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12. 21
↑제정집 초간본 표지
제정집 서문(霽亭集序) - 이인행(李仁行)
제정(霽亭) 이 문정공(李文靖公)은 고려 말의 명유(名儒)이다. 대대로 명망이 있고 문장으로 이름난 가문 출신으로서 18세에 장원 급제를 하였으며, 사한(史翰)ㆍ정언(正言)을 거쳐 국자 좨주(國子祭酒), 이부 판사(吏部判事)에 올랐으니 모두 가장 훌륭한 선발이었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팔관회(八關會) 유사(有司)가 손을 씻는 장막을 설치하고 울타리를 세워 안팎을 갈라놓았다. 공이 호부상서(戶部尙書)로서 울타리를 철거하도록 지시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샀다.
화가 장차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좌우 측근들이 힘써 구명하였고 또 문학(文學)으로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
한 번은 신돈(辛旽)이 술과 여색을 탐하는 것을 면전에서 꾸짖었다가 미움을 받아 파직을 당한 적이 있다.
공이 시속과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으려 한 것이 이와 같다.
화가 장차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좌우 측근들이 힘써 구명하였고 또 문학(文學)으로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 한 번은 신돈(辛旽)이 술과 여색을 탐하는 것을 면전에서 꾸짖었다가 미움을 받아 파직을 당한 적이 있다. 공이 시속과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으려 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신의 보잘것없는 마음은 한시도 왕실을 잊은 적이 없으니, 밝은 창가 책상에 조용히 앉아 삼가 한 가락 향을 피우고 보록(寶籙)과 요도(瑤圖)가 만년토록 이어지기를 늘 축수하였습니다.”
공이 시대를 걱정하고 우국 애민(憂國愛民)하는 마음이 언표(言表)에 흘러넘치니, 공이 지은 글을 읽고 공이 살던 시대를 논해 보면 공의 심사(心事)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사(麗史)》의 명신 전(名臣傳)을 본 적이 있는데 공의 몰년은 우왕(禑王) 11년(1385)이었다.
우리 예조(藝祖)께서 임금으로 즉위한 초기에 특별히 공의 자손들은 모두 이름에 ‘입(立)’ 자를 쓰도록 명하였다. 이는 대개 함주(咸州 지금의 함흥)의 전별 자리에서 환조(桓祖)의 뒤에 서 있었던 일을 기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공이 지은 시편과 〈애오잠(愛惡箴)〉ㆍ〈척약재 잠(惕若齋箴)〉 등을 보니, 혼란한 시대에 의연하게 홀로 우뚝 선 것을 여전히 한두 가지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러하니 공은 거센 물결 속에 우뚝 선 지조로 당시 성의(聖意)를 깨끗하게 하였고, 뒤를 잇는 후진들로 하여금 말의 지표를 삼게 함으로써 나약한 자를 강하게 세우는 풍속이 백세토록 실추되지 않도록 한 자가 아니겠는가.
당숙부인 익재(益齋) 선생은 공의 문장을 자주 칭찬하였다. 익재공은 국사(國史)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병폐로 여기고, 공 및 백문보(白文寶) 공과 분담하여 본기(本紀)ㆍ연표(年表)ㆍ열전(列傳)을 작성하였다.
익재공은 국초부터 시작하여 숙종(肅宗)까지 집필하였는데, 예종(睿宗) 이하는 실제로 공과 백공이 찬술 한 것이었다. 당세의 문형이 가까이 친족으로 있으면서 평소 공을 인정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공의 입덕(立德)과 입언(立言)은 참으로 우주 사이에 빛나서 불후하게 전해질 것이었기에 공의 전집(全集)이 일찍이 춘천부에서 간행되었다.
그 이후로 100년 사이에 병화(兵火)를 겪으면서 자손들은 경향(京鄕) 각지로 흩어져 원본을 보존한 자가 없었다. 후손 승선 공(承宣公) 이덕배(李德培)가 《동문선(東文選)》과 《여지 승람(輿地勝覽)》 등의 책에서 공이 지은 시문을 수집하여 손수 한 질을 정사(淨寫)해서 책 상자에 보관해 두고 원본이 혹여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문중의 어른 이종재(李宗梓) 씨가 종중에 논의하기를, “기(杞)ㆍ송(宋)처럼 고증할 만한 문헌이 없어지는 것은 세대가 오래될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병화로 타고 남은 것을 수습해 놓은 것도 세월이 지나면 없어지고 말까 걱정입니다. 다시 문집을 간행하여 후대에 널리 전하도록 합시다.”하였다.
그러고는 족제(族弟)인 이능재(李能梓)를 보내어 나에게 권두의 글을 지어 달라 하였다. 나는 병이 들어 정신이 혼미하고 글솜씨도 보잘것없어 그 부탁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여러 차례 사양을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답하기를, “공이 조정에 있을 때의 큰 절개는 국사에 실려 있고 경세의 문장은 《동문선》과 《여지승람》 등에 산견되고 있으니, 이 보잘것없는 후인의 서술이 진실로 필요치 않다.
그러나 이처럼 효성스러운 자손들이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으로 문집 원본이 전해지지 않음을 가슴 아파하고 다시 문집을 간행해서 원근 각지에 배포하려는 뜻은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이에 서문을 쓴다.
금상 32년 임진년(1832) 황화절(黃花節 중양절)에 진성(眞城) 후인 이인행(李仁行)이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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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
[주-01]팔관회(八關會) : 고려 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행사로 매년 행해졌다.
팔관회 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은 사방에 향등을 달고 2개의 채붕(綵棚)을 세워 장엄하게 장식하는 등 불교와 민속적 요소가 합치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유학자들, 특히 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들은 조정에서 팔관회를 거행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주-02]신돈(辛旽) : ?~1371. 고려 말기의 승려로, 성은 신(辛), 자는 요공(耀空), 법명은 편조(遍照)이다.
이름 돈은 집권 후에 정한 속명이며, 법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공민왕에게 등용되어 국정을 장악하고, 전제를 개혁하는 등의 정책을 폈으나, 후에 왕을 시해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주-03]한번은 …… 있다 : 1366년(공민왕15)의 일이다. 이달충은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신돈에게 “사람들이 하는 말이 상공께서는 주색을 좋아하신다더군요.”라고 말하였다가 신돈의 미움을 사서 파면되었다.
《高麗史 卷112 李達衷列傳》
[주-04]사직을 청하는 전문(箋文) : 《제정집》 권2 〈계림 부윤으로 부임한 후에 다시 사직을 청한 표문〔鷄林赴任後再辭表〕〉을 말한다.
[주-05]전쟁 : 1359년(공민왕8)과 1361년 두 차례 있었던 홍건적의 침입을 말하는 듯하다.
특히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공민왕은 경상북도 안동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주-06]보록(寶籙)과 요도(瑤圖) : 국가와 왕실을 말한다. 보록은 중국 전설에 봉황이 황제(黃帝)와 제요(帝堯)에게 전해 주었다는 예언서이며, 요도는 왕실의 족보이다.
[주-07]여사(麗史)의 명신전(名臣傳) : 《여사》는 홍여하(洪汝河, 1620~1674)가 지은 《휘찬여사(彙纂麗史)》를 말한다. 모두 47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6은 세가(世家), 권7~19는 지(志), 권20~46은 열전(列傳), 권47은 외이부록(外夷附錄)이다.
이 중 권22~37이 명신열전(名臣列傳)이며, 〈이달충열전(李達衷列傳)〉은 권31에 수록되어 있다.
[주-08]예조(藝祖) : 개국 제왕(開國帝王)을 통칭하는 말로, 여기서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가리킨다.
[주-09]환조(桓祖) : 1315~1360.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로 이름과 자는 자춘(子春)이다.
1394년(태조3) 태조의 4대조를 추존할 때 환왕(桓王)으로, 태종 때 다시 환조로 추존되었다.
[주-10]우리 …… 것이다 : 이달충은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 돌아올 때 환조(桓祖)로부터 전별연을 받았다. 이때 태조가 환조 뒤에 서 있었는데, 이달충은 태조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환조가 술을 부어 주자 이달충은 서서 마셨는데, 태조가 술을 올리자 꿇어앉아 마셨다.
환조가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자, 이달충은 태조로 인해 가문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 하고는 태조에게 자신의 자손들을 부탁하였다.
태조는 즉위한 뒤 이달충이 당시 서서 술을 마셨던 일을 기리기 위해 이달충 자손들의 이름에 ‘입(立)’ 자를 쓰도록 명했다고 한다. 《高麗史 卷112 李達衷列傳》 이달충의 아들은 준(竴), 전(竱), 수(䇕), 횡(竑)으로, 실제로 이름에 모두 ‘입(立)’ 자가 들어 있다.
[주-11]애오잠(愛惡箴) : 《제정집》 권2에 수록되어 있다. 공자가 “인(仁)한 사람이어야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에서 취의한 글인데, 좋아함과 미워함이 어지러울 때는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주-12]척약재잠(惕若齋箴) : 《제정집》 권2에 수록되어 있다.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의 서재에 붙인 글로 “나아갈 때에는 물러설 줄을 알고, 편안할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라고 하여, 난세에 대처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주-13]익재(益齋) :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을 가리킨다. 익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중사(仲思), 또 다른 호는 역옹(櫟翁)ㆍ실재(實齋)이다. 고려 말 원과 고려를 오가며 벼슬을 하였으며, 지공거를 두 차례 맡는 등 당대 문형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전파하고 고문을 부흥하는 데 기여하였다.
만년에 백문보(白文寶)ㆍ이달충(李達衷)과 함께 국사(國史)를 편찬하려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익재집》, 《역옹패설(櫟翁稗說)》 등이 있다.
[주-14]백문보(白文寶) : 1303~1374.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직산(稷山), 자는 화부(和夫), 호는 담암(淡庵)ㆍ동재(動齋),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춘추 검열(春秋檢閱)을 거쳐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1373년(공민왕22) 우왕이 대군이 되어 취학하자 전녹생(田祿生)ㆍ정추(鄭樞)와 함께 그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졌다. 《동문선》에 약간의 시문이 전한다.
[주-15]입덕(立德)과 입언(立言) : 덕을 세우는 것과 훌륭한 말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공을 세우는 것인 입공(立功)과 함께 ‘삼불후(三不朽)’로 불린다. 춘추 시대 사람인 숙손표(叔孫豹)는 입덕과 입공과 입언을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세 가지라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24年》
[주-16]전집(全集)이 …… 간행되었다 : 《제정집》은 조선 세종 때 이달충의 손자로 강원 도사를 지낸 이영상(李寧商)에 의하여 춘천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주-17]이덕배(李德培) : 1598~? 본관은 경주, 자는 후재(厚哉)이며, 아버지는 이종길(李宗吉)이다.
1639년(인조17) 기묘 식년시에 병과(丙科) 6위로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
[주-18]기(杞) …… 것 : 문헌(文獻)이 남아 있지 않아 전통을 고증할 수 없음을 말한다.
기는 주 무왕(周武王)이 하(夏)나라 우(禹)의 후손인 동루공(東樓公)을 봉해 준 나라 이름이고, 송(宋)은 주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주벌하고 주왕의 서형(庶兄)인 미자(微子) 계(啓)를 봉해 준 나라 이름이다.
공자는 하나라와 은나라의 예제(禮制)를 고증하려 하였으나, 이 두 나라를 계승한 기와 송의 문헌이 없어서 고증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論語 八佾》
[주-19]이인행(李仁行) : 1758~183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공택(公宅), 호는 만문재(晩聞齋)ㆍ일성(日省)ㆍ신야(新野)이다.
1790년(정조14)에 응제 대책(應製對策)으로 온릉 참봉(溫陵參奉)에 발탁되었고, 벼슬이 세자익위사 익위(世子翊衛司翊衛)에 이르렀다. 저서에 《신야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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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霽亭集序[李仁行]
霽亭李文靖公,麗季名儒也。以奕世文翰之閥,年十八,擢上第,由史翰、正言,歷敭國子편001祭酒、吏部判事,皆極選也。性剛直不撓。恭愍朝,八關會有司,設盥洗幕,豎藩限內外。公方長地部,令撤其藩,觸上怒。禍將不測,賴左右力救,且以有文學重望得解。嘗面斥旽髠好酒色,爲所中見罷。其不欲諧世苟容如此。卒官鷄林尹,其辭箋曰:“兵興以來,臣無所贊襄,退處山林有年。區區之心,未嘗不在王室,明窓편002靜几,敬焚一炷之香;寶籙、瑤圖,恒祝萬年之筭。” 傷時憂愛之意,溢於言表,讀公之편003書,論公之편004世,可以想公之心事矣。嘗見편005《麗史ㆍ名臣傳》,公之沒,在편006辛禑十一年。逮我藝祖龍興편007初,特命公子孫皆名以立字。蓋志咸州餞席,立在桓祖後事也。然今以公言志諸作及《愛惡》、《惕若》等箴看之,其毅然有以自立於昏亂之世者,猶可想見一二,則安知非屹편008立頹波之志節,有摡於當日聖意,而要使爲後承者,名言在玆,勿墜其百世立懦之風者耶?堂叔父益齋先生,蓋亟稱公之文章。嘗病國史不備,與公及白公文寶,分作紀、年、傳。益齋起國初至肅宗,自睿宗以下,公與白公實撰之。當世文衡,近齟堂,而平日見賞若是,則其立德立言,固有以炳烺宇宙,傳示不朽,而公之全集,嘗鋟板於春川府。百年兵燹之餘,子孫分散京鄕,無有能保守元本者。後孫承宣公德培,蒐輯於《東文選》、《輿誌》諸書,手寫一帙,藏之巾衍,以竢元本之或出焉。至是門老宗梓氏議宗中曰:“杞、宋之無徵,旣世久而益甚。煨燼之綴拾,又懼日遠而浸缺。重謀繡棗,以廣其傳。” 使편009族弟能梓來求弁卷之文。自惟病昏詞萎,不堪是寄,旣屢辭不獲,則遂復之。曰:“公之立朝大節,載之國乘,經世文章,散見於《東文選》、《勝覽》等書,固不待區區後人之敍述,而乃若慈孫追遠之誠,傷鋟板之失其편010傳,圖重印以布遠邇편011之意,則不可以無識也。” 於是乎書。
上之三十二年壬辰黃花節,眞城後人李仁行,謹書。
[편-01] 國子 : 《新野集ㆍ霽亭李公遺卷序》에는 “成均”.
[편-02] 窓 : 《新野集ㆍ霽亭李公遺卷序》에는 “牕”.
[편-03] 公之 : 《新野集ㆍ霽亭李公遺卷序》에는 “其”.
[편-04] 公之 : 上同.
[편-05] 見 : 《新野集ㆍ霽亭李公遺卷序》에는 “觀”.
[편-06] 之沒在 : 《新野集ㆍ霽亭李公遺卷序》에는 “卒於”.
[편-07] 興 : 《新野集ㆍ霽亭李公遺卷序》에는 뒤에 “之”가 더 있음.
[편-08] 屹 : 《新野集ㆍ霽亭李公遺卷序》에는 “特”.
[편-09] 使 : 《新野集ㆍ霽亭李公遺卷序》에는 뒤에 “其”가 더 있음.
[편-10] 其 : 《新野集ㆍ霽亭李公遺卷序》에는 “於”.
[편-11] 邇 : 《新野集ㆍ霽亭李公遺卷序》에는 “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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