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상고사(上古史)

사로국(斯盧國)

야촌(1) 2018. 6. 16. 11:53

■ 사로국(斯盧國)

 

진한(辰韓) 12국(國) 중의 하나로 나머지 진한 소국들을 통합하여 고대국가인 신라(新羅)로 발전하였다.

 

◇ 형성 및 변천

 

『삼국지(三國志)』권30 「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과 「한전(韓傳」을 보면 오늘날 영남 일대에 진변한(辰弁韓)으로 통칭되는 총 24개의 소국(小國) 명칭이 나열되어 있으며, 그중에 사로국(斯盧國)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서기전 57년 혁거세는 조선 유민들로 구성된 육촌민의 추대를 받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 』에는 혁거세가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매우 자세할 뿐만 아니라 서라벌(徐羅伐) 이라는 국호의 이칭으로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 등을 소개하였다. 그러므로 『삼국지』에 기록된 진한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이 바로 혁거세가 건국한 서라벌 곧 후일 신라로 발전한 소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中國) 사서(史書)에는 오로지 사로국의 국명만 소개되었을 뿐이므로, 사로국의 건국과 초기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삼국사기』위서동이전 「한전」에 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찍부터 일본의 사학자들을 필두로 국내의 이병도(李丙燾,1896~1989) 등 친일 주류 사학자들이 일본 임나부설(任那日本府說=일본의 야마토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하여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고 주장하는 설)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불신론을 주장 사로국 형성 기반인 신라육국(육촌)의 건국 기년인 BC57년을 후대의 조작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경주 일대에서 조영된 BC2세기대의 구정동(九政洞), 외동읍 입실리(入室里), 죽동리(竹東里) 유적들과 BC 2세기말 ~1세기 초 전후로 비정되는 황성동(隍城洞), 조양동(朝陽洞), 내남면 덕천리(德泉里) 등의 널무덤[목관묘] 유적들이 요동에서 서북한 지역의 고조선(古朝鮮) 문화와 연계된다.

 

그런 까닭에 기원전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성립과 멸망 그리고 한사군(漢四郡) 설치 이후 한(漢)의 지배를 피해 여러 차례에 걸쳐 남하한 고조선 유민(古朝鮮流民)들이 경주 일대에 정착하는 와중에 사로국이 건국되었을 것이다.

 

그럼으로 후대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국가 기원이 고조선 유민에 의해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신라의 불 분명한 건국 기년을 고조선 멸망 이후 최초의 갑자년인 서기전 57년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후 경주일대에서는 2세기 중엽 무렵부터 덧널무덤[목곽묘]이 축조되는데, 덧널무덤은 시신을 이중으로 보호하고 더 많은 부장품(副葬品)을 넣을 수 있는 구조이다. 경주 서면 사라리(舍羅里) 130호 널무덤과 외동읍 구어리(九於里) 1호 덧널무덤처럼 지배층의 무덤에는 쇠로 만든 창과 같은 무기나 도끼, 덩이쇠를 바닥에 가득 깔아놓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풍부한 부장품을 가진 유적들은 정치력은 물론 경제력과 군사력을 겸비한 정치 지배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더불어 사로국이 주변 소국에 대한 통합전을 전개할 수 있는 역량의 소유를 반영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志東夷傳) 「한전(韓傳)」이나 『진서(晉書)』 「진한전(辰韓傳)」에는 280년대 진에 조공한 진한의 왕이 있는데, 이는 사로국왕(斯盧國王)으로 여겨진다.

 

대체로 사로국의 영토 팽창은 3세기 중 후반대부터 본격화되어 울산 포항을 시작으로 동해안 방면의 우시산국(于尸山國, 울주)-거칠산국(居漆山國, 동래)-음즙벌국(音汁伐國, 안강)-실직국(悉直國, 삼척)으로, 이후 서북방의 압독국(押督國, 경산)-대구-선산-감문국(甘文國, 김천)-사벌국(沙伐國, 상주)-추풍령 조령과 골벌국(骨伐國, 영천)-조문국(召文國, 의성)-안동-영주-풍기-죽령 방면으로 진출했다고 여겨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이러한 대외 정복은 1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지만 3세기 중반의 사실을 객관적 시각에서 기록했다는 『삼국지』에는 사로국이 여전히 진한 12국 중의 일국에 불과하다는 기사와 상충되는바 오랫동안 불신되어 왔다.

 

그러나 초기 기록의 기년을 조정하거나 통합된 다른 소국의 행적이 사로국의 역사로 편입되었다거나 벌(伐), 내항(來降), 토평(討平), 취(取) 등으로 구분된 다양한 통합 방식에 의한 것이라는 이해가 제시되고 있다. 최종적으로 사로국이 진한 제국을 통합하며 후대 신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삼국지』.『삼국사기』.『삼국유사』.『신라왕권성장사연구』(김병곤, 학연문화사, 2003)

『신라국가형성사연구』(이종욱, 일조각, 1993)

「 사로국의 형성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이청규,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26, 2005)

「사로국의 발전과 국읍의 변모」(이형우,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26, 2005)

「사로육촌과 국가의 성립단계 시고」(강인구, 『고고학으로 본 한국고대사』, 학연문화사, 1997)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사로6촌 추정도-한국학중앙연구원

 

지도 출처 :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