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오천집(梧川集)-이종성 저

야촌(1) 2019. 1. 3. 21:19

 

 

 

 

오천 이종성 글(경남 밀양 표충사 소장)

 

 

30世 이종성 글씨

〈이종성 편지〉, 『근묵』, 행초서, 24×40.5㎝,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척질(戚侄) 이종성이 보낸 편지. 박명빈(朴明彬)의 일에 대한 의견을 모을 것과 승정원 아전 홍진웅(洪晉雄)이 직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형태서지

권수제  오천집(梧川集)
판심제  없음
간종  寫本
간행년  1937年謄寫
권책  原集 15권, 附錄 5권 합 1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3×15.5(㎝)
어미  無魚尾
소장처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도서번호  D3B-312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14

 

저자

성명  이종성(李宗城)/30世
생년  1692년(숙종 18)
몰년  1759년(영조 35)
 子固
 梧川
본관  慶州
시호  孝剛(1769, 영조 45)
개시  文忠(1788,정조 12)
특기사항  趙顯命, 朴文秀 등과 교유. 少論 峻論의 영수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숙종 18 1692 임신 康熙 31 1 11월 13일, 外家인 驪州 梨湖에서 태어나다.
숙종 32 1706 병술 康熙 45 15 12월, 尹趾完의 손녀인 坡平尹氏와 혼인하다.
숙종 33 1707 정해 康熙 46 16 5월, 부인 尹氏의 상을 당하다.
숙종 36 1710 경인 康熙 49 19 11월, 徐文裕의 딸인 達城徐氏와 혼인하다.
숙종 37 1711 신묘 康熙 50 20 2월, 진사시에 합격하다.
숙종 44 1718 무술 康熙 57 27 12월, 조부 文敬公 李世弼의 상을 당하다.
경종 2 1722 임인 康熙 61 31 7월, 모친상을 당하다.
영조 3 1727 정미 雍正 5 36 윤3월, 增廣 別試 丙科에 합격하다. ○ 7월, 겸설서가 되다. ○ 12월, 弘文錄에 선발되다.
영조 4 1728 무신 雍正 6 37 1월, 都堂錄에 선발되다. ○ 4월, 別遣安集使로 嶺南에 가다. ○ 7월, 홍문관 저작이 되다. ○ 9월, 復命하고, 親病을 이유로 呈告하여 체직되다. ○ 설서, 홍문관 박사가 되다. ○ 10월, 부수찬 겸 시강원사서, 東學敎授가 되다. ○ 12월, 부교리, 헌납, 겸사서가 되다.
영조 5 1729 기유 雍正 7 38 1월, 부수찬이 되다. ○ 2월, 겸문학, 교리, 西學敎授가 되다. ○ 李亮臣, 尹得和의 공척으로 사직소를 올리다. ○ 4월, 병조 좌랑, 京畿 都事에 제수되다. ○ 5월, 부교리, 겸문학, 中學敎授에 제수되다. ○ 7월, 이조 좌랑, 교리에 제수되다. ○ 災變으로 특별히 咸鏡南道 慰諭安集御史에 차출되어 각읍의 재상을 입은 상황과 三水, 甲山의 形止를 장계로 아뢰다. ○ 11월, 시강원 필선, 부응교가 되다.
영조 6 1730 경술 雍正 8 39 교리, 동학교수, 응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소명을 어겨 파직되다. ○ 3월, 北路 監賑御史가 되다. ○ 定平 都連浦 경작에 대해 논하고, 賑政 이후 量田의 시행, 白徵의 폐단, 還穀의 감면 등을 청하다. ○ 8월, 安城 郡守가 되다. ○ 11월, 부응교가 되어 소대에 참여하다. 朔射에 불참하여 파직되다.
영조 7 1731 신해 雍正 9 40 1월, 특명으로 關西御史에 차임되어 精抄軍의 減布를 청하다. ○ 8월, 부응교가 되어 「聖學輯要」를 講하다. ○ 11월, 京畿流民安集使로 다녀오다.
영조 8 1732 임자 雍正 10 41 5월, 교리가 되다.
영조 9 1733 계축 雍正 11 42 6월, 형조 참의, 동부승지, 우승지가 되다. ○ 7월, 대사간, 호조 참의가 되다. ○ 10월, 묘당의 추천으로 이조 참의가 되어 승문원 부제조에 차임되다. ○ 11월,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파직되다.
영조 10 1734 갑인 雍正 12 43 2월, 대사성, 우승지가 되다. ○ 4월, 부제학이 되어 「近思錄」을 강하다. ○ 7월, 비국 당상, 승문원 부제조가 되다. ○ 8월, 次對에서 良役의 變通에 대해 논의하다. 12條의 時務箚를 올리다. ○ 9월, 이조 참의가 되다. 軍米節目을 완성하다.
영조 11 1735 을묘 雍正 13 44 이전에 朴弼載를 구원하는 소차를 올린 일로 金尙魯의 반박을 받자 상소하여 인혐하다. ○ 4월, 洪啓裕의 疏斥을 받고 呈告하다. ○ 윤4월,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전랑 尹汲과의 갈등으로 사직하다. ○ 5월, 비국 당상에 차임되고, 병조 참지가 되다. ○ 11월, 다시 이조 참의가 되다. ○ 12월, 錢法의 변통에 대해 의논하다. 銓衡에 黨人만을 천거했다는 閔亨洙의 상소로 사직소를 올리니, 특명으로 파직되다.
영조 12 1736 병진 乾隆 1 45 2월, 비국 당상에 차임되다. ○ 3월, 부친 忠定公을 모시고 熙政堂에 입시하여 宣醞을 받다. 대사간이 되다. ○ 5월, 호조 참의가 되다. ○ 6월, 병조 참의가 되다. ○ 9월, 京畿 觀察使가 되다.
영조 13 1737 정사 乾隆 2 46 7월, 예문관 제학, 병조 참판에 제수되다. ○ 8월, 동지의금부사가 되다. 尹汲을 공척하는 소를 올려 삭직되다. ○ 9월, 도승지 겸 동지경연사, 전생서제조가 되다. 곧 특교로 본직에서 체직되고 비국 유사당상이 되다. ○ 윤9월, 승문원 제조, 동지의금부사, 공조 참판이 되다.
영조 14 1738 무오 乾隆 3 47 1월, 대사성에 제수되었다가 곧 부제학으로 이배되다. ○ 3월, 趙迪命, 金尙迪 등과 壽親稧를 맺어 어버이를 모시고 掌樂院에서 잔치를 열다. ○ 掛書 사건으로 궐외에서 대명하다. ○ 6월, 호조 참판이 되다. ○ 8월, 이조 참판, 동지경연사가 되다. ○ 10월, 한성 우윤, 형조 참판이 되다.
영조 15 1739 기미 乾隆 4 48 2월, 愼妃의 복위를 논하다. 부친상을 당하다. ○ 10월, 成有烈이 장악원에서 壽親宴을 벌였던 일에 대해 탄핵하다 성 밖으로 나가 대명하다.
영조 17 1741 신유 乾隆 6 50 5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7월, 우부빈객이 되다. ○ 8월,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9월, 한성 좌윤, 예문 제학, 平安道 觀察使가 되다. 請對하여 大訓의 수정을 청하니, 이로 인해 金在魯의 논척을 받다. ○ 11월, 호조 참판에 제수되다.
영조 18 1742 임술 乾隆 7 51 3월, 도총부 부총관이 되다. ○ 4월, 忠淸道 觀察使가 되다. ○ 5월, 從弟 李宗白의 長子 李敬倫을 양자로 삼다. 부인 徐氏의 상을 당하다.
영조 19 1743 계해 乾隆 8 52 魯岡書院을 배알하고 鄕飮酒禮를 행하다. 明齋 尹拯의 禮書를 간행하다. ○ 7월, 부제학, 빙고 제조에 제수되다. 부인 沈氏와 혼인하다. ○ 8월, 대사헌으로 이배되다. ○ 9월, 한성좌윤 겸 우부빈객이 되다. ○ 10월, 資憲大夫로 오르고 공조 판서가 되다. 형조 판서로 이배되다.
영조 20 1744 갑자 乾隆 9 53 1월, 상소하여 형조 판서에서 체차된 뒤 이조 판서가 되다. ○ 2월, 동지성균관사, 종묘 제조가 되다. ○ 3월, 李天輔의 소척을 당하다. ○ 4월, 이조 판서에서 체직되고 예조 판서가 되다. ○ 6월, 續大典纂修廳과 續五禮儀增修廳 당상이 되다. ○ 8월, 正憲大夫로 오르다.
영조 21 1745 을축 乾隆 10 54 1월, 형조 판서가 되다. ○ 4월, 平安道 觀察使가 되다. ○ 8월, 도내 남북을 순시하며 山城의 형세를 살펴본 뒤 關防에 대한 장계를 올리다.
영조 22 1746 병인 乾隆 11 55 2월, 공조 판서, 비국 당상이 되다. ○ 윤3월, 예문 제학, 교서관 제조가 되다. ○ 9월, 咸鏡道 觀察使가 되다.
영조 23 1747 정묘 乾隆 12 56 2월, 도내의 남북을 순시하고 5월에 監營으로 돌아와 關北事宜疏狀을 올리다. ○ 8월, 북방의 軍制를 개정한 절목을 장계로 올리다.
영조 24 1748 무진 乾隆 13 57 4월, 대사헌이 되자 李光佐, 趙泰億의 관작추탈을 반대하고 李光佐와는 師弟의 의리가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長湍으로 돌아가니, 黨論이 발하여 宋德中, 尹學東 등이 遠竄하기를 청하다.
영조 25 1749 기사 乾隆 14 58 1월,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金善行의 공격을 받고 상소하여 사직하다. ○ 2월, 정언 朴相德의 논척을 받고 小朝에게 上書한 뒤 하향하다.
영조 26 1750 경오 乾隆 15 59 지경연, 빈객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上書하여 사직하다. ○ 6월, 상서하여 戶錢의 시행에 반대하고, 良役變通에 대해 논하다. ○ 開城 留守가 되었다가 守禦使, 南漢 留守로 이배되다.
영조 27 1751 신미 乾隆 16 60 1월, 수찬 李惟秀의 書로 인해 상서하여 사직하다. ○ 윤5월, 다시 비국 당상이 되었으나 吳瓚, 鄭漢奎 등의 논핵을 받자 상서하고 還鄕하다.
영조 28 1752 임신 乾隆 17 61 6월, 左議政으로 탁배되자 상서하여 사직하다. ○ 10월, 영의정이 되다. 洪準海의 무함을 받자 사직하고 그날로 出城하다. ○ 12월, 傳禪의 명이 내리자 극력 만류하여 세자를 보호하다.
영조 29 1753 계유 乾隆 18 62 1월, 李惟秀의 무함을 받고 江郊로 나가다. 이후 金尙魯 등이 동궁을 위해하려는 것을 막으며 龍山에 머물다가 淑儀文氏가 翁主를 출산하자 상서하고 하향하다. 이후 47차례나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5월, 체직되어 판중추부사가 되다.
영조 30 1754 갑술 乾隆 19 63 1월, 昭寧園의 추숭을 반대한 李熙運 疏의 張本人으로 몰려 放歸田里되다. ○ 3월, 판중추부사가 되다.
영조 31 1755 을해 乾隆 20 64 3월, 상소하여 무진년 李光佐를 옹호한 것에 대해 自訟하다. 逆獄이 일어나자 삭탈관작, 문외출송되다. ○ 4월, 석방되어 판중추부사가 되다. ○ 5월, 正刑당한 역적 尹惠의 首級을 친람하지 말 것을 청하여, 忠州에 중도부처되다. ○ 판중추부사에 서용되었으나 사은하지 않다. 申致雲의 供招에 이름이 거론되어 대명하다. ○ 9월, 군자감 도제조가 되다.
영조 32 1756 병자 乾隆 21 65 12월, 親鞫에 참여하다.
영조 33 1757 정축 乾隆 22 66 仁元王后가 승하하자 喪禮에 대해 헌의하다. ○ 상차하여 약원 도제조와 태상시 제조를 사직하다.
영조 34 1758 무인 乾隆 23 67 3월, 부친의 문집을 增修하다. ○ 8월, 영중추부사가 되다. 세자가 석고대죄하자 明政殿에 입시하여 大朝와 小朝가 일체임을 진달하며 세자 보호에 힘쓰니 엄한 교지를 받고 파직되다. ○ 9월, 다시 영중추부사에 서용되다.
영조 35 1759 기묘 乾隆 24 68 1월 12일, 會洞에서 졸하다. ○ 3월 25일, 豐德 鵲谷에 장사 지내다.
영조 45 1769 기축 乾隆 34 - ‘孝剛’으로 시호를 내리다.
정조 12 1788 무신 乾隆 53 - 시호를 ‘文忠’으로 고쳐 내리고 致祭하다.

기사전거 : 年譜, 神道碑銘(李裕元 撰),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집 및 간행

 

저자는 白沙 李恒福의 5대손으로 少論의 명문 출신이다. 그러나 준론(峻論=바르고 엄숙하면서도 날카로운 언론)에 속하였기 때문에 영조 시기 완론(緩論 : 느슨하고 더딘 것)을 위주로 한 탕평정치에는 맞지 않았고, 莊憲世子의 보호에 적극적이었으므로 정조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인정을 받고, 1900년에 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자의 사후 詩文을 수집, 편차한 이는 양자(養子)인 이경륜(李敬倫)이다. 본집 권1에 실린 〈史局觀月…〉 詩의 마지막에 李敬倫이 쓴 識를 보면 이경륜이 원고를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집의 시는 1725년도부터 1748년까지의 작품만 실려 있고, 소차와 편지 등의 문은 1757년경까지 실려 있다.

 

또 편지와 詩句 중에 종종 缺句가 있고, 다른 문집에 나타나는 글이 제대로 실려 있지 않은 것을 볼 때 유문의 수집과 보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年譜 또한 이경륜이 정리한 것이다. 1788년 저자의 시호가 ‘文忠’으로 개시된 이후 正祖가 이경륜을 불러 대화한 내용에 의하면, 당시까지도 행장이나 신도비는 없이 단지 이경륜이 草한 墓誌와 年譜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연보를 들여와 등사해 둘 것을 명하면서 다른 볼 만한 책자의 유무를 물었는데 이경륜은 그 외에는 등사해 둔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시까지도 저자의 유문에 대한 정리와 등사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던 듯하다. 현재 규장각(奎1716)에 소장되어 있는 梧川年譜 필사본의 권말에 “不肖孤等泣血識”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이경륜이 올린 연보를 등사한 본으로 보인다.
 

이후 본집을 다시 편차하여 校讐한 사람은 저자의 族玄孫인 李裕元(1814~1888)이다. 이유원이 쓴 서문을 보면, 편집되어 권질을 이룬 채 보관되어 있던 문집 약간 권을 校讐하였는데 疏章 등 公車文이 많고 일반적인 詩文은 적었다고 한다. 서문을 쓴 시기는 관직이 奉朝賀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대략 1881년 이후인 듯하다.

 

이유원은 말년에 본집을 校讐하면서 후에 자손들이 간행하기를 기대하였는데, 본집은 시와 편지의 상태로 볼 때 거의 刪節을 행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저자의 시문을 모두 수록하여 문체별, 연도별로 정리한 단계이므로 간행을 위한 정고본으로서는 아직 많은 손질이 필요한 듯하다.

 

그러나 1900년까지 부록의 보충만 이루어졌을 뿐 재편차나 간행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本家의 6대손인 李健榮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유원은 문집의 정리뿐만 아니라 저자의 신도비도 작성하고 또 蕉泉 鄭文升과 함께 묘비를 세우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鄭文升은 저자의 5대손인 李裕承의 외조부이고 본집을 家藏하고 있던 李健榮은 이유승의 아들이다.
 

위의 李裕元 校讐本을 1936년 朝鮮史編修會가 史料採訪 사업의 일환으로 수집하여 1937년 등사본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D3B-312)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는 1917년부터 사료 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는데 1925년부터는 조선사편수회관제를 설치해 사료 채방의 내규를 작성하고 1938년까지 약 4950책을 수집하였다.

 

이때 각 지방의 名族과 舊家에 비장된 史料를 차입하여 1623책의 複本을 작성하였는데, 이 시기에 많은 문집의 등사본이 작성되었으며 본집도 이때 수집되어 등사된 것이다. 당시 복본의 등사 규정은 종이와 行字, 缺字와 교정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규정을 마련하여 최대한 원본의 형식과 체제를 보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본 등사본은 원본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집은 총 20권 12책인데 각 책의 끝에는 史料의 採訪者, 所藏者, 謄寫者, 校訂者, 최종검열자, 원본의 상태, 비고 등을 나타내는 인장이 찍혀 있다. 즉 昭和 11년(1936) 黑田省三이 京畿道 長湍에 있는 李健榮이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을 빌려서 1937년 中村榮孝의 검열 하에 등사한 복본이다.

 

등사는 여러 명이 나누어 단기간에 끝낸 듯한데, 金鎭旭, 李肯馥, 吳禧善, 金定鉉, 鄭成源 등이 참여했으며, 교정은 洪元杓, 趙承祜가 맡았다. 따라서 현재 본집의 원본은 李健榮 家에, 등사본은 국사편찬위원회(D3B-312)에 소장되어 있다.
 

본집의 저본은 1880년대에 李裕元이 校讐한 필사본을 1937년 조선사편수회에서 등사한 사본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이다.

기사전거 : 年譜, 序(李裕元 撰), 神道碑後識(李裕承 撰),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시인사 편) 등에 의함

 

저본의 구성과 내용.

본집은 원집 15권과 부록 5권 합 1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두에 李裕元이 쓴 서가 있다.
권1은 총 210여 題 366수의 시가 실려 있다. 1725년부터 1748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말년의 작품은 유실된 듯하다.

 

<鵞谷酬唱>은 1725년 부친을 따라 이사갔던 振威 鵞谷에서 부친, 형제들과 수창한 시이다. 家藏되어 있던 「鵞谷酬唱詩帖」에서 저자의 시만 발췌하여 편차하면서 따로 제목을 붙이지 않고 〈鵞谷酬唱〉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아들 李敬倫이 저자의 詩稿를 수집하면서 붙인 듯하다.

 

또 1728년작인 <史局觀月…>에도 이경륜의 지가 실려 있는데 당시 함께 聯句를 지었던 宋寅明, 趙顯命, 鄭羽良, 저자가 모두 재상이 되었고 추후에 차운한 尹淳은 재상이 되지 못하였다면서 일조의 詩讖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후의 北行錄은 1729년 咸鏡道 慰諭御史로 나갔을 때 지은 시 40여 수가 실려 있는데, 永平, 安邊, 咸山, 鍾城, 洪原 등 북도 일대를 돌아보며 지은 것으로 기생과 관련된 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시를 주고받은 대상은 白下 尹淳, 고종사촌인 靈城君 朴文秀, 少論의 선배인 李德壽, 徐宗玉, 趙顯命, 李眞淳, 鄭來僑, 李喆輔, 后溪 趙裕壽 등으로 대부분 같은 소론 출신들이다. 이 외에 英祖가 지은 御製詩에 저자와 동료가 賡韻한 시도 있다.

 

北營酬唱錄은 함경도 관찰사 때의 작품으로 任㙫, 鄭純儉과 수창한 시 등 모두 50여 제가 실려 있다. 도내의 명승지를 읊은 것이 주 내용이다. 본 詩錄이 끝난 뒤 〈眞殿端陽…〉 이하 9제는 모두 拾遺인데, 이유원의 재편차 때에 보충된 것인 듯하다.

 

권2~8은 疏箚 215편이 실려 있다. 소차는 이유원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본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저자는 소론의 촉망받는 인재였지만 준론이었던 까닭에 영조의 탕평책과 타협하지 못해 주로 관찰사 등의 외직으로 떠도는 시기가 많았으며, 1748년의 戊辰疏 이후에는 노론의 집중적인 공척을 받아 거의 중앙 관직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권2는 1727년의 <辭兼說書疏>부터 趙鎭禧의 무함을 받고 사직한 1730년의 <辭校理疏>까지 26편이 실려 있고, 권3은 1730년~1734년까지 옥당과 이조의 관직을 역임할 때 올린 사직소와 차자 40편, 권4는 1734년~1735년에 올린 引嫌疏와 箚子 22편이다.

 

권5는 1736년~1741년 당론에 휩쓸려 고전하던 시기의 상소 34편이며, 권6은 1741년~1746년에 올린 사직소 41편이다. 권7은 1747년~1752년 觀察使나 留守 등 외직으로 나돌던 시기의 소가 있고 일명 戊辰疏라고 불린 <到城外辭大司憲疏>가 있다.

 

이는 저자가 平安道 觀察使에서 대사헌에 제수되자 성 밖에까지 와서 올린 짧은 소인데 당시 三司에서 관작추탈의 논계를 받고 있던 趙泰億과 李光佐를 구원한 내용으로 특히 이광좌에 대해 袒免의 친족이며 師表의 義가 있다고 칭하여 물의를 일으킨 상소이다.

 

이로 인해 말년까지 노론의 공격을 받았고, 乙亥獄事가 일어나던 해에는 李光佐를 부인하는 自訟을 올리기도 했다. 권8은 1752년~1757년에 올린 25편으로 주로 좌의정, 영의정을 사직하며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힘쓰는 내용이다.

권9는 啓(12), 議(22), 玉堂故事(4), 序(2), 記(1), 跋(2), 應製文(3)이다. 啓辭는 주로 三司와 政院에 있을 때 올린 것으로 관리의 추고나 체차 등을 청한 내용이며, 議는 왕실의 祭禮와 喪禮의 典式에 대한 것이 많고, 이 외에 祝式儀, 服色, 죄인에 대한 참작 등이 있다.

 

옥당고사는 1728년 홍문관 정자 때에 儒臣을 자주 인접할 것을 청한 글 2편과 1731년, 1732년에 議獄의 관대한 처리, 「中庸」 강론을 청한 글이다. <原任大臣樞府題名錄序>는 仁祖 이후 중추부에 임명되었던 대신들의 인명록을 만들고 지은 서이며, <潛窩遺稿序>는 李恒福의 문인이었던 李命俊의 문집에 대한 서이다.

 

또 평양 관찰사 시절 지은 <正陽門重修記>, 저자의 모친이 淑安公主(孝宗女)를 위해 쓴 「飛花詠冊」에 대한 跋 등이 실려 있다. 잡저는 1744년의 頒敎文 2편과 영조가 耆老社에 든 것을 축하하는 왕세자의 箋文 1편이다.

 

권10~12는 神道碑銘(7), 墓碣銘(6), 墓誌銘(5) 墓表(4), 行狀(1), 遺事(1) 등의 묘도문자이다. 저자는 숙종조 少論의 거두였던 趙持謙과 韓泰東의 신도 비명을 나란히 쓴 취지를 司馬遷이 屈原賈誼列傳을 함께 쓴 것에 비의하면서 두 사람 모두 黨論을 통해 廉恥를 확립하고 權貴를 두렵게 했다고 평가하였다.

 

또 조지겸의 신도비명에서도 老少論의 분열과 붕당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면서 붕당이 名節을 유지하여 曺操와 같은 세도가의 욕망을 억제시켰다고 당쟁의 순기능을 인정하였다.

 

이 외에 저자가 묘도 문을 지은 尹趾仁, 鄭栻, 朴聖漢, 林象德, 尹淳, 徐命均 등도 모두 少論系 인물이다. 선조인 李正臣, 족질인 李成坤, 외형인 朴文秀에 대한 묘도문도 있다. 권12는 부친인 李台佐의 행장과 모친의 言行錄이다.
 

권13은 祭文(39)인데 祖父와 부친 대신 지은 제문이 12편이고 賜祭文, 祈雨祭文 등이 4편이다. 洪泰猷, 崔昌大, 李肇, 尹熙啓, 趙泰耈, 尹淳, 朴文秀 등에 대한 글로 묘도문과 중복되는 대상이 많다.

 

권14는 편지 80여 편으로 1728년 부친에게 올린 편지부터 1756년 鄭東明에게 보낸 글까지 인물별로 편차되어 있다. 저자의 지위나 교유 등을 고려해 볼 때 예상보다 편지도 적고 대상도 한정되어 있어 유고의 수습이 제대로 안 되었거나 분실이 있었던 듯하다.

 

趙顯命의 「歸鹿集」이나 申維翰의 「靑泉集」, 沈錥의 「樗村集」 등에는 저자에게 답한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본집에는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편지의 대상은 昆侖 崔昌大의 孫인 崔弘簡(聖可)ㆍ崔弘靖, 鄭東游, 鄭東明, 沈澕鎭, 朴文秀, 부친과 조카 李敬一, 韓宗濟 등이다.

 

내용은 대부분 짤막한 안부 편지나 喪을 당한 데 대한 위문 편지, 문집의 편간에 대한 의논 등이다. 특히 崔聖可와의 편지가 19편으로 가장 많은데 時事와 신변, 처세, 疏箚에 대한 의논이 대부분이다.

 

고종형인 朴文秀와의 편지는 良役의 폐단 및 변통의 어려움을 논하면서 肅宗 이래로 양역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일 등을 설명하고 있다. 李敬一에게 보낸 편지는 학문을 권면하는 내용과 「白沙集」의 교정에 관한 글이다.

 

저자는 「白沙集」에 대한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고자 晉州本과 江陵本을 취합하여 새로이 편차하였는데, 이때 간행되지 못하고 훨씬 후대인 1846년에야 간행되었다.

 

권15는 家範이다. 저자가 조부인 李世弼의 禮說을 기반으로 일상적인 家禮와 처세술, 吉凶의 變禮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글이다. 자손들에게 보이기 위해 쓴 것이므로 여러 가지 事例 위주로 알기 쉽게 정리하였는데, 栗谷, 明齋의 설을 인용하여 그 학통을 알 수 있다.

 

조부인 龜川 李世弼은 尹拯의 문인으로 明齋의 禮書를 편찬하였는데 저자가 忠淸道 觀察使 시절에 이를 간행하였다. 附錄은 모두 5권으로 권1~4까지는 아들 李敬倫이 찬한 年譜이다. 출생부터 사후 正祖가 賜祭文을 내린 1796년까지의 기사가 연도별로 立朝 사실을 위주로 작성되어 있고, 권말의 繼考는 후에 누군가의 筵說을 참고하여 보충해 놓은 것인 듯하다.

 

권5는 李裕元이 지은 神道碑銘과 告墓文, 이경륜이 지은 墓誌, 洪良浩가 쓴 龍灣紀惠碑가 실려 있다. 저자가 北道의 慰諭御史와 觀察使 등으로 나가 民弊를 시정하고 軍制를 개편하여 혜택을 끼친 바가 있었기 때문에 후에 관찰사를 맡은 洪良浩가 지어 기린 것이다.

 

또 賜祭文과 祭文, 哀辭, 저자에게 내린 敎諭文, 莊祖(莊憲世子) 묘정에 배향하게 된 전말을 쓴 繼考와 配享文 등이 실려 있다.

 

필자 : 김성애(金成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