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환족(烏丸族)
중국의 용병 혹은 중국의 눈엣가시
목차
◇동호족의 후예
◇모계 중심 사회와 변발
◇후한과의 물고 물리는 각축전
◇《삼국지》의 시대와 함께 부상한 오환
◇조조의 공격으로 몰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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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시대까지 남아 있던 잔존 세력
조조는 서기 206년,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방 원정을 단행하여, 당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유목 민족인 오환족(烏丸族)을 공격해 정복했다. 그가 굴복시킨 오환족은 어떤 집단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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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이라는 이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까마귀(烏) 약(丸)’이란 뜻이 된다. 하지만 오환이란 명칭은 오환족 스스로 불렀던 호칭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자기들 한자에 맞게 옮겨 적은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환’이란 단어의 본래 뜻은 무엇일까? 오환족들은 문자도 없었고 그들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기에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일설에 의하면 ‘오환’은 몽골어로 큰아들을 뜻하는 ‘아오한’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북방 유목 민족들의 맹주였던 흉노족은 임금인 선우의 큰아들을 좌현왕이란 관직에 임명했는데, 그 좌현왕이 다스리던 부족들을 아오한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오환이란 호칭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오환족은 선우의 장남인 좌현왕이 지배한 부족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환족은 본래 흉노와는 다른, 동호(東胡)라 불리던 집단에 속해 있었다. 동호족은 지금의 내몽골 동부와 요동반도 북쪽에 있던 유목 민족인데, 발음상의 유사성으로 보아, 혹시 그들의 본래 이름이 오늘날 러시아 연해주의 소수민족인 퉁구스(Tungus)가 아니었을까?
동호족의 주요 활동 시기는 기원전 3세기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였다. 그들의 서쪽인 내몽골 서부와 현재의 몽골 공화국 지역에는 흉노족이 살았는데, 기원전 209년 흉노의 군주인 모돈선우는 동호족을 멸망시켰다.
이때 흉노족의 공격을 피해 멀리 대흥안령산맥의 남쪽과 북쪽으로 도망친 잔존 세력이 바로 오환족과 선비족이었다. 오환과 선비라는 두 집단은 본래 같은 동호족의 후예인데, 중국인들은 자신들과 가까운 집단을 오환이라 부르고, 먼 집단은 선비라고 불렀다.
역사가 진수가 쓴 역사서인 《삼국지》나 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진서(晉書)》 등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오환족과 선비족은 각각 오환산과 선비 산이라는 산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호칭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좀 억지스러운 해석으로 보이고, 자신들의 이름을 가져다 근거지에 있는 산의 이름을 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오환족의 위치를 나타낸 지도 |
흉노를 피해 동쪽으로 달아났지만, 흉노족은 금세 오환족을 찾아냈고 다시 그들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때 오환족은 흉노 선우의 장남이 다스리는 좌현왕 휘하 부족에 소속되었으며, 오환이라는 이름이 바로 이 시기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오환족은 흉노족에게 매년 가축과 짐승 가죽을 세금으로 바쳤고, 만일 바치지 못하면 흉노족이 어린아이들을 노비로 끌고갔다. 그래서 오환족은 흉노의 지배를 증오했지만, 그들보다 힘이 약하니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무제가 흉노와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면서, 흉노족은 연이어 타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전쟁이 거듭될수록 흉노족은 수많은 백성과 가축들을 잃어 갔고, 예전에 한나라를 위협하고 공물을 받아 내던 수준으로는 도저히 회복하지 못했다. 흉노가 이처럼 한나라와의 오랜 전쟁에서 지치고 쇠약해지자, 이 틈을 타서 오환족은 흉노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려 하였다. 그리고 일연제선우(기원전 85~68년)가 흉노의 군주로 군림하던 시기, 오환족은 흉노 선우들이 묻힌 무덤을 도굴했다. 과거 자신들이 모돈선우에게 짓밟혔던 원한에 대한 복수로 벌인 일이었다. |
비천한 노예에 불과하던 오환족이 감히 성스러운 조상들의 무덤을 파헤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일연제선우는 크게 분노하여, 2만의 군사를 보내 발칙한 오환족을 응징하게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보통 유목민, 그중에서도 특히 군주의 무덤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묘비나 봉분도 쌓지 않고, 그저 시체를 땅속에 묻고는 그 위로 말들을 달려 단단하게 다진다.
그래서 장례에 직접 참석한 유족들이 아니면 무덤의 위치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데, 오환족은 어떻게 흉노 선우들의 무덤을 찾아냈던 것일까? 혹시 일연제선우에게 불만을 품은 흉노 상층부의 내부자가 제공해 준 정보를 받은 게 아니었을까?.
여하튼 흉노족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오환족은 큰 위기에 빠졌다. 쇠퇴해 간다고 하지만 아직도 흉노족은 북방 유목 민족들의 맹주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나라가 범명우 장군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북방 원정을 단행케 했다.
오환족은 졸지에 흉노와 한나라 군대, 양쪽으로부터 번갈아 공격을 받았다. 특히 한나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오환족은 6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큰 타격을 입었다. 분노한 오환족은 그 후 번번이 한나라 국경 지역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는 것으로 보복했다. 하지만 한나라의 방비가 워낙 엄중하여 오환족의 공격은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서기 9년, 한나라의 귀족인 왕망이 스스로 황제가 되어 신(新)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신나라는 얼마 못 가 지방 귀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중국 각지에는 적미군과 녹림군을 비롯한 군벌들이 난립하여 전투를 벌이는 대혼란이 발생했다.
중국이 혼란해져 외부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타, 오환족은 한나라에게 받은 타격에서 서서히 회복해 세력을 기를 수 있었다. 그리고 서기 45년, 오환족은 신나라를 없애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후한의 군대 3000명과 싸워 승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후한 군대를 지휘한 장수는 명장으로 유명한 마원 장군이었으나, 오환족을 막지는 못했다. 이 사건을 사서 《삼국지》에서는 “이기지 못하고 말 1000필을 잃었다.”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중국 군대와 싸워 이긴 오환족은 자신감에 넘쳐 더욱 기세등등해졌으며,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마침내 자신들을 오랫동안 핍박해 왔던 흉노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그들을 내몽골 지역에서 깨끗이 몰아내는 대승을 올렸다. 흉노의 노예 신세에서 이제 완전히 독립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오환족의 자립은 어디까지나 흉노족이 한나라와의 오랜 전쟁으로 쇠약해진 틈을 탄 어부지리의 결과였다. 만약 흉노족이 계속 강성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오환족은 역사에 이름을 걸고 나타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모계 중심 사회와 변발
오환족은 그들의 선조인 동호나 적국인 흉노처럼 전형적인 유목 민족이었다. 그들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면 어쩔 수 없이 중국인들이 쓴 책들을 뒤져 봐야 한다. 배송지란 사람이 주석을 단 역사서인 《위서》에 오환족의 생활양식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오환족은 소와 말, 양 같은 가축을 거느리고 풀이 무성한 초원을 찾아 이동했다. 그들은 흙이나 돌이 아닌, 나무로 만든 뼈대 위에 짐승의 가죽을 덮어 씌운 ‘게르’라는 집에서 살았다. 이 게르는 유사시에 약 30분이면 손쉽게 분해해서 수레에 실을 수 있었고, 이동하며 다니기 편했다.
그들은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으며, 가축이나 사냥한 짐승의 고기와 곡식을 먹고 가축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음료를 마셨다. 단, 그들은 농사짓는 법을 몰라서 곡식은 중국과 교역을 하거나 약탈로 얻어온 것들이었다.
나중에 중국이 혼란기에 휩싸이자 오환족의 영토로 피신해 온 중국인들도 있었는데, 오환족은 그들을 보호해 주는 대신 농사를 짓도록 하여 곡식을 거둬들였다.
오환족은 모계사회의 영향이 강했다. 오환족은 일단 결혼을 하면, 남편이 아내의 집에 가서 집안일을 도와주며 살다가, 2년이 지난 후에야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풍습은 12세기 몽골의 칭기즈칸 때도 똑같이 존재했다. 또한 오환족 남편은 아내의 모든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면 즉시 절을 하는 등 극진한 예의를 갖추었고, 처가에서는 사위에게 여러 가축들을 재산으로 주었다.
오환족은 가정의 모든 일을 결정할 때 아내나 어머니의 뜻에 따랐다. 단, 전쟁과 관련된 일만은 남자들끼리 모여 결정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은 자신을 낳은 친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계모들과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었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조카들을 돌보았다. 이런 형사취수제는 오환족과 가까웠던 고구려에도 있었다.
옷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고, 오환족 남자들은 머리카락 깎는 것을 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아마도 유목민 특유의 머리 스타일인 변발을 말하는 듯하다. 변발이란 초원에 살던 유목민들이 머리카락을 조금만 남겨 두고 모두 깎아 버리는 헤어스타일을 가리킨다. 다른 유목민인 돌궐이나 거란, 여진, 몽골족들도 전부 그런 변발을 했었다.
오환족은 쇠를 이용해 각종 무기나 생활 도구를 만들 줄 알았다. 병에 걸리면 쑥뜸을 뜨거나 아픈 부위를 칼로 찢어 피를 뽑았고, 그래도 안 되면 하늘과 땅과 기타 자연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들은 왕이 없었으며, 대신 대인(大人)이라 불리는 우두머리가 각 집단마다 있었다. 대인은 처음에 덕망이 있는 사람을 골라 뽑았지만, 나중에는 혈연에 따라 상속되었다.
대인들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고,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저지른 자들도 사형을 당했다. 그 밖에 다른 죄를 지은 자들은 사막이나 황무지로 내쫓았다.
서기 49년, 오환족의 대인 학단은 9000명의 오환족과 함께 후한의 수도인 장안을 방문했다. 그리고 후한의 황제인 광무제 유수와 직접 만나 회담을 갖고, 장차 오환족이 다른 유목민인 흉노나 선비의 침공으로부터 후한의 북방을 지키는 용병 노릇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광무제는 학단을 포함한 80명의 오환족 지도자들에게 각각 왕(王)과 후(侯) 같은 작위를 내려 주었다. 또한 요서, 요동, 상곡, 태원, 안문, 어양, 우북평 등 후한의 변방에 오환족이 이주하여 사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환족에게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오환족이 중국 변방의 여러 곳에 분산 거주함으로써, 그들은 흉노처럼 한 명의 강력한 군주가 집단 전체를 다스리는 통일되고 조직적인 유목 국가로 성장하지 못했으며, 서로 다른 대인들을 중심으로 묶인 수많은 파벌들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환족은 전쟁터에서 한나라 황제를 포위하고 한나라의 수도 장안 부근까지 쳐들어가, 그들을 상대로 공물을 받아 낼 정도로 막강했던 흉노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어쩌면 광무제는 이런 결과까지 미리 의도하고 일부러 그렇게 계획을 세웠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여러 대인들이 각자 부족을 이끎으로써 오환족은 통일된 행동을 보이지 못하고 각자 따로따로 활동했다. 예를 들어 중국과 교섭을 할 때에도 서로가 달리 행동하여, 어느 한 부족이 중국과 동맹을 맺으면 다른 부족이 나서서 중국을 상대로 약탈을 저지르는 일이 반복되었다.
학단이 장안을 방문한 지 얼마 안 지난 후한 명제 시절(58~75), 오환족은 벌써 후한에 대해 적대적인 행동을 취했다. 어양에 살던 오환족의 대인 흠지분이 선비족과 연합하여 후한을 적대한 것이다.
그러자 후한의 요동태수 제융은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했다. 후한 안제 시절(106~125)에는 어양과 우북평과 안문의 오환족을 다스리며 솔중왕이라 불리던 오환족 지도자 ‘무하’가 선비족에 이어 흉노족까지 끌어들여 북경 부근 지역인 탁군과 오원을 침략했다.
이에 후한 조정은 2만의 군사를 보내 그들을 격퇴시켰다. 후한의 토벌군이 도착하자 흉노와 선비족은 변방으로 황급히 달아났고, 오환족은 예전처럼 후한과 우호 조약을 맺었다. 한동안 오환과 후한 사이에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계속되었으나, 후한 말기에 후한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점차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그런 가운데 흥미로운 일이 발생했다. 후한에서 중산태수의 벼슬을 지내던 장순이란 사람이 자기를 미천안정왕이라고 칭하면서 요서의 오환족을 찾아간 것이다. 그는 요서는 물론 상곡과 요동의 오환족을 거느리고 유주, 기주, 청주, 서주 등 후한의 동북방과 동부 영토를 대규모로 침공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오환족의 영토로 끌고 갔다.
장순은 자신도 엄연한 한족이면서 왜 이민족을 끌어들여 조국에 칼을 들이대는 배신자가 되었을까?
확실한 정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조정에 불만을 품고 오랑캐인 오환족의 힘을 빌어서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장순의 야심찬 행보는 오래가지 못했다. 후한 영제 무렵(167~189), 유주를 다스리던 유우(?~193)가 오환족을 사주하여 장순을 암살하게 한 것이다. 유우는 본래 후한 황실의 일원인데, 평소에 덕망이 높고 인자하여 후한 백성들은 물론, 오환족과 선비족 같은 유목민들도 그를 존경했다.
그래서 나중에 삼국지의 군웅들이 할거하는 시대가 되자, 강력한 군벌인 원소는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시도까지 했을 정도였다.
장순이 죽자 요서와 상곡, 요동의 오환족들은 새로운 지도자로 답돈을 추대했다. 답돈은 요서 오환족들의 대인인 구력거의 조카였는데, 구력거가 죽고 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라 구력거의 어린 아들 대신 용감하고 영리했던 그가 더 낫다고 사람들이 판단하여 대인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서기 184년 중국에서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우리가 소설 《삼국지》로 잘 아는 바와 같이,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중국은 중심을 잡아 줄 구심점을 잃고, 각지에서 군웅들이 할거하는 어둡고 긴 혼란기에 빠져든다.
그런데 《삼국지》에 등장하는 군벌인 원소는 뜻밖에도 오환과 깊은 관련이 있던 인물이었다. 원소는 오환족을 상대로 한 교섭에서 멋대로 오환족 대인을 선우에 임명하기도 했다.
선우는 옛 흉노족 군주의 호칭인데, 흉노족이 쇠퇴하면서 오환 같은 다른 유목민들이 그 칭호를 썼다. 그는 오환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들은 북쪽의 흉노와 동쪽의 고구려를 막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대대로 중국에 충성하면 앞으로 모든 오랑캐들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오환족 대인들에게 황제가 타는 수레와 깃발을 선물로 보냈다. 답돈을 비롯한 오환족 지도자들은 더욱 기세가 올랐으며, 특히 답돈은 자신의 능력이 마치 흉노의 최전성기를 연 영명한 군주 모돈선우와 비슷하다 하여, 그와 자기를 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답돈의 재능은 모돈선우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적어도 모돈은 한나라 황제를 포위하여 그를 굴복시켰지만, 답돈은 황제도 아닌 일개 군벌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고 말았다. 대체 원소는 무슨 이유로 오환족에게 선물까지 보내고 선우란 작위를 내려 주었을까? 그가 진심으로 유목민인 오환족을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삼국지》에 의하면 훗날 조조는 원소의 무덤에서 “나는 옛날 젊었을 때, 원소와 나눈 대화를 기억한다. 그는 먼저 사막에 사는 족속들을 모두 아우른 다음, 남으로 내려와 천하를 평정하겠다고 말했다.”라고 술회했다.
이로 보건대, 원소도 결국은 조조처럼 오환족을 제압한 다음, 그들을 기병으로 삼아 중원 통일 전쟁에 나설 생각이었던 것 같다. 다만, 당장 조조와의 대결이 급한 만큼 오환족을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그들에게 비싼 선물을 보내 달랜 다음, 조조와 싸울 시간을 벌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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