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완위각 사랑채 건물
李澤容(이택용)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이 의미가 있을까?
더욱이 종이책을 많이 소장한 장서가(藏書家)의 존재가 가치로울까?
이른바 ‘디지털 독서 시대’가 도래한 이래로 문닫는 서점이 늘어가고, 생존 경쟁에서 밀린 종이책 출판업계가 울상이다.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는 것을 낙으로 삼는 독서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무시할 수 없지만 나는 여전히 독서만큼은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고 싶다.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이 친근하고 익숙하다. 뾰족하게 깎은 정갈한 연필을 들고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더러는 찌지를 붙이기도 한다.
그리고 여전히 더 많은 책을 소장하고 싶은 욕구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우리시대에 책이, 그러한 책을 소장한 장서가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있지만, 옛적 글을 배운 선비들은 누구나 장서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독서인이고 문장가였기 때문이다. 북위(北魏) 때의 처사 이밀(李謐)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서적을 구입하였고, 꼼꼼하게 읽은 책만도 무려 4천여 권에 이르렀는데, 그는 “장부(丈夫)가 만 권의 서책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어찌 나라의 임금이 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애서가에게 입신출세보다 장서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 지 보여주는 사례는 이외에도 허다하다.
송대의 어느 재상은 장서를 위해 매달 봉급의 절반을 떼어 필사를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조선시대에 장서가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인물 중에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이 있다. 이하곤은 본관이 경주, 자는 재대(載大)이며, 호는 담헌(澹軒)이다. 그는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의 익재 이제현이 14대 선조가 되며, 벽오 이시발이 증조부가 된다. 부친인 이인엽(李寅燁)은 당대 대제학 이조판서를 역임한 바 있으며, 어머니는 인천부사를 지낸 조현기(趙顯期)의 따님이다. 『창성감의록』의 저자 조성기(趙聖期)는 외종조부가 된다. 이하곤의 부인 은진 송씨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송상기(宋相琦)의 따님이다. 친가와 외가 그리고 처가까지도 혁혁한 가문이었다.
이하곤은 소싯적 글을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골짜기 물이 터져 시내로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언변이 막히거나 거침이 없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당대 최고의 문사인 김창협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한 바 있다. 32세의 나이에 진사에 장원했으나 대과에 오르지 않고 10여 년을 보내다가 결국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인 진천군 초평면으로 내려와 학문과 서화에 힘썼다.
그는 이곳에 만 권의 서적을 구비하고 ‘완위각(宛委閣)’이라 이름한 서재를 열었다. 원교(圓喬) 이광사(李匡師)가 쓴 그 편액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완위각은 만권루(萬卷樓)라고도 하였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엮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만권루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보인다.
초평에 만권루가 있는데, 이는 담헌(澹軒) 이공 하곤(李公夏坤)이 지은 것이다. 고금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는데, 의약(醫藥), 복서(卜筮), 명필(名筆), 고화(古畫)에 이르기까지 수백 질(帙)이나 되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으며, 익재 선생의 고사를 쓴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하곤은 익재 이제현의 후손이다. 고려말엽 충선왕이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나라에 갔을 때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이라는 독서당을 세워 진귀한 서적을 수집하여 비치하고서 익재 이제현(李齊賢)을 불러 원나라의 저명한 학자들과 학술을 토론하고 연구하게 한 일이 있다. 이하곤의 만권루가 연경의 만권당을 본떠 만든 것이라는 것이다.
이하곤의 서적 수집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을 몹시 좋아하여 책 파는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주고서라도 그것을 꼭 샀다고 한다. 이렇게 사들인 책이 경서자집(經書子集)으로부터 패관소설, 의약, 복서(卜書), 불서, 노장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서화, 묵각(墨刻), 골동품도 상당히 많이 수장했다.
이하곤의 서적에 대한 남다른 애착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엄한 훈육과 몸에 밴 독서습관과 무관하지 않다. 어머니 임천 조씨는 여사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부덕과 상당한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다. 이하곤은 차차 성장하면서 어머니에게 수학하였다.
. 그런데 어머니는 과독(課讀; 읽은 책을 시험하는 것)을 몹시 심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면 가차 없이 꾸짖고 야단을 치며 가르쳤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엄한 훈육 아래 많은 책을 두루 섭렵한 담헌은 이후 하루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독서에 몰두했다.
그 결과 점차로 문사가 일취월장하여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두보의 시에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란 말이 나온다. 즉,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니, 당시 다섯 수레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책을 지칭했던 수 개념인 셈이다.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현재로선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지만 기껏해야 몇 백 권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을 구하기 어려웠던 그 옛날 다섯 수레의 책도 상당히 많았을 터인데 만 권의 서적을 구비하기란 더더욱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하곤은 어떻게 만 권의 서적을 구비할 수 있었을까? 그의 문집인 『두타초(頭陀草)』를 보면 ‘청주 설운곡(雪雲谷)에 그의 증조부인 벽오 이시발이 이곳에 집을 짓고 수천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하니,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상당량의 서적과 이하곤 당대에 수집한 서적이 기반이 되어 만권루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책을 어떤 방법으로 구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찾아볼 수 없지만, 책을 파는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주고서라도 샀다는 일화를 참고하면 대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시대 조정에 사자관(寫字官)이라는 전문 서수(書手)가 있었던 것만 보아도 필사의 방법을 통해 널리 서적이 유통되고 보관되었으니, 이하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하곤은 자신이 소장한 책을 완상하면서 진천의 생활을 꽤나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내 집에 무엇이 있나
서가에는 만 권의 서책 꽂혀 있네.
맹물 마시고 육경을 읊조리자니
이 맛 과연 어디에 비기리!
또 다음의 시에도 보인다.
집이 가난하여 가진 거라곤 다섯 수레의 책뿐
이밖에 도무지 남길 물건 하나 없네.
살아서나 죽어서나 서책을 못 떠나니
전생에는 틀림없이 좀벌레였나봐.
책을 좋아하는 자신의 전생이 좀벌레였다는 시구는 다소 희화적으로 그려졌지만 서치(書癡)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하곤의 만권루가 그저 개인의 독특한 취향으로 형성되어 이른바 ‘독락(獨樂)’에 그쳤다면 그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만권루는 책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료를 열람하고 토론하며 함께 즐기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교감의 공간이었다. 피차가 고금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교감할 수 있었던 지식인들의 아지트였다.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윤순(尹淳), 유명한 학자인 최창대(崔昌大), 심육(沈錥) 같은 이들도 만권루를 방문하여 책을 빌려보고 거기서 수창을 하였다. 윤순은 진천에 머물면서 사흘이 멀다하고 찾아와서 책을 꺼내 읽었다고 한다.
당대의 명사인 김창흡(金昌翕)도 다녀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만권루는 당대 지식인들의 지적 활동의 산실인 셈이었다. 고급문화 공간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벗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 중의 한 편이다.
완위각에 있는 만 권의 서책
그대 와서 풍송(諷誦)하니 삼여(三餘)에 족하리.
노부 역시 책을 즐기는 바보
이것으로 전생이 모두 굼벵이나 물고기였음을 알겠네.
벗이 진천의 완위각을 찾아와 함께 책을 읽고 시를 읊조렸나보다.
승구의 ‘삼여(三餘)’는 중국 위(魏)나라 동우(董遇)의 ‘삼여(三餘)의 설’에서 가져온 것이다. 즉, 밤은 낮의 여분(餘分)이고, 비 오는 날은 보통 날의 여분이고, 겨울이란 한 해의 여분이니, 이 여분의 시간에는 한가하여 한 마음으로 집중하여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표현 속에는 완위각이 어느 때고 독서를 즐기기에 족하다고 한 것이며, 어느 때고 개방되어 있는 공간임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이하곤은 자신을 일러 책을 즐기는 바보인 ‘탐서치(耽書癖)’라 하였다. 이덕무가 자신을 ‘간서치(看書痴)’라 한 것과 유사한 표현이다.
이하곤은 당대 명사들과 신분을 뛰어 넘어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이병연·신정하(申靖夏)·이광사(李匡師)·윤두서(尹斗緖)·정선(鄭敾)·조귀명(趙龜命)·홍중성(洪重聖) 등과 같은 사대부들과 교유하는 한편, 홍세태(洪世泰)·정래교(鄭來僑)·정민교(鄭敏僑)·이수장(李壽長) 등과 같은 여항인과도 교유하였다. 궁벽한 충북의 진천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와 예술가, 사대부와 여항인의 회합처가 되었다. 그곳에 만권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권루는 이하곤 당대뿐만 아니라 20세기 초까지도 정인표(鄭寅杓), 정인보(鄭寅普) 등과 같은 걸출한 근대의 학자들이 찾아와 공부한 곳이기도 하였다. 중국 송대에 좋은 책을 많이 소장한 송민구(宋敏求)라는 자가 있었다.
책 애호가들이 책을 쉽게 빌리기 위해서 그의 집 근처에 집을 세놓고 산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하여 전세값이 배나 비쌌다고 한다. 혹여 진천의 만권루에도 이러한 기현상이 있었을지 문헌을 찾아볼 일이다.
이하곤 사후 만권루의 만 권 서적은 어찌 되었을까? 『임하필기』에는 “백 년을 전하여 오다가 지금에 와서는 모두 산일(散逸)되고 남은 것이라곤 단지 숙종(肅宗) 이전의 명현들의 문집뿐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서적이 백년 만년 영구히 보존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기백년도 되지 않아 귀하디귀한 자료들이 모두 산일되었다고 하니 그저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다.
또 만권루는 어떠한가? 씻은 듯이 그 자취가 사라지고 주춧돌 몇 개만 산재해 있을 뿐이다. 시권(詩卷)을 소매에 넣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만권루를 드나들었을 조선의 지식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만 권의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을 장서가의 노고도, 책을 애호하고 소중히 여겼던 고급 문화의 산실이 사라진 것도 모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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