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전라도관찰사 이유원 영세물망비문 발견

야촌(1) 2020. 2. 11. 02:25

오문의 사서(史書)에는 기록이 없는

전라도관찰사 이유원 영세물망비문 발견

 

오늘날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신리 산2-9번지에는 마중물갤러리가 소재하는데 이곳은 1931년 10월 1일에 단선으로 개통한 전라선 기차길 신리 1터널이었으나 1999년에 바로 옆에 복선터널이 생기면서 폐 터널로 방치되었다가 2015년 11월 29일에 터널미술관으로 개관한 곳이다.

 

이곳 마중물 갤러리 매표소 바로 뒤편 바위에 좌측으로부터 관찰사 김경선(金景善)과 관찰사 원인손(元仁孫)과 판관 김광묵(判官 金光默 )과 오문출신 관찰사 이유원(李裕元) 선생의 영세물망비문(永世不忘碑文)이 세겨져 있다.

 

이 영세물망비문은 1931년 터널공사를 하면서 마애석(磨崖碑)은 많이 변형되었으나 다행히 글씨만은 아직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다행으로 여겨진다. 앞으로 관계당국이 문화유물로 잘 보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사진 출처 >닥밭골 심충성

 

[비문내용]

楮弊革罷(저폐혁파) / 닥나무의 폐단을 고쳐서 없애니
蔀黎咸蘇(부려함소) / 어둡던 민중들이 모두 되살아났네.
捐財補扻(연재보손) / 재물을 내어 손해 본 것을 채워주고
防禍立䂓(방화립규) / 죄짓는 것을 막고 법을 세웠다.

 

觀察使 李公 裕元 永世不忘(관찰사 이공 유원 영세불망)

관찰사 이공 유원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

 

咸豊 二年 二月 日

1852년 음력 2월에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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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世 이유원(李裕元)

 

'남양주 역사기행(12)'-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글. 윤종일(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귤산 이유원「1814(순조 14)∼1888(고종 25)」은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9대손으로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橘山). 묵농(墨農), 이조판서를 지낸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외숙(外叔-潘南人)인 박기수(朴綺壽, 1774~1849)를 사사하여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시호는 충문(忠文)이고 7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조선 말기의 학자요, 경세가(輕世家> 천하에 교훈을 주는 사람)로 헌종(1827~1849)ㆍ 철종(1831~1863)ㆍ고종(1852~1919) 등 3대에 걸쳐 국가의 중대사를 총괄하였다.

 

이유원의 관력은 매우 화려하다.

1837년(헌종 3) 정유(丁酉) 식년 진사시(式年進士試)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교(待敎) 등의 직책을 시작으로 하여 18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1849년(철종 원년) 의주부윤, 이조참의 1851년(철종 2) 전라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1855년(철종 6) 이조참판, 1858년(철종 9) 사헌부 대사헌, 규장각 직제학, 1859년(철종 10) 형조판서, 1860년(철종 11) 의정부 참찬, 한성판윤, 예조판서, 1861년 공조판서, 황해도 관찰사, 1862년(철종 13)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고종 대에 와서 그는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같은 해 9월 사의를 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1865년(고종 2)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좌천되었다가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임되어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 총재관(摠裁官)이 되고,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으로 조정에 복귀하였다. 이때 이유원은 고종으로부터 “경을 발탁하여 영의정에 임명한 것은 나의 간곡한 뜻이다.

 

수년간 교야(郊野)에서 한가로이 지냈지만, 정자(程子)가 말한 것처럼 몸은 비록 견묘(畎묘)에 있었으되 마음은 항상 조정에 있었다는 말은 경의 경우에 부합되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만큼 하루 발리 부임하여 나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기다린다”라는 유시를 받기도 하였다.

 

대원군이 집권하는 동안 이유원은 화도읍 가오곡(嘉梧谷) 향리에 은거하다가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영의정으로 발탁되어 경륜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1875년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인천(仁川)의 개항을 주장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공격을 받고 중추부영사로 물러앉아 1880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 김홍집과 함께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와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강화도조약이 민족사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접어두고라도 귤산 이유원이 개항에 반대한 대원군 및 그를 추종하는 사인들과는 달리 개항을 해야만 조선이 부흥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대원군 집권 이후 몇 년간의 공백을 제외한 관직기간 중 두 번이나 청나라에 다녀온 것은 이유원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1845년(헌종 11)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것과, 1875년(고종 12)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것이다.

 

두 번째 청에 다녀온 후 그는 그가 겪은 일들을 국정에 반영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건의한 것 중에서 숭령전(崇靈殿; 단군사당)과숭인전(崇仁殿; 기자를 모신 사당)의 참봉문제와 숭인전을 모시는 선우씨(기자의 후손으로 인정했다) 문제를 거론한 것이 주목된다.

 

1866년(고종 25) 9월 6일 사망하였다. 부음을 접한 고종은 그의 업적을 아래와 같이 밝혀 애통하며. 봉조하(奉朝賀) 이유원의 부음에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이 대신은 영민한 자질과 강직한 지조를 지녀 지난 날 매사를 의지하면서 기대를 걸고 일을 맡겨 공적을 쌓은 것이 적다고 할 수 없다.

 

나이는 많았지만 기력은 오히려 왕성했으며 물러나 휴식하겠다는 뜻을 비록 허락했지만, 조정의 일을 도와주려는 의지는 더욱더 절실했다. 국가를 위하여 어려운 일을 짊어지고 앞장서서 곤란한 일도 처리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위급한 때, 일을 당하면 적절한 조치를 적시에 취함에 있어서 쉽고 어려운 일을 가리지 않았다.

 

훌륭한 계책을 개진하여 한결같이 성의를 다해 보답했으므로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떨어질 수 없는 정분이 있었고, 그러므로 높은 표창도 주었는데, 이제 생애를 마감했으니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말을 하자니 슬픔이 복바쳐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다. 작고한 이 봉조하(李奉朝賀)의 상사에 동원부기(東園副器) 일부를 보내고 성복일(成服日)에 승지를 파견하여 치제케 하는데, 제문은 내가 친히 짓겠다.

 

시호(諡號)를 주는 문제는 봉상시(奉常寺)에 명령하여 시장의 제작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처리하라. 봉급은 향후 3년 동안 계속 지급하고 장례절차는 전례에 따라 거행하라. 고종은 친히 제문을 짓고, 어려운 일이 마다하지 않고 솔선하여 처단한 과단성과 일을 당할 때마다 지혜있게 일을 처리하는 탁월한 행정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수구파의 개항 저지를 막아내고 강화조약을 체결한 업적을 기렸다.

 

저서에 《귤산문고》 《가오교락(嘉梧藁略)》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을 남겼으며, 예서에 능하였다.

 

글. 윤종일(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남양주타임즈(200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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