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장. 시장.

석촌 이달의 행장(石村李達意行狀)

야촌(1) 2019. 8. 13. 01:34

  행삼척도호부사이공행장

(行三陟都護府使李公行狀)

 

이달의「李達意 1615(광해군 7) ~ 1705(숙종 31)」

 

권상일(權相一) 찬(撰)

 

부군의 휘는 達意이고, 자는 以正이고, 경주이씨 이다. 신라의 佐命功臣 謁平의 후손이다.

고려 때 世基檢校政承을 지냈다. 그의 아들 은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랑에 올랐고, 月城府院君에 봉해 졌고, 시호는 文孝이다.

 

그의 아들 達衷은 호가 霽亭이고, 호부상서를 역임하고 밀직제학에 발탁되었으며, 鷄林府院君에 봉해 졌으며, 시호는 文靖이다. 그의 손자 興商은 난을 평정한 공으로 에 봉해지고, 시호는 襄僖이다.

 

그의 5세손 介立遺逸로 천거되어 山陰縣監에 제수되었고, 호는 櫟峯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徽音15세에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당시에 명망이 있었으나 불행하게 단명하였다.

 

崇彦으로 별시문관에 급제하여 淮陽府使에 이르렀고, 는 안동권씨로 忠定公 權橃의 증손이고 務功郞 集의 따님이다. 1616(광해군 8)에 저자를 낳았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고, 총명하였다.

 

겨우 예닐곱이 되었을 때, 참판공이 문자를 시험해 보고는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1646(인조 24)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1654(효종 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講席에 나갔는데 한 획이 법도에 어긋나 조정의 전례에 따라 康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657(효종 8)에 승문원 정자에서 박사로 옮겼다가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66(현종 7)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한결같이 가례에 따라서 행했고, 장례 후에는 여러 아우들과 묘 아래에 여막을 짓고 3년을 마쳤다. 1669(현종 10)에 전적에 제수되고, 예조형조공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하였다.

 

1670(현종 11)에 함안 군수에 제수되었다. 그 때에 큰 기근을 만났는데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674(현종 15) 여름에 직강에 제수되었고, 가을에 端川郡守에 제수되었다.

 

지경 내에 은광이 있는데, 이전에 이곳에 부임하는 군수들은 명성에 누를 끼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자는 이곳에 부임하여 청렴함으로 자신을 다스려 남들로부터 비난을 듣지 않았다.

 

1676(숙종 2)에 교체되어 돌아 왔다가, 1677(숙종 3) 여름에 예조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9월에 사헌부 장령이 되고, 곧이어 장악원정이 되었다. 당시에 繼妣께서 집에 계셨고, 또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니 우환의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외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조의 관직에 보임하고 서열을 뛰어 넘어 승진시켜서라도 억지로 잡아 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종일관 간곡하게 사임을 청하여 이 해 겨울에 삼척부사에 제수되었다. 이곳은 궁벽지고 공무가 많지 않아서 때때로 바다와 산을 돌아다니며 자적하였다.

 

1680(현종 6)에 붕당의 화가 크게 일어나서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1684(숙종 10)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이때 저자의 나이 70이 되었으나 빈소를 지키고 거적자리와 흙덩이 베개를 베는 절도를 부친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게 하였다.

 

상을 마치고 石宗山 아래에 몇 칸 초가집을 짓고 노년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이곳은 증조부부터 부친까지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집 주위에 매화와 국화를 심고, 뜰 앞에 여러 가지 꽃을 심고 그 사이에게 를 지으며 당세의 일에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1689(숙종 15) 이후에 장령헌납 등의 직책에 여러 번 제수되었지만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그리고 사직소에 임금 덕의 부족한 점, 세자를 보양할 방책을 진술하였다. 또 기강을 세우고 公道를 넓히며,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

 

호족들의 토지 겸병의 폐단과 백성이 생업을 잃어버리게 된 연유에 대해 진언하였다.

이러한 점은 임금이 모두 가납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임금의 명이 거듭 이르자 의리상 마음이 편하지 못하여 조정에 들어가 사은숙배하고 두 달 만에 사직을 하고 돌아왔다.

 

1695(숙종 21)通政大夫에 승진하였다. 1705(숙종 31)에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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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祖考通政大夫。行三陟都護府使李公行狀。- 外孫 權相一  撰

 

府君諱達意。字以正。姓李氏。系出慶州。新羅始祖佐命功臣諱謁平之後。高麗時。有諱世基。登天塲及第。官至檢校政丞。是生諱蒨。文科。官至門下侍郞。月城府院君。謚文孝。是生諱達衷。號霽亭。以文章直節著穪。早登第。歷戶部尙書。又擢爲密直提學。封鷄林君。謚文靖。有孫諱興商。以靖亂功封君。謚襄禧。又五世至諱介立。以遺逸薦。授山陰縣監。號櫟峯。贈兵曹參判。生諱徽音。十五。捷鄕試兩塲。後登上庠文科。時望藹蔚。將薦翰苑。不幸早卒。生諱崇彦。仁廟辛未。別試登第。官至淮陽府使。配安東權氏。忠定公諱橃之曾孫。務功郞諱集之女。以萬曆乙卯十二月二十二日。生府君于榮川葛山里第。年纔齠齔。參判公試以文字。大奇之。及長。篤志勤學。癸酉。丁母夫人喪。丙戌。俱中鄕額。甲午。又中鄕試三塲。登上庠。仍入講席。以一畫未準。見屈。朝家依前例。卽除康陵參奉。丁酉。登文科。選入槐院。自正字陞博士。以事見罷。丙午。遭府使公喪。喪制。一遵家禮。旣葬。與諸弟結廬墓下。以終三年。己酉。拜典籍。轉爲禮刑工佐郞正郞。庚戌。除咸安郡守。時値大飢。盡心賑救。壬子。罷歸。甲寅夏。拜直講。秋。授端川郡守。境內有銀穴。曾莅是邑者。多得累名。府君以淸簡律己。人不得疵議。丙辰。遞歸。丁巳夏。以禮郞上京。九月。陞司憲府掌令。俄拜掌樂院正。時繼妣李夫人在堂。府君見時事有可憂之機。且爲便養計。力求外補。銓官欲超遷而強留之。終始懇辭。是冬。除三陟府使。奉板輿赴任。極其榮養。而郡僻官閒。時從山海間。徜徉自適。庚申。黨禍大起。卽解紱而歸。甲子遭艱。時府君年已七耋。而守殯苫塊之節。無異前喪。服闋。搆數間草屋於家之數里許石宗山下。爲終老之所。自參判公至府使公。連三代內外墳塋。皆在故也。列植梅菊花卉於階庭。嘯咏其間。淡然無當世之念。己巳後。累除掌令獻納等職。上辭䟽引疾。因附陳君德闕失及補養元子之方。又言立紀綱。恢公道。格天心。恤民隱。以及豪右兼並之弊。生民失業之由。縷縷數百言。上嘉納焉。公以年至而不得致仕。坐膺荐召。爲未安。入朝肅謝。留兩月。呈病還歸。兩銓長及卿宰諸公。皆至邸舍餞行。李奉朝賀觀徵。尤嘖嘖穪歎。逢人輒語之。府君杜門謝事。而朝廷猶不置。累擬於司諫輔德之望。乙亥。用大冢宰尹公趾善啓。陞通政。丙子。拜僉知中樞府事。乙酉正月初。有微恙。六日辛丑。考終于正寢。享年九十一。是年三月。權厝于先壠下。翌年春。穿前夫人朴氏墓右。合葬。距所居屋不數十步矣。府君天資朴實。操守堅確。仕於朝。以干榮冐進爲耻。嘗語子弟曰。家親在淮陽時。貽書曰。凡仕宦。淸顯則猜至。高貴則辱及。汝爲官。如吾而止。可也。少時在京師。與諸名勝會飮賦詩。有曰。三杯人大醉。坐久落燈花。湖海平生志。眠鷗獨占沙。出身四十餘年。官不三品。年至九耋。則陞資嘉善。國法所許。而禁子弟不爲陳請圖得。蓋安分知足。不但素性固然。亦欲不負先訓也。治民則以安靜不撓爲務。而無干譽衒能之事。故初無赫赫聲而終有去後之思也。居家則産業經理等事。一切斷置。故春夏之時。匱乏無常。而亦不以爲意也。不爲皎皎之行。而內守淸約。累經外任。而田不增一畝。奴不加一口。屋不添一間架也。平居無疾言遽色。而於人不形喜怒。性嗜酒而不喜旨酒也。食淡素而不喜膏粱也。衣寬博而不喜華美也。凡百玩好之物。一不近於前也。老而體力康健。聰明不衰。燈下看細字。每於鷄鳴後起坐。誦書二典詩七月篇若庸學序。不小廢也。先壠皆在傍近。必親行祀。而及至八九十。具衣冠。就堦間。再拜展謁而退。因使子弟行祀。惟時與社中諸老。擇良辰。作眞卛會。盡日酣暢。或賦詩吟哦。或劇談古今而罷。爲詩若文。閒淡簡正。無新奇語。不好著述。且無留稿。故秪有若干編藏于家。初聘羅州朴氏。嘯先生諱承任之玄孫。啓功郞諱炓之女。早歿無子女。聘平康蔡氏。進士諱震亨之女。端淑柔嘉。甚得婦道。先府君二十二年而歿。葬先壠。與府君墓同麓連塋。有一男四女。男曰台翊。進士。累入省試。而竟不第。有三子東培,恒培進士,泰培。長女適裵晉龜。以孝行贈佐郞。無子。以從姪昌大爲嗣。次適黃命圭。有二子。載華,載岳。次卽我先妣。適先考姓諱。累擧不中。有一子相一。文科。前行左副承旨。次適李之瑎。有一子濟。側室子昌。有內外曾玄。多不能盡記。相一自童穉時。累侍膝傍。言行梗槩履歷次第。竊有所熟聞而詳見。玆敢錄成一通。以備主文君子之采擇焉。崇禎後再戊辰月日。外孫通政大夫前行承政院左副承旨。安東權相一。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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