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사(東萊府使)"에 대하여
□ 개요
동래부사(東萊府使)의 정식 명칭은 동래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이며 동래도호부, 즉 동래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정상의 통치를 책임지는 관원이다. 지방관원은 고을의 수령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이기 때문에 목민관(牧民官)이라 불리기도 하며, 관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통치업무를 매일 수행하였다.
동래도호부는 일반적인 지방의 한 고을 단위로서의 위치만이 아니라, 일본 대마도(對馬島)와 마주한 중요한 변방지역으로서 국방과 외교의 일선으로서의 위상을 지닌 고을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중요성이 감안되어 책임 관원도 보통 종3품 당하관이 임명되는 도호부사와 달리, 품계가 높은 정3품 당상관(堂上官)이 임명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원래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외관직(外官職) 경상도에 의하면 동래에는 종5품 현령(縣令)을 둔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에 현(縣)으로 강등된 동래를 부(府)로 승격시킨 후, 1600년(선조 33) 11월 문관인 이형욱(李馨郁)[1600년 11월~1601년 12월 재임]을 동래 부사로 차출하였다.
그 후 1602년 윤2월 홍윤장(洪胤張), 그해 8월 이계선(李繼先)이 무관으로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가, 1604년 1월 홍준(洪遵)이 임명되면서부터는 줄곧 문관이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의 사회 수습 책무와 대일업무에서 신중한 자세가 요구되는 시점에서 동래부사의 임명은 매우 중요한 인사였다.
임진왜란을 거쳐 조선후기에는 『대전회통(大典會通)』 이전 외관직 경상도에 따르면 동래가 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일반 도호부에는 종3품 도호부사 14명을 두게 되어 있었다. 동래부사의 임명과 부임은 기본적으로 지방 관원, 즉 외관(外官)의 임명절차의 관례에 따랐다. 먼저 국왕이 승정원에 비답(批答)[임명 허가]을 내리면 해당관원은 떠나기에 앞서 조정에 들어가 국왕에게 사조(辭朝)[하직 인사]를 한다.
그리하여 수행원을 거느리고 한양에서 임지로 출발한다. 부사가 동래부로 내려오는 동안 원거리에 있는 밀양이나 근거리의 양산에 서리(胥吏)가 미리 가서 부사를 영접하고, 동래부 경계지점에 호장·이방·수형리 등 삼공형(三公兄)이 나와 대기하며 부사를 맞이한다.
동래부 읍치 내에서는 고을 내 최고 군사지휘관인 중군(中軍) 이하 모든 장관·군교와 서리·노비 등이 도열하여 풍악을 울리며 환영한다. 부사는 이들 속료(屬僚)를 거느리고 객사(客舍)에 가서 망궐례(望闕禮)[국왕이 있는 궁궐을 향한 배례]를 행하고, 이어 동헌(東軒)에 와서 업무를 시작한다.
부사가 일상적인 공무를 보는 건물은 동헌의 충신당(忠信堂)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동래부 동헌 충신당은 부사 이정신(李正臣)[1711년 4월~1712년 11월 재임]이 설립한 것이다. 그리고 한양에서 동래부사직을 임명받으면 당사자 주위의 절친한 사람들, 즉 관료나 집안 친척들이 임지로 떠나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송별시를 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주요내용은 한양에서 볼 때, 변방 해안고을에 속한 동래 땅에 가는 당사자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당사자의 품성과 능력이 고을을 능히 잘 다스릴 것이며, 오만한 일본인들을 습복시킬 수 있고, 국왕이 충성스러운 신하를 임명하며 친절하게 포창하는 마음을 찬사하거나 한양~동래로 가는 노정에서 식사와 건강 등을 잘 챙기도록 격려하는 내용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동래부사 이덕성(李德成)[1688년 1월~1689년 4월 재임]이 한양에서 임지로 가게 되었을 때, 그의 친우 47명과 조카 4명에게 받은 송별시를 모은 서첩 『봉래별장첩(蓬萊別章帖)』이 있다.
모두 건(乾)·곤(坤) 2첩으로 되어 있으며, 건 첩에는 남용익·유상운 등 27명의 송별시가 실려 있고, 곤 첩에는 이진안·송상기 및 조카 송휘오· 종질 이진망 등 모두 24명의 송별시가 실려 있다.
동래부사는 국왕이 정3품 당상관을 임명하였고, 임기는 900일(2년 6개월)이었다. 그런데 초량 왜관 시기[1679년 이서우 부사~1872년 정현덕 부사]에 모두 148명의 동래 부사가 근무하였다. 개항되기 직전인 1872년은 일본정부가 초량왜관을 강제로 점령하던 때였다.
두모포 왜관 시기[1600년 이형욱 부사~1676년 이복 부사]부터 1872년까지 272년간 모두 203명의 동래부사가 재임하였는데, 평균 임기가 12.6개월에 불과하였다.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이임한 부사는 불과 12명[8.1%]뿐이었으며,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이임한 부사가 56명[37.8%]이나 되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부사는 임기도중에 교체되었을 정도로 부사의 직무가 힘들었다. 교체의 원인은 여러 유형이 있었다.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치는 경우 외에 통치 중에 업무의 과실이나 범죄로 파직당하는 경우, 질병이나 사망으로 그만두는 경우, 기록상 원인이 불분명한 경우 등이다.
그중에서 업무과실이나 범죄에 연루되어 징계를 받는 사례가 많았다. 징계사유는 일반적인 범죄, 부사의 직무 태만 내지 직무상 과실, 대일 외교상 교섭을 잘못하였거나 일본 정세 보고와 관련하여 파직된 경우 등이었다. 여기에는 외교와 무역 및 국방의 측면에서 동래부가 가지는 특수성과 관련이 있었다.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 46.0cm(폭) x 85.0cm(길이)/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동래부사의 주요 업무
동래부사가 수행하는 일상의 업무는 크게 동래부 관내의 대민통치와 왜관과 관련된 대외업무로 나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동래부가 지니는 변방의 지역적 특성때문에 군사시설의 수축과 군정관리, 왜관통제, 왜사접대 등의 막중한 업무가 동래부사에게 주어져 있었다.
대민통치에서는 모든수령이 그렇듯이 법전에 명시된 수령칠사(守令七事)는 가장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7가지 임무였다. 그 내용은 농업과 양잠의 발전[盛農桑], 호구의 증대[增戶口], 부역의 균등[均賦役], 군정 바로잡기[修軍政], 유학 교육의 진흥[興學校], 민원의 간편화[簡詞訟], 간사한 향리 단속[息奸猾] 등이다.
▲『동래부사 접외사도』 세부, 가마를 타고 가는 이가 동래부사고 그 뒤에 말을 탄 인물이 부산 첨사이다.
1. 대민 업무
농업은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생업으로서 백성의 근본이었으며, 이를 흥하게 하는 것이 고을 수령의 으뜸가는 책무였다. 1764년(영조 40) 동래부에서는 농업에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농우(農牛)[소]가 돌림병으로 많이 폐사하는 바람에 농사에 큰 차질이 생겼다.
당시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1764년 8월~1766년 11월 재임]는 관아의 비용을 마련해 암소 70마리를 사들이고, 이를 소가 없는 면리에 나누어 주어 돌아가며 경작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관아의 소에 대한 사육 책임과 관리 지침이 포함된 절목(節目)[기준 법령]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듬해에 펴낸 『동면하단 관우 절목(東面下端官牛節目)』이라는 법령이었다. 관아에서 백성들에게 소를 나누어 경작하여 농사짓게 하고, 송아지를 번식하게 하여 영구히 면리마다 고루 퍼뜨리게 한 것이었다.
또 농사에는 수리시설이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수령이 긴밀하게 챙겨야 할 부분이었다. 동래 부사 이경일(李敬一)[1787년 2월~1788년 9월 재임]은 낙동강하류에 접해 있는 사면(沙面)에 제방을 쌓아 농사피해를 줄이고, 개간사업을 하여 땅 약1,000여 마지기를 새롭게 확보할 수 있었다.
고을 백성들이 그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이경일 축제혜민비[府使李敬一築堤惠民碑銘]이다.
또 고을의 호구는 가장 중요한 농업 노동력이면서 부역과 군역 부과의 기본 단위였다. 따라서 수령은 호구를 증대시키는 것이 중대한 임무였으며, 동시에 정기적으로 호구를 파악하게 되어 있었다.
동래부사는 아전들로 하여금 고을의 면리 단위로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를 취합하여 호적대장(戶籍大帳)을 작성하게 하였다. 1789년 작성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동래부는 8개면에 104개리로 조사되어 있고, 인구는 2만 8,864명이었다.
이어서 1832년(순조 32) 간행된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 방리조(坊里條)에 의하면 읍내면, 동면, 남촌면, 서면, 북면, 동평면, 부산면, 사상면, 사하면 등 9개면에 호현리, 명장리 등 114개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인구는 3만 2,158명으로 약간 증가된 통계로 나타났다. 1896년(고종 33) 9월 반포된 대한제국 말 「호구 조사 규칙(戶口調査規則)」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조선시대의 호적 운영 원칙에 따라 호구를 관리하였다.
가호별로 호주와 배우자 및 각각의 4조(祖)의 나이와 직역 및 노비의 동태 등을 상세히 조사하고, 이를 5가(家) 단위마다 1통(統)으로 하여 이(里)·면(面) 단위로 상향하여 동래부의 호적 대장이 작성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호적은 식년(式年)에 맞춰 3년에 한 번씩 개수하였는데, 동래부에서는 이 과정에 서사(書寫)[문서 작성자]를 맡은 사람들이 호구단자를 제출하는 각 가호로부터 분단채(分單債)[단자 수수료]로 5푼에서 2전까지 받는가 하면, 동네마다 다니면서 식사와 돈을 요구하는 등 폐단이 많았다.
그리하여 동래부사 박기수(朴綺壽)[1817년 9월~1820년 2월 재임]는 호적과 관계되어 부당하게 요구하는 적 비전(籍費錢)을 폐지하여 백성의 고질을 제거하고자 개혁조치를 취하였다. 이것이 바로 1819년 윤4월에 반포한 「동하면 적폐 이정 절목책(東下面籍弊釐正節目冊)」이다.
지금 아쉽게도 조선후기의 동래부 호적대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다행하게도 대한제국 말 호적대장의 일부는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1908년(순종 2)에 작성된 『경상남도 동래부 동하면 장적(慶尙南道東萊府東下面帳籍)』이 그것이다.
이 같은 대민 통치 항목 중에서 부세(賦稅)와 군역(軍役)의 운영, 환곡(還穀)의 운영, 지역 사회내에서의 제반 문제로 제기되는 등장(等狀)·민장(民狀)의 처리, 옥사(獄事) 등은 관내 백성들의 생활 내지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들로 가장 일상적인 업무였다.
18~19세기에는 지방고을의 재정부담이 증대하는 추세였다. 따라서 동래지방에서도 늘어나는 재정지출을 충당하기 위해서 토지로부터 징수하는 결세(結稅)를 늘이거나 고리대(高利貸) 방식으로 환곡 제 운영을 하였다.
그 운영방식으로 재임 중에 동래부사는 식리 전(殖利錢)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군뇌청(軍牢廳)의 군뇌와 사령청(使令廳)의 사령들을 위한 급료로 지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향청(鄕廳)·무청(武廳)·질청(作廳)으로 구성되는 ‘삼청의 수족’이라 불리는 관부의 하급실무자들이었다.
동래부사는 이들의 급료를 조달할 방도를 마련하도록 삼청에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삼청 실무자들은 중앙관부나 왕실에 세금을 바치는 둔토(屯土)를 매각하여 그 수입으로 전채(錢債)를 놓아서 이익을 불리려고 노력하였다.
둔토의 매각대금은 4,928냥이나 되었으며, 그중에서 957냥을 잘라서 먼저 매달 삭료로 나누어주고, 그 나머지 3,971냥을 각소에 나누어서 원전과 이윤을 합쳐서 지급하려 하였다. 그런데 애초에는 군뇌와 사령들의 임금을 쌀로 환산하여 지급하려 하였으나 그 병폐가 생길 우려가 높아서 돈으로 지급하려 한 것이었다.
바로 이 방책은 김석(金鉐)[1859년 1월~1859년 6월 재임]이 동래부사로 재임할 때 재정 보충 책으로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그의 정무일기인 『내부일기(萊府日記)』에 보인다. 이때 동래부사는 이상과 같은 조치를 취한 정책 집행과정과 관련절목을 상급관청에 보고하였다.
이런 보고문을 품목(稟目)이라 하였다. 물론 이 같은 조치는 그 이전에도 비슷한 성격의 대책을 도색한 동래부사들이 있었다. 더구나 동래의 지역적 특성으로 동래부사는 여타 고을과 달리 또는 그 이상으로 이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즉 관방 시설의 수축, 왜관의 통제, 왜사의 접대 등으로 이것들이 가장 막중한 업무였다.
2. 성곽 축성 및 관리 업무
성곽은 크게 나누어 읍성과 산성으로 구분된다. 읍성은 부·목·군·현 등 고을중심지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은 것이고, 산성은 도읍이나 도시 등 해당지역을 외곽에서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시대는 마치 성곽국가라고 할 정도로 도읍은 물론 각 군현과 주요 산지에도 성곽을 축조하였다. 먼저 동래읍성은 동래부사가 고을을 통치하고 왕명을 받드는 동헌과 객사 등 핵심 관청과 소속기관들이 있는 중심 읍치를 둘러싼 성곽이다.
고을백성은 읍성 안과 밖에 각각 거주하였으며, 동래향교나 사직단 등 성 밖에도 관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있었다. 이와 같이 통치의 권위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읍성을 늘 관리하며 때로는 보수와 증축을 하는 것이 동래부사의 중요한 임무였다.
그래서 부사는 군사장교들과 함께 자주성곽의 시설을 점검하거나 순시하기도 하고, 경상도 관찰사나 조정에 성곽문제에 대하여 견해를 상계하기도 하였다. 특히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1730년 8월~1733년 1월 재임]은 동래가 나라의 중요한 관문임을 인식하여 임진왜란 때 허물어져 부분 보수된 동래읍성을 증축할 것을 계획하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1731년(영조 7) 정월에 축성의 재가를 얻어 공사를 시작하여 200여 일만에 완공하였다. 읍성수축을 마친 뒤에 수성청(守城廳)과 수성창(守城倉)을 설치해 군대와 곡식비축에 만전을 기하였다. 완공한 결과 대략 읍성의 둘레가 3.8㎞, 높이 4m 내외의 우람한 성곽이 되었다.
읍성수축에 동원된 일꾼 5만2,000명, 쌀4,500섬, 베1,550필, 돈1만 3,000냥이 쓰였는데 모두 정언섭 부사가 낸 것으로 백성에게 걷지도 국고를 축내지도 않고 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컸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증축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내력을 상세히 적어 1735년(영조 11) 동래부사 최명상(崔命相)[1734년 6월~1736년 4월 재임]이 내주 축성비[萊州築城碑記]라는 커다한 비석을 건립하였다.
비석의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내역과 결과 등의 사실을 기록하고, 뒷면에는 축성에 참여한 사람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있어서 동래읍성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축성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그로부터 30년 지나서 1765년(영조 41) 가을에 동래부사 강필리가 비석을 농주 산에서 이전해왔고, 이어 1820년(순조 20) 가을에 동래부사 이화(李墷)[1820년 3월~1821년 2월 재임]가 비석을 다시 이전해 세웠다. 여기에도 도감(都監) 이하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공사 때, 옛 성의 남문 터에서 발견된 유해들을 거두어 동시에 출토된 부러진 창이나 화살촉과 함께 안장하면서, 정언섭 부사는 직접 그 내력을 써 놓았는데 바로 임진 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다. 현재 무덤과 비석은 온천장 금강 공원 안에 있다.
19세기 후반에 와서 동래부사는 다시 읍성을 보수하며 수축하였다. 『내부 일기』에 의하면, 김석부사는 3월 초10일 당일 조반을 먹고 성 쌓기 노역하는 곳에 가서 일꾼들에게 술과 음식을 먹인 뒤에 관아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 3월 28일 동래부사가 적취정(積翠亭)에서부터 성을 순시한 뒤에 해질 무렵 관아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어 4월 초7일에는 정원루(靖遠樓)에 가서 모대전(牟代錢)[보리철의 조세가 모조(牟租)이고, 그것을 금전으로 대신 납부하는 돈] 1,200냥을 동원된 역부 각 1명마다 1냥 2전씩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역사(役事)를 마치고 나서 5월 초10일에 동래부사는 각 부분에 사용된 지출기록을 정리하였다. 동래부의 성을 수축한 구역을 7개소로 구분하여 중군 이하 천총·파총·별장·초관 등 군관들이 도패장(都牌將)·1패장·2패장으로 나누어 맡았다.
구역은 남문~북문[1소], 서문~암문[2소], 암문~북문[3소], 북문~인생문[4소], 인생문~곡성[5소], 곡성~동문[6소], 동문~남문[7소]이었다. 그 내역은 짐꾼들의 노임과 회(灰)·기와·개석 등 각종 잡비의 지출 기록이었다. 이렇게 성을 수축 내지 보수하는 일이 중요하다 보니 동래부사는 고을백성을 동원하는 역사를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에는 10년 지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1867년 6월~1874년 1월 재임]이 다시 크게 수축하였고, 마지막으로는 1892년(고종 29) 동래부사 이호성(李鎬性)[1891년 7월~1893년 6월 재임]이 읍성의 체성(體城)[성벽의 몸체]과 여첩(女堞)[성벽의 윗부분~머리 부분] 등을 복구하는 사업을 수행하였다.
특히 이호성 부사는 금정산성의 동헌, 내아, 지방고, 동문루, 군기고 등도 함께 중건하였다.
동래지역에서 국방을 튼튼히 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고 또 고을 백성을 보호하여 재난에 대비하는 책무는 부사에게 매우중요한 일이었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최초로 침략을 당한 곳이기 때문에 동래의 요새가 되는 금정산성의 중요성은 항상 강조되어 왔다. 금정산성은 1703년(숙종 29) 금정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대규모 산성이다. 하지만 쌓은 직후 성곽이 지나치게 커서 방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시적으로 폐기되었다.
그 후 100여 년 지나 산성 방어론이 대두하면서 1807년(순조 7)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1806년 2월~1809년 2월 재임]이 주도하여 재건하였다. 금정산성은 유사시에 초기 전투를 장기전으로 이끌 수 있는 전략적 거점지라는 오한원 부사의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경상감영으로부터 별비 전 2,000냥을 지급받아 축성 비용과 관리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당시는 농촌에서 유리되어 토지도 없고 경작할 땅도 없는 유민층이 산성 안에 들어와 거주할 곳을 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둔전을 설치하고 여기서 경작할 사람을 모집하여 들어와 살게 하였다.
이때 경상감영에서 산성전(山城錢)을 지급하여 둔전을 설치하고 경작하는 데 모집한 농민층을 산성을 수호하는 병력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오한원 부사의 임기는 특별히 1년간 연장되어서 기본적인 공역사업을 마칠 수 있었다.
19세기 초 당시에 이미 100여 호의 주민이 산성마을로 이주해 와서 살았는데, 둔전이 확장되면서 이들이 거주하는 산성 마을의 규모도 확대되어 나갔다. 그런데 오한원이 산성 쌓기를 건의하기 직전에 마침 왜관에서 왜인이 도망쳐 나오는 난출(闌出)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즉시 수습되었지만 왜관의 왜인들 동향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금정산성의 보수와 재건사업이 신속하게 결정되어 진행될 수 있었다. 축성 사업이 완료되면 성곽의 관리를 위해 절목을 새로이 제정하여 지켜 나가도록 하였다.
오한원 부사는 역관 문제·군정문제·금정산성 수비문제 등과 관련된 변통책을 제시한 상소 초(上疏草)를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동래향청 고왕록(東萊鄕廳考往錄)』[1605~1903년까지의 동래에 관한 주요 문서들이 초록되어 있음]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부사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오한원 청덕선정비[府使吳公翰源淸德善政碑]로 금강 공원의 임진전망유해지총 경내에 있다. 이곳을 비롯하여 동래부 동헌과 동래향교 일원 및 부산광역시립박물관 경내에 조선후기 동래부사의 선정비, 송덕비, 불망비 등 비석들이 현재 남아 있다.
3. 하천 준설 임무
동래부 관내에 흐르는 하천은 농사짓는 데, 수리용으로 끌어 쓰기도하며, 주민들의 생활용으로도 쓰였다. 더구나 하천은 수해가 일어나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큰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준설을 하여 하천을 관리해야 하였다.
하천 준설에는 지역백성들을 면단위로 나누어 부역을 동원하였다. 『내부일기』에 의하면 김석 부사는 1859년 2월 28일 하천을 준설하는 현장에 가서 부역하는 주민들 각 1명에게 1전3푼씩으로 음식을 베풀어 먹게 한 뒤에 관아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같은 준천사업과 함께 도로나 교량의 보수 수축도 부사가 챙겨야 할 중요한 민정업무였다. 이는 사람과 마차가 반드시 왕래해야 하는 길, 즉 기반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역대 동래부사들이 도로 정비와 하천준설을 할 때 대개 각 동의 일꾼을 동원하여 해결해 왔다.
1763년(영조 39)에는 중앙에서 대규모 통신사 관료와 일행들이 방문하면서 급하게 각 동의 일꾼에게 맡기게 됨에 따라 많은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더구나 도로보수에 각 해당 지역전답의 경작자가 춘추(春秋)로 보수하는 규정이 있는데, 유독 동래부에서만은 일꾼을 동원하여 보수함으로써 더욱 안쓰러운 지경이 되었다.
이에 동래부사 유강(柳焵)[1791년 3월~1792년 6월 재임]은 종래에 도로와 교량의 보수를 위하여 별도의 일꾼을 동원하는 민폐를 폐지하여 도로보수와 하천준설은 도로변이나 하천변의 전답 경작자가 책임지고, 읍내 또는 산이나 고개의 도로 보수는 인근 마을에서 도로 감관(道路監官)[도로 보수 감독자]을 정하여 시행토록 결정하는 문서를 정식화하였다.
이것이 바로 1792년(정조 16) 제정한 『동하 도로 교량 준천 수치 절목(東下道路橋梁濬川修治節目)』[임자 유월 일(壬子六月日)]이다. 동래부 관내의 주요 도로 체계는 읍성의 동문 밖으로 광제교를 건너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으로 통하는 대로가 있었고, 남문 밖으로 세병교를 건너 부산진 첨절제사영(釜山鎭僉節制使營)으로 향하는 대로 및 영선 고개를 넘어 초량 왜관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서문 앞에는 한양으로 향하는 대로가 뻗어 소정역(蘇亭驛)[동래구 온천동]과 십휴정 기찰(十休亭譏察)[검문소, 금정구 부곡동]을 거쳐 양산과 울산 방향으로 길이 나뉘어 있었으며, 기비현(其比峴)[만덕 고개]을 넘어 구법곡 기찰(仇法谷譏察)[검문소, 북구 덕천동]을 경유하여 양산으로 통하는 대로가 있었다.
중요 하천은 동래읍성을 감싸는 범어천(梵魚川)[온천천]과 사천(絲川)을 비롯하여 부산진의 좌자천(佐子川) 등이 있었다.
4. 외교 업무
동래부사에게는 대외업무가 여타 고을과 달리 매우 중요한 책무였다. 대민통치와 같이 일상적인 행정업무보다도 오히려 외교적 업무의 경우, 즉 대일 외교 측면에서 왜관을 잘못 통제하였거나 또는 일본[대마도·왜관]에 대한 정보 보고가 제대로 없거나 오류가 되었을 때 교체의 사유가 되는 경우가 23.6%나 될 정도로 많은 편이었다.
동래의 외교업무는 제반 대일관계상 업무였으며, 그것은 바로 왜관과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간의 민감한 외교관계를 감안할 때, 왜관의 일상적 업무나 일본 사신이 왕래할 때의 접대와 처리 등의 문제는 중요한 외교 업무였다.
왜관과 관련된 일상적인 업무는 경상감사나 조정의 결정을 따르지 않아도 되므로 동래부사의 판단과 능력에 따라 처리하였다. 동래부는 왜관이 설치되어 있어서 대 왜 교섭·전달의 창구구실을 하였다.
대차 왜(大差倭)·차왜 등 대마사절단을 접대하는 일, 잠상(潛商)[관청의 허가 없이 몰래 장사하는 자]이나 주민들의 왜관출입을 통제하는 일 등이 동래부사가 해야 할 책무였다. 동래부사가 여러 관속을 거느리고 동래읍성을 출발하여 초량객사까지 가서 대마사절단을 접대하는 과정은 『동래부사 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동래읍성, 관원의 행렬, 왜사 숙배식(倭使肅拜式), 연향의식을 치르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흑단령을 입은 동래부사와 부산 첨사 및 훈도와 별차 등 관속들이 초량객사 안에서 차왜들의 숙배를 받고, 그들이 진상하는 물건을 간품[물품 검사]하는 장면 등도 볼 수 있다. 초량 객사를 비롯하여 연향대청(宴享大廳)·성신당(誠信堂)의 건물배경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지방의 수령[부사, 목사, 군수, 현령·현감]이 조정에 업무를 보고할 때는 항상 감사[관찰사]를 경유하여 상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원래 동래도 중층적인 보고 체계에 의해 동래부사~경상감사~중앙각처~국왕으로 이어지는 일원화된 행정체계에 따라 상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동래의 경우 왜관과의 소통부분은 한양에서 파견된 왜학역관이, 왜관에 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와 부산연안에서의 업무통솔은 부산 첨사가, 차사(差使) 같은 일본 사절이 왔을 때에는 접위관(接慰官)이, 무역은 호조에서 파견된 수세관(收稅官)이 주관하였다.
그러면 동래부사는 각직임자에게 올라온 일본의 정세를 수합하여 보고하였다.
하지만 동래에서는 일본인과 관련된 중요한 동향이나 정보사항이면 사태의 신속성과 중요성을 감안하여 동래부사가 경상감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국왕에게 장계(狀啓)로 보고하는 이른바 직계(直啓)의 권한이 주어졌다.
이 조치는 중국 청나라와의 육로 교통로 상 변방의 수령이라 할 수 있는 의주부윤(義州府尹)의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의주와 동래에서의 이 같은 조치는 여타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변방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가 지니는 특성이었다.
그리하여 동래에서의 직계제도는 1610년 9월 조존성(趙存性)[1610년 9월~1611년 11월 재임] 부사 때부터 시행되었다. 이는 분명히 임진왜란을 겪은 직후에 변방에 대한 위기의식과 일본이 다시 침략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동래 부사는 한양에 직계한 후에 반드시 경상 감사에게 별도로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동래부사는 일상적으로 부산 첨사와 함께 왜관에서 일어나는 일과 일본인의 동정을 매월 정기적으로 경상감사에게 보고하였다. 주로 매월 일본선박의 왕래에 대한 기록과 왜관내의 동정 및 왜관의 건물상태나 수리 관련 내용들이었다.
일본사절단이 대마도로부터 부산포에 오면 주로 대구감영에서 경상감사나 한양에서 접위관이 내려와서 대마도 사절을 접대하게 되어 있었다. 사안이 조금 더 중하면 선위사(宣慰使)가 직접 내려와서 사절과 교섭하고 나서, 그들이 가져온 예단 선물을 선위사나 경상감사가 직접 검사하였다.
보통 일상적으로 왜관의 우두머리인 관수왜(館守倭)에 대한 접대는 동래부사와 부산 첨사가 함께 주관하여 베풀었고, 대차 왜에 대한 접대는 한양에서 내려온 접위관과 함께 주관하였다.
그렇지만 관수왜는 대마번의 지시를 받아서 왜관에서 수동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존재로서, 대일 외교차원에서 동래부사와 동격이 될 수 없으므로 결코 외교상대는 아니었으며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동래 부사와 동격의 외교 상대였다.
동래부에서는 이처럼 대일외교나 무역의 통로인 왜관의 존재로 동래부사의 위상이 한층 높은 편이었다. 원래 문관 인사권은 이조에서 추천하였지만, 1642년(인조 20)부터 동래부사는 이조가 아니라 비변사(備邊司)에서 천거하기 시작하면서 그 과정이 강화되었고 부사의 위격이 향상되었다.
아울러 동래부사의 자질 내지 자격요건으로서 변방 외직의 경험이나 일본에 대한 정보인식이 높은 인물이 우선적으로 평가되었다. 비변사에서 추천하는 문관출신 지방관은 수원 부사, 강화 유수, 의주 부윤, 광주 부윤, 평안감사, 경상감사 등이었다. 이들 지역은 한양을 둘러싼 외곽 요충지, 중국·일본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국경지역의 지방관이었다.
「동래부사접 왜사도」왜사숙배식(倭使肅拜式). 일본 사신이 조선임금의 전패에 예를 올리는 숙배장면이다. | 「동래부사접왜사도」 연향(宴饗). 일본사신을 위해 베푼 잔치의 모습. |
□ 송상현 충절 詩
송상현公은 1591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동래부사가 되었습니다. 왜침의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不戰則假道)” 하자 이 때 부사인 그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그 뒤 적군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 당하자 조복(朝服)을 덮어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다. 왜장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뒤에 이조판서·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충렬사·개성숭절사(崇節祠)·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고부 정충사(旌忠祠)·청원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임란 개전(開戰)초기 선조임금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군, 관료들이 제 한 몸 살려고 도망가기 급급했던 부끄러운 모습들을 생각할 때, 비겁한 투항이나 도주보다는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미련 없이 던지고 많은 부하, 군민들과 운명을 함께 했던 동래부사 송상현의 의연한 모습은 우리역사의 자부심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송상현 선생이 분전 끝에 동래성 함락을 직감하고 한양에 계신 부모님께 올리기 위해 부채에 쓴 시 한 수입니다.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
孤城月暈 列鎭孤枕(고성월운 열진고침)
외로운 城에는 달무리 지고 각 진영은 단잠에 빠져있네.
君臣義重 父子恩輕(군신의중 부자은경)
君臣의 義는 무겁고 父子간 은혜는 가볍다.
출처 :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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