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에 죽은 누나의 묘표 -동춘당 송준길
상자(殤姊) 묘표
아, 이곳은 내 상자(殤姊)의 무덤이다. 우리 송씨(宋氏)는 은진(恩津)에서 나왔는데,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휘 이창(爾昌)과 증 정부인(貞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가 바로 나의 황고(皇考)와 황비(皇妣)이시고, 증 이조참판 휘 응서(應瑞)와 증 정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가 바로 우리의 조고(祖考)와 조비(祖妣)이시며, 행 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 김공 은휘(金公殷輝)와 숙부인(淑夫人) 해주최씨(海州崔氏)가 바로 우리의 외조부모(外祖父母)이시다.
자씨(姊氏)는 만력 계미년(1583, 선조 16)에 서울 집에서 출생하였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자품(資稟)이 남보다 뛰어났다. 지각이 조금 생기는 나이가 되자, 더욱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갔으며, 성품이 정결하여 더러운 자리에는 잠시도 처하지 않으니, 육친(六親)이 기특히 여겨 매우 사랑하였다.
우리 선비(先妣)의 계부(季父)이신 목사공(牧使公) 휘 공휘(公輝)와 그 부인 단양우씨(丹陽禹氏)가 자씨를 데려다가 기르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공은 온 가족을 거느리고 우리선비의 종형(從兄)이신 사계선생(沙溪先生)이 수령으로 있는 호서(湖西)의 정산현(定山縣)으로 피란하였는데, 자씨는 홍진(紅疹)에 걸려 겨우 10세의 나이로 정산현아(縣衙)에서 죽었으니, 아, 목숨이 짧기도 하다.
그때 부모님께서는 회덕(懷德)의 집에 계셨으므로 서로 영결(永訣)도 하지 못하였으니, 더욱 불쌍하다.
연산(連山) 거정리(居正里)에 묻혔으니, 바로 우리 외조부모의 묘역이다.
자씨가 죽은 지 70여 년 뒤인 숭정(崇禎) 병오년(1666, 현종 7)에 아우 준길(浚吉)이 성묘하러 가서 무덤이 너무 심하게 무너진 것을 보고는 더 오래될수록 더욱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을 크게 우려하여, 흙을 다져 봉분을 만들고, 이어 작은 돌을 세워 내력을 기록하였으니, 후인은 밟아 허물지 말기를 바란다.
아, 나는 이미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형제도 없는데, 죽을 나이에 또 독자마저 잃었으니, 신세가 처량하고 심정이 애통하다. 그러나 죽어서도 앎이 있다면 머지않아 지하에서 서로 모이게 되지 않겠는가. 오직 이것으로 자위할 뿐이다. 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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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問]
殤姊墓表
嗚呼。此我殤姊之墓。我宋出恩津。贈吏曹判書諱爾昌。贈貞夫人光州金氏。卽我皇考妣。贈吏曹參判諱應瑞。贈貞夫人廣州李氏。卽我祖考妣。行僉樞金公殷輝。淑夫人海州崔氏。卽我外祖考妣也。姊氏以萬曆癸未。生於京第。生而姿稟有絶異於人者。稍有知。益加修飭。性潔精。陋汚之席。不忍須臾處。六親奇愛之。我先妣之季父牧使公諱公輝。其配丹陽禹氏。取以育之。壬辰倭變。牧使公擧室避地於湖西之定山。時沙溪先生宰其縣。先生卽我先妣之從兄也。姊氏在縣衙。遘斑疹夭。得年甫十歲。噫短矣。父母方在懷德第。不及相訣。尤可哀也。瘞於連山居正山。卽我外祖考妣兆下也。後七十餘歲崇禎丙午。弟浚吉往省其墳。見其頹圮已甚。大懼愈久愈不克辨認。乃築土以封之。仍立小石以識之。庶後之人毋踐毋夷也。噫。余旣早失怙恃。終鮮兄弟。臨老又喪獨男。身世悲涼。情理痛迫。雖然。死而有知。幾何而不相聚於泉下耶。惟用是自慰。嗚呼悲哉。<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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