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동암 이진선생

동암공 묘비문-종보기사 원고

야촌(1) 2019. 6. 29. 16:24

동암공 묘비 탁본문 첫 공개

 

이 비문은 고려 말 대학자요 정치가인 익재공(휘 제현)의 아버지 되시는 동암공[東菴公. 諱 瑱. 1244년(고종 31)~1321년(충숙왕  8)]의 묘비 탁본문 입니다. 오늘날 북한(北韓)의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촌에 소재하는 동암공 묘에 1921년 九월에 세웠던 것으로 6,25 전란 때 소실(消失) 되어 지금은 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본 탁본문은 종보 지면의 편의상 비제와 비기 첫 부분만 편집해서 올립니다.

 

 비기에 의하면 동암공의 무덤은 전하여 지지 못한지 오랜세월이었는데, 지난 경술년(1910년) 봄에 어떤 자가 도굴(盜掘) 하여 명기(明器 : 사자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을 무덤 안에 묻어주는 물건. 秘器 라고도 한다)를 파 내었는데  이른바 고려자기와 공의 묘지석(墓誌石)이 발굴되어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비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탁본문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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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검교정승 임해군 시 문정 경주 이공 진 묘비[十六世]  

   (高麗 檢校政丞 臨海君 諡 文定 慶州 李公 瑱 墓碑)

 

   후손 종형 술(後孫 鍾瀅 述)=21세손 통정대부 장예원 장예 종형(鍾瀅)이 삼가 기록하다.

   비문 찬자 : 정인표 서(鄭寅杓) 書 

                

우리 선조 동암공(東菴公)의 무덤은  우봉 도리촌(牛峰 桃李村)에 있다. 족보와 가승에 비추어 보아도 알 수 있고 또 목은 이 선생(牧隱 李先生)이 공(公)의 자제(子弟) 시중공(侍中公)의 도리촌 묘지(挑李村 墓誌)를 지었는데, 거기에도 장지(葬地)는 선영(先塋)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징빙(徵憑)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의 무덤은 무너져  전하여 지지 못한지 오래이다. 지난 경술년(1910년) 봄에 어떤 자가 도굴(盜掘) 하여 명기(明器 : 사자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을 무덤 안에 묻어주는 물건. 秘器 라고도 한다)를 파 내었는데  이른바 고려자기와 공의 묘지석(墓誌石)이 나왔다.

 

이에 나 종형(鍾瀅)이 여러 일가들과 달려가서 살펴보았더니, 곧 광(壙)의 앞뜰 안이었다. 과연 시중공(侍中公 : 익재공) 묘소의 오른쪽 언덕이었다. 광을 돌로 둘러쌓아서 깎아내린 듯한 벽을 이루고, 그 밖에다 묘지석과 명기(明器)가 들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광중(壙中)은 옛 모습 상태로 이상이 없었다.

 

묘지석은 모양이 타원형으로서 길었는데, 길이는 삼척(三尺=90㎝)이고 넓이는 그 절반(折半=1.5尺) 이었다. 우뚝한 지석 둘레면에는 실같은 경계가 있어 三十二줄을 새겼는데 줄마다 五十九자요. 줄과 글 사이는 머리카락 처럼 가느다란 경계가 있다.

 

지석 상부에는 횡전(橫篆 : 전자를 횡으로 씀)으로 이 문정공 묘지명(李 文定公 墓誌銘)이라는 일곱 자의 대자(大字)가 있었다.  제일 첫 줄에는 고려국중대광(高麗國重大匡)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承)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 임해군(臨海君) 증시문정공(贈諡文定公) 이진 묘지명 병서(李瑱 墓誌銘 幷書)라고 있고, 둘째 줄에는 지은이의 성명이 적혀 있었으니 곧 선부상서(選部尙書) 조간(趙簡)이 지음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획이 떨어지고 닳아서 해득할 수 없는 것이 태반이었다. 공(公)의 이름과 호(號)와 선대 三세의 세계와 공의 장지는 다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태부인(太夫人 : 大夫人과 같은 말. 즉 공의 어머니)이 족보에는 빠졌고 또 그 아버지의 이름과 초취(初娶)의 성씨도 전하여지지 않았는데, 다 망가진 지석에 들어 있었다. 태부인 아버지의 휘는 원(元)이다.

 

지석에는 공이 九月 十二일에 하세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족보에는 二十일로 되어 있다. 족보에 적혀 있는 것이 혹 대선장 시중공(大禪長 侍中公)의 일이 아닌가 하고 상고하여 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무릇 행적에 관하여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겨우 한두 가지로서 명(銘)은 더욱 망가져서 읽을 수가 없었다. 

 

이에 있어서 다시『검교정승 임해군 경주 이진 지 묘(檢校政承 臨海君 慶州 李瑱 之 墓』의 열석자를 지석 배 면(誌石背面)에 약간 더 크게 써서 깊이 새겨 본래 있던 곳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묘소를 개수하였으니 때는 태황재(太皇帝 : 고종. 즉 1910년) 四十七년 봄, 三月 二十 二일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이름은 진(瑱)이고 초명은 방연(方衍)이다. 자(字)는 온고(溫故)이고, 동암(東菴)은 그의 호(號)다.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의 후손이다.

 

증조 승고(升高)는 경주호장(慶州 戶長)이었으며, 조부 득견(得堅)은 상의봉어동정(尙衣奉御同正 : 임금의 의내를  진어하며, 보물을 맡아보던 관아의 종 2품 벼슬. 이조의 상의원 첨정과 같은 것을 말함)을 지냈으며, 고(考 : 돌아가신 아버지의 칭호) 핵(翮)은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증직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다.

 

어머니는 김해군 대부인(金海郡大夫人 : 고려 때 외명부의 정 4품 벼슬)인 김씨이다. 공이 고려 고종 갑진년(1244)에 출생하였다. 지석에『복야부군이 꿈에 상제(上帝 : 옥황상제)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주는 것을 보고 공을 낳았다.』고 되어있다. 

 

공이 천품이 뛰어나고 준수하였으며, 도량이 넓었다. 소시에 학문을 좋아하여, 널리 경서와 사기에 통하였으며 또 시(詩)를 잘하여 어려운 운자(韻字)를 당하여도 소리의 반응이 오듯이 빨랐다.

 

제주(祭酒 : 성균관 제사의 집 제자. 제사에 쓸 술을 말하는 것이 아님) 이송진(李松縉)이 보고서 탄복하여 말하기를『참 큰 그릇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형제들로 더불어 같이 태 부인에게 수학하여 문장으로 저명하였다.

 

또 지석에『태 부인이 다른 자제들보다 더 사랑하여 입으로 시서를 일러 주었다.』고 있다. 공이 일찍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섬기매 근 독(謹篤) 하였다. 경진(庚辰) 1280년(충렬왕 6)에 과거(科擧 : 일반적으로 과거라고 할 때는 대과를 의미한다) 하였다.

 

지석에는『二十시절에 사마시(司馬試 : 소과)에 올랐고 경진(庚辰)에 대과 병과(丙科)로 뽑혔다. 광주 사록(廣州司錄)에 임명되었다가 한림원(翰林院 : 이조의 예문관에 해당함, 사명(辭命)을 맡아 지었다.)에 들어갔다.

 

왕이 친히 문신을 시험하고 아홉을 발탁하였는데, 공(公)이 二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공의 계씨(季氏) 세기(世基)는 삼등으로 합격하였으니 다 한 때의 명사 들이었다. 이것을 천장 급제(天場及第 : 임금이 직접 시험을 보인 과거에 합격하다)라고 불렀다.

 

왕이 매양 칭찬하여 내 문생(門生 : 대과 및 소과의 시관(試官)이 합격자를 그렇게 부르며, 또 합격자도 시관을 스승으로 대접하여 스스로를 문생이라고 칭하였다)이 여러 부서를 거쳐서 일 어 나는 구나!』라고 하였다.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안동부사가 되매, 쌓인 폐단을 없애고 학교를 일어 켰다.

지석에『안동부의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복을 빌어 지금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라고 쓰있다. 

 

누차 전임하여 전부 총랑(典簿摠郞)이 되었다가 우 사의대부(右司議大夫), 사림원학사(詞林院學士), 로 승진하였다. 그때 승지방(承旨房)을 파하고 본원(本院)이 출납을 맡게 되었다. 공이 학사 박전지(朴全之) 등과 마음을 같이하여 협찬하니 특히 홍정(紅鞓 : 붉은 가죽띠)을 하사하여 총애의 뜻을 표하였다. 

 

대사성 밀직 승지(大司成密直承旨)로 전임되었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 :  조선 때의 형조판서와 동일)가 되었다. 지석에『재판에는 원고와 피고를 다 앞에 나오도록 하여 그르고 오른 것을 타일러서 선고하였기 때문에 패소한 사람도 성복 하여 감히 원망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에 들어가서 계교(計巧)를 써서 본국의 간악한 무리를 베어 죽이고 친하고 믿는 사람들에 관작을 주었다. 공이 글을 올려 가로되『벼슬과 거복(車服 : 수레와 의복)을 함부로 내려 주는 것이 아니오며, 사급 했던 토지도 공로가 있는 사람 이 외에는 다 거둬들이며, 긴요하지 않은 벼슬은 감하시고 또 시급하지 않은 역사는 파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충선왕이 옳게 여겨 받아 들이고 계급을 뛰어 올려 정당문학(政堂文學), 상의도첨의사사(商議都僉議司事)를 제수하여 찬성사(贊成事)로 승진시켰고 충숙왕(忠肅王) 갑인(甲寅. 1314=충숙왕 원년)에 대광검교첨의정승(大匡檢校僉議政承) 임해군(臨海君)을 더하여 주었다.

 

공이 벼슬을 그만둔 뒤로는 한가하게 지나 매일 문사들과 승려로 더불어 이리저리 거닐며 자적하였다.  경신(庚申=1320년 충숙왕 7)에 상왕(上王=충선왕)이 은병(銀甁) 二백개와 쌀五백석을 하사하였다.

 

그때 시중공(侍中公)이 공거(貢擧) : 각 지방의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여 고시를 거쳐 등용하던 방법)의 사무를 맡아보고 있어서 여러 문생(文生 : 제자라는 뜻도 있으나, 과거에 급제한 사람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소과 합격자)을 이끌고 와서 공의 수(壽)를 축하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위[王을 말함]에서 특별한 은혜로 물품을 하사하여 그 일을 화사하게 하니 그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생각했다. 이듬해 신유년(辛酉年=1321/충숙왕 8)에 하세(下世)하시니 수(壽) 七十八이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定) 이라고 하였다. 

 

지석에『공이 유림의 중망(重望 : 큰 명망)이 있었고, 조정에 있을 때에 공경하고 어렵게 여겨서 의관을 갖추지 않고는 뵙지를 못했다.』라고 적혀 있다.『평생에 살림을 힘쓰지 않고 마음에는 애체(礙滯)되는 일이 없으며, 남과 말할 때는 흉금을 환하게 털어놓았다. 임종할 때에도 담소가 자약 하였다.』

 

공의 초취는 먼저 말한 거와 같다. 계배(繼配 : 재취)는 진 한국부인(辰韓國 夫人) 박 씨로. 대릉직(戴陵直 : 이조의 재릉참봉)은 인육(仁育)의 따님이다. 후손이 뒤를 이어 더욱 번창하여 절의 있는 선비와 명망과 도덕이 있는 학자가 중간중간에 나와서  혁혁하게 세상에 빛났다.

 

아! 공의 세대를 격함이 아득하다.

공의 평생의 사적과 행실을 지금 다 들 수가 없다. 그러나 三대의 조정을 섬겨서 예로서 대접하는 것이 높아서 우뚝하게 선비와 대부의 모범이 되었다.

 

연(燕)나라 남량[南梁 : 현재의 안휘성 합비현(安徽省 合肥縣)의 동북] 땅을 지키던 장수가 공의 화상을 찬하여『삼한의 인물이며 한 때의 노성(老成 : 열력이 많고 사물에 숙달하였거나 또는 문장이 노련하고 교묘함을 말함)이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사실 대로를 얘기한 것이다.

 

공의 묘소가 다행히 다시 六백년 동안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나타났으므로 대대로 향화를 받들어 영구히 보존하여 실전되지 않으려는 취지로 감히 고려사 본전과 가록 구문(家錄舊聞 : 가정에 기록하여 두어서 전해 들은 얘기)과 또 지석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모아서 돌에 써서 묘도의 표지로 한다.

 

또 묘를 쓸 때의(산소를 만들 때) 사실을 제일 먼저 들어서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지금 와서 추행(追行 : 추후 하여 행함) 함이 이유가 있음을 알도록 하는 동시에 더욱 공경과 근신을 더하도록 한다.

 

묘소는 계좌(癸坐)이며, 도리촌은 현재의 장단군 지금리(長湍郡 知琴里)다. 여러 일가 중에서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본 사람은 종필(鍾弼), 종진(鍾震), 종익(鍾翊), 종억(鍾億), 종선(鍾璇), 상경(相慶), 상익(相益), 등이다. 묘를 개수한지  十一년 되는  신유년(辛酉年 : 1921년) 九월 일에 세우다. <끝>

 

비문 자료 : 경주이씨 익재공파대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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