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망호정(望湖亭)

야촌(1) 2020. 5. 15. 21:05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498번지에는 유서 깊은 정자 망호정(이 자리하고 있다.

망호리는 마을 이름에서 처럼 예전엔 영산강이 훤희 바라다 보여 많은 지식인들이 일대를 들려 다녀갔다.

 

이곳은 광주방면에서 영암으로 오면 덕진 사거리가 나오고 좌측에는 영암 효병원이 서있다. 오른쪽으로 가는 길(월출로)은 영암읍의 우회도로로 1Km쯤 가면 망호 2교가 나오고 다리건너면 배날리 마을(망호리 2구)이다.이마을의 이름을 본래 망호정 또는 망호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호음정, 후정, 해정, 덕촌리를 병합하여 망호리라 하였다.


망호정은 문충공(文忠公) 익제 이제현(益齋 齊賢)의 후손 26世 호암공(湖巖公) 이반기(李磻琦)가 무과에 합격하고, 선거이(宣居怡), 전봉기(田鳳紀) 등과 함께 왜적을 베었으며 행주산성 싸움에서 순절한 그의 아들 월재(月齋) 이인걸(李仁傑,1551~1593)의 손자 망호정(望湖亭) 이주남(李柱南)이 영산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소로 망호정(望湖亭)을 건립하며 아주 입향했다.

 

 

마을 초입에 자리 잡은 망호정 입구에는 1850년(哲宗 1) 사마시 합격으로 성균관 진사를 지낸 취벽(醉碧) 이규호『1821(순조 21)~1890(순조 19)』가 이곳에 들릴 때, 말에서 오르고 내렸다는 하마석과 유허비가 나그네를 서리 맞은 채 맞이하고 있었다


정자는 이주남(李柱南)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1545년(인종 원년)에 창건하여마을 사람들의 자제들을 모아 뒷등 포전에서 습사하고 그곳을 사정치라 하고 강학하며 글과 무예를 연마하여 많은 급제들을 배출했던 곳으로 이후 1785년 중건하고 1916년에 재 중건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문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정면 5칸에 측면 2칸으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의 배향소로 꽤 큰 건물로 아주 양호하게 잘 관리되고 있다.

 

 

 

[강당현판자료]

 

망호정기에 대한 치운....현감 박명구(朴命球) 시(詩)

(밀양인 1731년생 /1753년 병과 3위 급제/군수.현감  역임)

 

川逈波瀾定(천형파란정)

물은멀리 파도가 잔잔하고

 

山當基勢雄(산당기세웅)

신의기세는 웅장하구나

 

總爲主人有(총위주인유)

모두 주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終日奇欄東(종일기란동)

종일토록 동쪽 난간에 지대어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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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현(愼文顯)의 망호정 감회
(거창신씨, 1744(영조 20) ~ 1815(순조 15). 통덕랑.영암거주)



主人益濟後(주인익재후) / 주인은 익제(이제현)의 후손이요

詞伯朗州翁(사백낭주옹) / 인은 낭주(영암)의 제일인지라

 

共醉名亭會(공취명정회) / 함께 유명한 정자의 회석에 취했으니

風流擅海東(풍류천회동) / 풍류로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빠지지 않았네.


그리고 망호정 뒷편에 취벽정(醉碧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그래서 그곳의 현액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 왔다. 정내에는 이주남(李柱南)이 쓴 망호정기, 영상 실기와 익재 선생 영각 강당기문과 익재 선생이 지은 익재 선생 자찬 시() 등이 있다.


경주이씨 이주남(李柱南)은 망호정기에서 이 마을을 두고 이르기를 "월출산의 한 자락이 구비 구비 돌아서 호수위에 솟아오르고 분노를 식히고 국을 열었으니 굽은 활에 반달 같은 곳이다.

 

남쪽으로는 옥홀기(玉笏記)를 하늘에 꽂은 듯하고 북쪽으로는 물구름이 병풍을 두른 듯하며 동쪽으로는 회화나무와 버드나무가 봄소식을 알리는 듯하며 서쪽으로는 오곡이 가을에 익어가니 우리자손들이 살아가며 먹고살기에도 알 맞는 곳이다.(月出一支節節起伏出湖上 而息怒開局如彎弓半月 南而玉笏?天 北而水雲繞? 東而槐柳報春 西而?稷登秋根 吾子姓卜合龜食")라고 하며 머물렀다.

 

또 이곳에서 이주만이 지어 전하는 시에서 정자를 지은 이유가 내포되어 있다.

 

經年營始就(경년영시취) / 여러 해 걸쳐 집을 지어서

卜此地靈雄(복차지령웅) / 이 곳 신령스러운 땅에 거주하네.

開門迎秀子(개문영수자) / 문을 열어 우수한 아이를 맞이하니

鄕學會南東(향학회남동) / 고을의 학동들 동남에서 모이네

 

또 다른 시에서 전하기를
옛날에 남겨둔 나의 초상은

 

양쪽 귀밑머리 푸르렀다오.
얼마나 많은 세월 흘러갔던가

우연히 또 만나니 정신이 새로워라.

 


我昔留形影

流靑靑兩?

春傳幾歲月 

邂逅尙精神

 

이 물건 다른 물건 아니라

전신이 곧바로 후신이라네.


아희들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고

이게 누구냐 자꾸 물어보누나.

 


此物非他物

前身定後身

兒孫渾不識

相問是何人

 



또 통덕랑(通德郞)과 정의현감을 지냈던 박명구(朴命球,1731(영조 7~?)는 감회를 이렇게 나타냈다.



물은 멀리 파도가 잔잔하고

산의 기세는 웅장하구나.


모두 주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종일토로 동쪽 난간에 기대어 논다.

 


川逈波瀾定

山當氣勢雄

總爲主人有

終日?欄東



전남 강진출신으로 조선말 사간원 사간을 지낸 신암(新庵) 조승하『 趙承夏,1816(순조 16) ~ 1889(고종 26)』가 어느날  망호정에 들려 아름다운 경지를 자랑하고 있다.



서호의 아름다움은 눈썹을 그린 듯

월악산의 기상은 어찌나 웅장한고


그 사이에 주인의 집이 있는데

아름다운 경지가 우리 나라 제일이네.

 


西湖眉若畵

月岳氣何雄

間有主人舍

煙霞?我東

 

[신암유고]

이동우(李東雨∼1919) 등이 이곳에 들려 시(靈巖望湖亭宗人(潤雨)來訪留宿)를 남겼다.

 

특히 이곳에서는 익재선생에 대해 주목을 끈다.망호정 뒤에는 고려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충렬왕 13) ~ 1367(공민왕)과 그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으로 권율의 휘하에서 왜군의 공세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그 후손 월재(月齋) 이인걸(李仁傑)을 모시는 영호사(靈糊祠)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들렸으니 익재선생이 지은시를 감상해보는 기회 좋은 듯하다.

두견화 피고, 두견새 우는데

자욱한 안개 짙고, 달은 서산으로 기운다.

 


말을 멈추고 시를 지었으나 문득

봉성 동쪽에서 바라보니 풀만 우거졌구나

 


杜鵑花發杜鵑啼

香霧空?月欲西

立馬得詩還忘却

鳳城東望草??



또 부상이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외로운 기러기 가을 소리 괴롭고야

 

으스름 닭소리 밤이 늦었네
등불 켜라 하니 게으른 종 얄밉고

 

말을 태우니 어린 자식 추워 떠네

그때 어린 자식을 거느리고 갔다.

 


斷雁秋聲苦

荒鷄夜色?

呼燈憎?

騎馬?兒寒



풀을 헤치며 가니 서리가 소매에 날리고

얼음이 뚫어지니 물이 안장에 뛰는구나


임의 은혜를 아직 못 다 갚았으니

있는 힘 다해 나갈 뿐, 감히 편안 찾으랴

 


草動霜飄袂

氷穿水?

主恩猶未報

努力敢求安 

<익재난고 제3권>

 

그는 이색, 정몽주의 스승으로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정도전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했던 여말선초의 문신·학자였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양촌(陽村) 권근 權近,1352(공민왕 1)~1409(태종 9)』이 쓴 배향옥정 교서(配享王庭 敎書)가 있다.

 

 

 

또 이곳 영호사(靈湖祠) 현판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의 친필로 써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어 정자를 무겁게하고 있다. 우암은 전라도 출신의 제자를 많이 거두었다. 그러나 이곳의 출입을 못해 담벼락에서 기웃거리며 느껴야하는 아쉬움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영호사 뒷길은 무성한 대나무 숲과  멋스러운 노송 군락의 산책길이 있어 추워도 상쾌함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망호리(望湖里) 1545년 이계남의 강학소였던 망호정(望湖亭) 취벽정(醉碧亭), 동강정(桐江亭), 남호정(南湖亭), 대월루(對月樓)가 자리하고 있었던 고도의 중심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월루(對月樓) 읍내에 있었으며, 해월루(海月樓) 이진(梨津) 남쪽에 있다.

 

제주도로 가는 자는 여기서 배를 타며, 소안도(所安島)에서 바람을 살린다. 영보정(永保亭)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회사정(會社亭) 서쪽으로 20리에 있다."고 전하다. 평지에 위치하며 회문천과 성호천이 나란히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마구정, 망호, 배나태, 호음정, 새태, 안산동, 해정, 후정마을 등이 있다. 마구정은 망호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영보역이 있었다. 망호의 지명은 증병조참판 이주남이 후진을 교육하던 곳이었던 망호정이 있는 것에서 연유하였다.

 

호음정마을은 배날리 마을이라고 하는데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다. 새태마을은 배날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새태라 하였다. 안산동은 안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산이라 하였다.

 

해정마을은 후정과 망호 사이에 있는 마을로 해창이 있었다. 참빗으로 유명하다. 고읍이라는 맛과 멋이 사라진 일대를 찬서리를 맞은 대숲을 걸으려니 많이 섭섭하다. 언제나 다시 이곳을 들릴지 그럴리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한다.



100여년 전 전북지역의 철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헌종 7)~1922)』가 일대에서 지은 서호십경(西湖十景) 9경 선암문학(仙巖聞鶴)의 시가 떠오른게 한다.



청산은 높직하여 푸름 속에 싸였는데

구름 그림자 떠돌며 학과 함께 한가롭구나.


변명에는 관심 없이 편벽된 뜻을 두어

아침마다 떠나보내고 고개머리에서 돌아서네.

 


靑山高入翠微間

雲影徘徊鶴共閑 

解說無心偏有意

朝朝長送嶺頭還

 


[참고문헌]

신암유고 - 1994 / 한국고전종합BD/ 문화.오인교

 

출처 > 오인교의 녹색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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