의 제작에 참여한 바 있는 조세걸이 1690년경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60세가 넘은 노학자의 굳센 의지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이들 사문난적은 공통적으로 서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1607~1689)과 불화를 겪었다. 송시열과 그 추종 세력은 반대파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숙청했고 조선을 노론 일당의 폐쇄 국가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 인물 > 옛 사람들의 초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원군 이하응 초상화 (0) | 2020.10.18 |
---|---|
율곡 이이 초상화 (0) | 2020.10.18 |
윤증 초상화 (0) | 2020.10.17 |
윤휴 초상화 (0) | 2020.10.17 |
감고당 권희학 초상화 (0) | 2020.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