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경주최씨 계통도(慶州崔氏系統圖)

야촌(1) 2020. 5. 14. 11:46

■ 경주최씨 계통도(慶州崔氏系統圖)

 

경주 최 부잣집, 최계, 최제우, 최준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신라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로 하고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한다. 최치원은 12세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18세에 빈공과에 급제하여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承武郞侍御史內供奉)을 지냈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워 외직을 자청하여 태산(太山)[지금의 태인], 함양(咸陽), 부성(富城)[지금의 서산] 등지의 태수를 지냈다. 그 후 「시무10조(時務十條)」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자 난세를 비관하며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생을 마쳤다. 저서로 한시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이 있다.

 

경주최씨는 최치원 이후 26파로 분파되었으며 그중 관가정 청파(觀稼亭淸派), 사성공 예파(司成公汭派), 화숙공 현우파(和淑公玄祐派), 광정공 단파(匡靖公鄲派), 정랑공 호파(正郞公灝派), 충렬공 광위파(忠烈公光位派) 등 6개 파가 주축을 이룬다.

 

최치원·최언위(崔彦撝)와 함께 3최로 불린 최승우(崔承祐)는 890년(진성여왕 4) 당나라에 건너가 3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고, 최언위는 885년(헌강왕 11)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집사성시랑에 올랐으며 고려 건국 후 태자사부(太子師傅)·문한(文翰)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신라 말에 원보(元甫)를 지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 최승로(崔承老)는 당대의 명신이자 뛰어난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국가의 전반적인 정책을 정리한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를 상소하여 고려 왕조의 기초를 확립했다.

 

사성공파 최진립(崔震立)은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하고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西生浦)에서 왜군을 섬멸하였다. 권율(權慄)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 되었고, 병자호란 때 용인 험천에서 청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보국안민의 대도를 깨닫고 인내천을 교리로 하는 동학을 창시하였으나 1864년(고종 1)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동학 제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고,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사형되었다. 1907년(순종 1) 고종의 특지로 신원(伸寃)되었다.

화숙공파 최현우는 고려시대에 문하시중을 지냈고, 최한홍(崔漢洪)은 조선시대 중종반정에 참가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병마절도사를 지낸 뒤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1855년(철종 6) 문과에 급제하였고, 경복궁 중수 중지, 당백전 폐지 등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특사로 풀려나서도 단발령을 거부하여 투옥되기도 하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으나 끝까지 항거하다 순절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무공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광정공파 최단(崔鄲)은 무과에 급제한 뒤 이성계(李成桂) 휘하의 무장으로 위화도 회군에서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고, 한양윤과 판자혜부사를 지냈다. 정랑공파 최호(崔灝)는 1402년(태종 2)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재직할 때 왕명으로 『전한서(前漢書)』·『후한서(後漢書)』·『당서(唐書)』를 새로 발간했다,

 

그 후『예기정의(禮記正義)』 80권과 『모시정의(毛詩正義)』 40권을 간행하였다. 최호의 손자 최경지(崔敬止)는 1460년(세조 6)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경연관이 되었으며,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충렬공파 최광위(崔光位)는 고려시대에 상장군을 지냈고, 아들 최종포(崔宗浦)는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최광위의 손자 최일(崔逸)은 정승을 지냈고, 증손 최재연(崔再延)은 평리(平理)를 역임하였으며, 6세손 최안립(崔安立)은 벼슬이 낭장(郎將)에 이르렀다.

 

그 밖에 최량(崔亮)은 고려 성종 대에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태자태사에 추증되었고, 최량의 아들 최원신(崔元信)은 994년(성종 13) 문과에 급제하였고, 1012년(현종 13) 호부시랑으로서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최중복(崔仲福)은 조선 선조 대에 훈련원첨정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한산대첩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일제강점기 최봉환(崔鳳渙)과 최창식(崔昌植)은 항일·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최 부잣집 육훈]

 

①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② 만석 이상의 재산은 쌓지 마라

③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④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⑥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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