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개천에서 용 난 포도대장 - 조선초 노비 출신 이양생

야촌(1) 2019. 2. 1. 00:19

경주이씨 종보 제327호 7면(2019년 1월 25일 금요일)

개천에서 용 난 포도대장 - 조선초 노비 출신 이양생

 

글 : 이재훈 경주이씨 중앙화수화 감사 / 종보편집위원

 

서얼(庶孼)이란!

조선시대 신분 계급 중의 하나로 양인 첩에서 태어난 사람을 서자(庶子)라 하고 천민 첩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얼자(孼子)라 해서 둘을 합하여 서얼이라고 한다.

 

이는 고려 때는 일부일처 제도로 서얼의 수도 많지 않았고 또한 제도적으로 크게 차별하지도 않았다.

조선에 들어와 대개 양반들이 천민들을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서 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왜냐면 당시 양인들은 적어도 자유인이었기에 양반들이 동침을 요구할 때 거부할 수 있었지만 천민들은 그 대상이 주로 자신이 소유한 노비이기 때문에 거부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얼의 핍박은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 이후 시작되었고 세조 때 경국대전이 편찬되면서 서얼 금고법(禁錮法)을 제정 과거 응시 자격도 박탈해 버렸다. 그리고선 때에 따라 허통되기도 하였지만 1625년(인조 3) 「허통 사목(許通事目)」이 제정되어 양 첩자(良妾子)는 손(孫) 자부터 천 첩자(賤妾子)는 증손 대(曾孫代)부터 과거 응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 같은 시대에 태어난 이양생「李陽生,1423년(세종 5)∼1488년(성종 19) 4월 8일」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고려 말 월성 군(月城君) 지수(之秀)의 현손이고, 조부는 대호군(大護軍=從三品)을 지낸 만실(蔓實)이고 아버지는 군수(郡守=從四品)를 지낸 종직(從直)이다.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 종직의 시중을 들던 비첩(婢妾)이었다. 그는 얼자(孼子)로 태어난 당대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적개공신 3등의 반열에 올라 부귀영화의 자리에 오른 불세출(不世出=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할 만큼 뛰어남)의 인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백 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전해오고 또 전해질 것이다.

 

이양생은 아버지 쪽으로는 양반이었지만, 당시 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일 경우, 자식도 노비가 된다는 제도에 따라 한미(寒微)한 종의 신분으로 어릴 때 집이 가난하여 백정 친구들로부터 배운 가죽신을 지어 저자에 내어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품이 순박하고 근실하며 비록 책은 읽지 못하였으나 활 쏘고 말 타는 무예(武藝)가 능하였다(陽生系出賤孽, 少時以造鞋爲業, 每坐市買賣, 性度純謹, 雖目不知書, 而能射御)라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양생의 이야기는 1504년(연산군 10)의 문신 학자 성현(成俔/공조판서 겸 대제학 역임)의 수필집 용재총화(慵齊叢話)에 언급되고 있는데 양생 부인의 용모에 대하여는 "추하고 비루하다"라고 묘사했다.

 

또한 옛 부터 전해오는 문헌 설화집을 1873년(고종 10) 서유영(徐有英/의령현감을 지낸 문학인)이 필사한 금계필담(錦溪筆談)의 야사를 통해서도 그의 이야기는 전해져 왔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비첩이 낳은 천얼(賤孽) 출신이라는 것으로 알려진 것은 1970년대 이후 조선왕조실록을 국역하는 과정에서 사관이 논평한 것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글도 배우지 못하고 장가도 가지 못하다가 겨우 남의 집 종년인 파릉군 윤보「坡陵君 尹甫=세조의 비(妃) 정희왕후의 조카」의 가비(家婢)를 아내로 얻어 살았다

 

그러나 이양생은 힘이 좋고 무예(武藝)가 능하여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적(嫡) 삼촌 이양직「李良直/증 참판/외손자가 좌의정 김질(金礩)」과 함께 세조 반정에 참여한 뒤, 이의 성공으로 1455년 음력 6월 11일 세조가 즉위한 직후, 그는 면천되고 간단한 무예 시험을 거쳐 장용위(壯勇衛)에 배치되어 왕의 호위무사가 되었다.

 

그 후 1467년(세조 13) 5월 이시애의 난(李施愛亂)이 일어나자 그는 토벌군으로 참여하여 선봉으로 출전하였다.

얼마나 용감히 싸웠던지 졸병으로서는 유일하게 공을 세워 그해 9월 20일 정충 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 3등에 책록 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작되었으며 많은 전답과 노비(臧獲)를 하사 받고 벼슬이 승진되었다.

 

그러나 서얼 출신이기 때문에 자급(資級)이 가선대부(嘉善大夫=從二品)에 이르렀으나 한 번도 청직이나 요직에는 등용되지 못하였고 평생을 겸사복(兼司僕 : 正三品으로 국왕의 경호원)과 포도대장(捕盜大將/從二品)으로 번갈아 가면서 제수되어 전국 각지의 도적 소탕 업무를 수행 많은 공을 세웠다.

 

그중에서도 관악산 고도(古道=옛길) 일대에서 항거하였던 김 말응(金末應) 등과 충주 수리산(愁里山), 여주의 강금산(剛金山) 도적 때들을 소탕한 공이 유명하였지만 나라의 3등 공신이 되어 도적이나 잡으러 다니는 일을 하는 예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옛날 자신이 신 장사하던 저자를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옛 친구들과 땅바닥에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가곤 하였다 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부자(富者)가 되면 친구를 바꾸고, 귀하게 되면 아내를 바꾸는 것이니, 부인과 헤어지라」고 충고하였다.

 

그는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부인을 극진히 아끼며,「조강지처(糟糠之妻)는 버릴 수 없다!」하고 끝내 이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양생은 아내를 속량(贖良=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양민이 되게 함) 면천시켜주기를 청원하자 1470년 6월 21일 성종(成宗)은 전지하기를 "이양생(李陽生)은 서얼 출신이긴 해도 공신(功臣) 일뿐만 아니라 도적(盜賊)을 체포한 공(功)이 있으니 그 아내를 특별히 양인(良人)이 되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성종의 특명으로 부인도 노비의 신분을 벗었지만 그는 부인의 옛 주인집을 지나면 비를 들고 대문 앞을 쓸면서 「이 분은 나의 본 주인이다. 예법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도 기생 바람은 꽤나 피운 것 같다. 기생들에게 마음을 두게 되면 의복을 죄다 벗어 주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러한 짓을 비웃으면 그는「가난한 기생들이 내가 베풀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나에게 있는 것은 모두 임금의 은사이니, 은사를 나누어 남에게 주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하였으니 요즘 말로 윗트와 유모어도 넘친 인물이었다.

 

공(公)의 나이 66세 되던 해인 1488년(성종 19) 4월 8일에 세상을 떠나자 성종(成宗)은 바로 부의(賻儀)와 사제(賜祭)와 예장(禮葬)을 명하고 양평(襄平)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 시호의 정의가 「일을 잘하여 공(功)이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처사에 잘못이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공의 매장지는 알 길이 없다. 성종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그는 아들을 두지 못하였는데, 적형(嫡兄 : 정실부인에서 난 형), 길상(吉祥)의 아들 오(晤)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양 손자는 문과에 급제하고 양천현령(陽川縣令)과 ‧훈련원(訓鍊院)의 도정(都正=正三品 堂上官)을 지낸 이사종(李嗣宗)이다. <끝>

 

[참고문헌]

◇慵齊叢話 ◇錦溪筆談 ◇世祖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慶州李氏世譜[1919]-李圭桓

 

 

노비에서 포도대장이 된 '이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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