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 고려국 고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이공묘지
(大元 高麗國 故 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李公墓誌)
칙수 장사랑 전 요양로 개주판관 최해 찬
(勅授 將仕郞 前 遼陽路 盖州判官 崔瀣 撰)
사람은 음(陰)과 양(陽)의 기운을 타고 태어나게 되는데, 살아 있을 때는 기(氣)가 모인 것이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 그 사이에 궁박함과 현달함, 뜻하는 것을 얻음과 잃음, 수명의 길고 짧음, 더디 죽고 빨리 죽음은 또한 각자 타고난 바를 따르는 것이라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만약에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 채 더 이상 수양을 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초목과 똑같이 썩어 없어져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사라지고 말 것이니, 또 이른바 천지 사이에 참여하고 만물 가운데 가장 신묘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예로부터 몸이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은 덕(德)이 아니면 공(功)이라 하겠다. 예컨대 태산(泰山)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지만 구름이 조금씩 일어나서 비가 오면 그 혜택이 사해(四海)에 두루 미치는 것을 사람들이 아니, 이것을 덕이라 한다.
일의 중요한 기회를 만나서 우레와 바람처럼 세차게 일어나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제하여 사직(社稷)을 이롭게 하는 것을 공이라 한다. 이렇게 될 경우 그 몸은 죽더라도 그 도(道)는 더욱 드러날 것이요,
그 일은 까마득히 멀어져가도 그 이름은 더욱 빛을 발하여 천 년 뒤에라도 일월(日月)과 빛을 다투게 될 것이니, 어찌 평소 출처(出處)의 쉽고 어려움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나이가 들었으므로 그동안 본 것이 많다. 바야흐로 권세가 등등하여 부럽기도 두렵기도 한 것을 보다가도 미처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쇠잔해 없어져 버려 미처 그가 행한 업적을 물어볼 겨를이 없으니, 모두 슬픈 일이다.
삼한(三韓)의 재상인 이공은 평소 온 나라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오던 분이며 내가 또 일찍이 공의 문객(門客) 이었으니, 무슨 일이든 꺼리지 않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마침 공의 아들이 나를 찾아와 무덤길에 묻을 글을 청하였으니 어찌 감히 자중하여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공이 처음 벼슬을 한 것은 충렬왕 때였는데, 태위왕(太尉王=충선왕)이 이미 공을 끌어다가 요속(僚屬)으로 삼았고 이어서 오랫동안 수행하는 일을 맡겨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금왕(今王=충숙왕)의 지우(知遇)를 입으면서는 특별히 정부(政府)에 두어 문학(文學)의 관직으로 대우하고 공과 더불어 통치의 도를 논하였다.
왕위가 바뀌어 전왕(前王=충혜왕)을 만났으나 이전의 직임을 다시 그대로 맡았다. 모두 네 임금을 섬기는 동안 전날과 다름이 없이 매번 총애를 받았으니, 문장과 풍류가 임금을 감동시킬 정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언충(彦冲), 자는 입지(立之)이며, 선대는 청주(淸州)의 전의현(全義縣) 사람으로서, 국가 근세의 명재상인 문장공(文莊公) 휘 혼(混)의 조카이다. 고(故) 응양군 대장군(鷹揚軍大將軍) 휘 천(仟)과 고 직문한서(直文翰署) 증(贈) 대사성(大司成) 휘 자원(子蒝)은 공의 조부와 부친이며,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으로 봉해진 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김유선(金惟銑)의 따님은 공의 모친이다.
공은 임진년(1292, 충렬왕 18)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장원하였고 또 갑오년(1294, 충렬왕 20) 과거에 급제하였다. 내시부(內侍府)에 들어가 흥신궁 녹사(興信宮錄事)가 된 이래 누차 자리를 옮겨 군부좌랑(軍簿佐郞), 정헌대부(正憲大夫) 대사성 진현관제학 지제교(大司成進賢館提學知製敎), 통헌대부(通憲大夫) 검교선부전서 행전의령(檢校選部典書行典儀令), 평양도존무사 행 평양윤(平壤道存撫使行平壤尹), 경상도진변사 행 김해목(慶尙道鎭邊使行金海牧)을 지냈으며, 내직(內職)으로 옮겨와 개성부윤(開城府尹)이 되었다가 좌상시 판선공시 밀직부사 상호군(左常侍判繕工寺密直副使上護軍),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 첨의평리 예문대제학 지춘추관사(政堂文學僉議評理藝文大提學知春秋館事)가 되었다. 이상은 공이 평생 동안 역임한 관직이다.
화평군부인(化平郡夫人)에 봉해진 김씨(金氏)는 고(故) 첨의평리(僉議評理) 휘 희(禧)의 따님이고, 강녕군부인(江寧郡夫人)에 봉해진 홍씨(洪氏)는 지금 왕경등처순군만호(王京等處巡軍萬戶) 수(綏)의 따님인데, 이들은 공의 두 부인으로 김씨가 전처이고 홍씨가 후처이다.
전(前)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 광기(光起), 전 □□위 낭장(衛郞將) 광익(光翊), 전 전의시주부(典儀寺主簿) 사걸(俟傑), 이제 성동(成童)이 된 상원(上元), 겨우 10세 된 삼보(三寶)는 공의 아들들이다.
현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민상정(閔祥正), 관고려군천호(管高麗軍千戶) 이을년(李乙年), 전(前) 비순위 별장(備巡衛別將) 원후(元詡), 창릉직(昌陵直) 윤희보(尹希甫)는 공의 사위들이다. 또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린 세 딸이 있다.
계유년(1273, 원종 14) 월일에 태어나 무인년(1338, 충숙왕 복위 7) 계해월 경술일에 졸하였고, 이해 을축월 정유일에 장사를 지냈다. 명은 다음과 같다.
군자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 見君子之未亡(견군자지미망)
신령스런 기운이 양양하여 / 有神氣兮揚揚(유신기혜양양)
복록이 오래 창성할 줄 알았는데 / 謂言福祿久彌昌(위언복록구미창
안타깝게도 군자가 돌아가셨네 / 恨君子之已亡(한군자지기망
하늘의 이치 알아보려 해도 아득할 뿐이니 / 討大空兮芒芒(토대공혜망망
정말이지 인생은 무상하도다 / 信乎人生不可常(신호인생불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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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주-01] 몸이 …… 하겠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4년 조에 “덕을 세우는 것이 최상이요, 공을 세우는 것이 그 다음이요, 말을 세우는 것이 그 다음인데, 이 세 가지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를 일러 썩지 않는다고 한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주-02] 태산(泰山)은 …… 것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희공(僖公) 31년 조에, “바위에 부딪쳐 구름이 나와 조금씩 모여들어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천하에 두루 비를 내리는 것은 오직 태산뿐이다.[觸石而出 膚寸而合 不崇朝而徧雨乎天下者 惟泰山爾]”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주-03]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언충 묘지명(유물 번호 : 本13869, 원제 : 大元高麗國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李公墓誌)에는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으로 되어 있다.[주-04] □□위 낭장(衛郞將)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상기 묘지명에는 ‘흥위위 낭장(興威衛郞將)’으로 되어 있다.[주-05] 성동(成童) : 나이 15세 된 사내아이를 이른다.[주-06] 월일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상기 묘지명에는 ‘정 사월 을묘일[月丁巳日乙卯]’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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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故政堂文學李公墓誌
人稟陰陽以生。生爲氣聚。散則爲死。其間窮達得喪脩短遅疾。亦各因其所稟。無可怪者。苟委其然。不加以脩。則其卒與草木同腐。泯焉無聞。又非所謂參二儀妙万物者矣。古之死而不死者。匪德則功。如大山靜而不動。人知膚寸之興。澤周四海之謂德。事機之會。雷風相盪。振民塗炭。利在社稷之謂功。是則身幽而道彌著。事遠而名愈彰。千載之下。日月爭光。尙何平昔出處險易之足論哉。余老矣。所閱者多矣。方見炎炎赫赫。可愛可畏。曾不旋踵。淪謝已盡。未及問其行業。俱可哀已。越若三韓宰相李公。雅爲一國所稱尙。而余又甞從容後者。宜軫其憚而其孤謁以隧道之文。則安敢自重而拒之乎。公之始仕。在忠烈王時。太尉王已引以爲屬。因久任羇靮之勞。致位高顯。及結今王之知。特置政府。待以文學。與評治道。替遇前王。復仍厥任。凡事四王。每承寵接。勝如前日。自非詞釆風流有動人主。疇克如是耶。公諱彥冲。字立之。先世淸之全義縣人。爲國近時名宰諱混謚文莊公猶子也。故鷹揚軍大將軍諱仟。故直文翰署贈大司成諱子蒝。爲公祖,考也。故檢校軍器監金惟銑之女。封永嘉郡夫人。爲公妣也。公擧壬辰司馬試中魁。又登甲午年第。自入內侍興信宮錄事。累轉軍簿佐郞,正獻大夫,大司成進賢館提學知製敎,通憲大夫檢校選部典書,行典儀令,平壤道存撫使,行平壤尹,慶尙道鎭邊使,行金海牧。內徙開城府尹。改左常侍,判繕二寺,密直副使,上護軍,匡靖大夫政堂文學,僉議評理,藝文大提學,知春秋館事。爲公平日所歷官也。金氏封化平郡。故僉議評理諱禧之女。洪氏封江寧郡。今王京等處巡軍万戶綏之女。爲公兩夫人也。金先而洪繼。前神虎衛中郞將光起。前衛郞將光翊。前典儀寺注簿俟傑。上元方成童。三寶纔十歲。爲公子也。見任僉議贊成事閔祥。正管高麗軍千戶李乙年。前備巡衛別將元詡。昌陵直尹希甫。爲公壻也。又三女處而幼。歲癸酉月▣▣日▣▣。爲公生也。歲戊寅月癸亥日庚戌。爲公卒也。是歲月乙丑日丁酉。爲公葬也。銘曰。見君子之未亡。有神氣兮揚揚。謂言福祿久彌昌。恨君子之已亡。討大空兮芒芒。信乎人生不可常。출처 : 拙藁千百卷之二 /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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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註釋)]
◇계유년(1273) 정 사월 을묘일은 공이 태어난 날이고.....
계유년 정사월은 1273년 4월 달이다. 그런데 4월에 을묘일은 없다. 을묘일은 5월(무오 월) 4일에 있다. 따라서 묘지
원문에 기록된 계유년 정사월 을묘일은 1273년 음력 5월 4일의 착오인 듯하다.
◇지석(誌石)은 묘지석(墓誌石)이라고도 불리며,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板石)이
나 도판(陶板)을 가리킨다. 흔히 묘지(墓誌)라고 하는 것은 지석에 실린 독특한 문체의 글을 일컫는 것으로 지석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지석에 실리는 글은 크게 묘지(墓誌)와 묘명(墓銘)으로 구분된다. 묘지(墓誌)는 오로지 전기(傳記)와 같이 사실만을
적은 산문[서(序)]을 말하며, 묘명(墓銘)이란 적혀진 사실에 논의를 덧붙여 시(詩)로 읊은 운문(韻文)을 말한다. 따라
서 지석에 실린 글 가운데 이 두 가지의 내용이 함께 있을 때에는 묘지명(墓誌銘) 또는 묘지명병서(墓誌銘幷序)라고
부른다.
◇위 묘지명의 기록에 의하면 이언충은 1338년 10월 20일에 별세하여 그 해 12월 7일에 장사를 지낸 것으로 죽은 달로
부터 장사한 달까지 3개월이 걸린 삼월장(三月葬)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품 이상의 일반 사대부 묘역이
일반적으로 지켜졌던 삼월장의 장례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있어 장례기간이 길다는 것은 보다 높은 예우(禮遇)를 의미하는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卷之三 예전(禮典) 상장조(喪葬條)에서는 "四品以上三月五品以下踰月而葬"이라 하여 사품이
상은 3개월이 되어서 장례지내는 삼월장(三月葬)을 지내고, 오품이하는 달을 넘어서 장례를 지내는 유월장(踰月葬)을
지내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의 경우에는 오월장(五月葬)을 행하였었다.
◇원문(原文)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글자이나 서거정(徐居正)의 동문선(東文選)이나 최해(崔瀣:1287∼1340)의 문집(文
集)인 졸고천백(拙藁千百)을 통해 고증하면 다음과 같다.
1)平■府尹 → 平壤府尹
2)■州牧使 → 金州牧使
3)李■年) → 李乙年
◇이언충의 "충"자는 물 수(水) 변이 아닌 얼음 빙(氷) 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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