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이시술 묘갈명(李時術墓碣銘)/백사 이항복 손자

야촌(1) 2018. 5. 5. 01:19

[생졸년] 이시술『李時術, 1606년(선조 39) ~ 1671년(현종 12)』

[세 계] 백사 이항복의 손자.

 

■ 이시술 묘갈명(李時術墓碣銘)

 

남계 박세채 찬(南溪 朴世采 撰)

 

내가 보건대 근세에 큰 벼슬을 한 가문의 후손들이 대부분 계속해서 현달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권세를 멀리하고 교만을 경계할 줄을 알아 시종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은 사람은 매우 드물었는데, 고(故) 소재(少宰) 월성(月城) 이공(李公)만은 백사(白沙) 문충공(文忠公)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공은 젊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는데다가 학문에 힘쓰고 문장을 갈고 닦아 숭정(崇禎)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에 상사생(上舍生)의 선발에 들어갔고 몇 해 있다가 세자 세마(世子洗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오래 있다가 다시 시직(侍直)을 거쳐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역임하고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승진하였다가 곧바로 신창현감(新昌縣監)에 임명되었다. 벼슬살이할 때 청렴하게 하고 조용히 하여 동요하지 않도록 힘쓰고 겉으로 아름답게 꾸며 명예를 구하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으며 공이 돌아가자 비석을 세워 덕을 기록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648년 인조 26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상을 끝마친 뒤에 형조정랑(刑曹正郞)ㆍ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에 비로소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 40세였다.

 

이어 아버지 상을 당하고 상을 끝마치자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되었다가 여러 번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ㆍ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ㆍ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전직되었고, 또 필선(弼善)ㆍ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그때 마침 무지개의 변고가 생기자 효종(孝宗)이 하교하여 도움의 말을 구하였다.

 

공이 동료들과 같이 차자(箚子)를 올려 백성을 구제해야 하고, 형벌을 너그럽게 해야 하고, 간하는 말을 따라야 하고, 재앙을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는 등 모두 다 열거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이윽고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으로 나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사면되어 다시 춘방(春坊) 세마가 되었고 추천을 받아 홍문관(弘文館)으로 들어가 교리(校理)가 되었다.

 

보덕(輔德)ㆍ사간(司諫)으로 승진한 뒤에 어사(御史)로 차출되어 호남(湖南)을 순시하며 감찰을 잘 하니, 임금이 또 칭찬하였다. 이윽고 교리ㆍ집의(執義)ㆍ군기시 정(軍器寺正)ㆍ사성(司成)ㆍ부응교(副應敎)를 역임하면서 한학교수(漢學敎授)를 겸임하였다.

 

공이 영예로운 선발에 들어갔을 때부터 벼슬에 임명되어 취임하면 곧바로 사직하여 오래 있은 적이 없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추천을 받아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의주는 서쪽 변방에 있는데다가 북쪽의 사신을 응접하느라 전후 부임한 자들이 문묘(文廟)를 수리할 뜻이 없었으므로 너무나 심하게 낡아 있었다.

 

공이 이르자 문묘를 참배하고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이러한 상황을 어찌 다른 나라가 들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서둘러 장인을 모아 새롭게 수리한 다음에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예를 행하였다.

 

그리고 가르칠 만한 수재를 선발하여 향교(鄕校)에다 모아놓고 더욱 더 부지런히 과정을 정하여 글을 읽게 하였는데, 의주부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한다. 이윽고 어떤 백성이 금령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갔다가 오랑캐에게 발각되자 그들이 사신을 보내어 조사하였는데,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임금이 깊이 염려하다가 특별히 영상 정태화(鄭太和)에게 형조판서 허적(許積)을 딸려 보내어 해결하고 파직만 하였다.

그 뒤 몇 년 있다가 사면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전직하였고, 순서에 따라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다가 대사간(大司諫)ㆍ병조참지(兵曹參知)ㆍ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고 이조로 전직되었다.

 

이조는 인물을 보아 벼슬에 임용하는 곳이므로 열관(熱官)으로 호칭되었으나 공이 취임하자 빈한한 선비의 집안처럼 문전이 싸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더욱더 칭송하였다. 다시 호조(戶曹)와 승정원(承政院)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이때 막 큰 가뭄이 들어 현종(顯宗)이 신하들에게 각자의 소견을 개진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도움의 말을 구한 적이 많았으나 한두 가지 채용하여 시행하였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주자(朱子)가 임금에게 고한 법을 본받아 관리를 차출하여 열람하고 연구하되, 반드시 먼저 성상의 실수와 궁중의 사사로운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고 언로(言路)를 넓히는 것에 이르기까지 한 결 같이 모두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실질적으로 다 한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안팎이 진작하고 있는데, 오직 내탕고(內帑庫)의 잘못을 고치기에 인색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려 권장하였다. 그 뒤로 여러 번 이조와 사간원을 드나들었다. 기유년(己酉年, 1669년 현종 10년)에 대신(大臣)의 추천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승진하였고, 두 번이나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전직되었다가 결국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 11월 모일에 병이 나 성남(城南)의 옛집에서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위인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수려하고 단아하여 의지와 조행을 돈후와 성실로 충족시켜 사물을 접하고 만났을 적에 차분하게 처리하여 평생 동안 털끝만큼도 교만하거나 인색한 빛이 없었다. 만년에 비록 벼슬길이 열려 지위가 아경(亞卿)에 이르렀으나 권문 세도가를 찾아가 진퇴를 논의하는 것은 더욱 더 좋아하지 않았다.

 

공이 항상 말하기를, “나는 본래 재주가 없고 병통이 많았는데, 특별히 선조의 음덕으로 인해 이 위치에 이르렀다.

분수와 힘을 헤아려볼 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더욱 더 간절하기 때문에 벼슬에 임명되면 번번이 사양하고 감히 책임을 떠맡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마음을 공정하게 가져 애증(愛憎)에 따라 사람을 거느리지 않았다.

 

일찍이 이조 판서 이경억(李慶億)공과 같이 윤선도(尹善道)의 상소에 대해 말하기를, “그의 논의는 정말로 음험하고 참혹하였다.” 하였고, 그를 구원하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지금 폐출(廢黜)된 지 10년이 되었으나 한결같으니, 이것이 어찌 나라를 위한 큰 아름다움이겠는가?

 

우리들이 이조에 있을 때 깊이 생각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이 의주에서 일이 생겼을 때 상국(相國) 허적(許積)이 매우 힘을 써서 구해주었다. 그런데 공이 가끔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그의 은총과 권세가 날로 성대해지니, 끝까지 보존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너희들은 길사에 경하하고 흉사에 위문하는 일 외에는 절대로 왕래하지 말라.”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 말처럼 되었다.

공은 본래 아량(雅量)이 있어서 황급한 일을 당해도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랑캐의 사신이 크게 엄포를 놓을 때 집안사람이나 친구들이 모두 다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태연히 말하기를, “사생(死生)은 천명에 달려 있으므로 인력으로는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고, 평소처럼 웃으며 이야기하였다.

 

이단상(李端相) 공은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공은 헤아릴 수 없는 화에 임해서도 자발(髭髮)이 옛날보다 나으니, 이는 정말로 따라갈 수 없다.” 하였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공은 편지를 보내 축하하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공이 사생의 갈림길에 임하여 털끝만큼도 마음을 동요하지 않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기운이 생기게 하였다고 하니, 서로 깊이 알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하였으며,

 

상국(相國) 홍명하(洪命夏)가 같은 마을에 살면서 오래될수록 더욱더 친밀히 하고 믿으면서 항상 말하기를, “아무개는 인품이 한 가닥의 아름다운 비단과 같아서 자연히 사랑스럽다.” 하였다. 그리고 기타 취향이 다른 사람도 공이 심사(心事)가 간이하고 곧아 잡되지 않은 것을 보고 심지어는 수십 년 뒤에도 생각하기도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공은 효성과 우애를 천성으로 타고났다. 어버이를 섬길 때 정성을 다하고자 힘썼고 새벽과 저녁에 문안을 드릴 적에 감히 간편한 옷차림으로 알현하지 않았다. 매양 명절을 만날 때마다 주연(酒宴)을 열어 축수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려고 하였다.

 

누이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우애가 돈독하여 종신토록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가문이 옛날부터 청빈하여 끼니를 잇대지 못하였으나 전답을 장만하려는 뜻이 없었다. 사람들이 더러 자손을 위해 계책을 세우라고 권하면 소 태부(疏太傅)가 말하였던 ‘현우(賢愚)’의 말1)로 대답하였다.

 

이에 군자(君子)들이 공의 덕행이 집안에서도 있는 것을 알았다. 공이 유언하기를, “풍수설에 현혹되어 멀리까지 가서 길지(吉地)를 구하지 말고 내가 죽으면 선영(先塋)의 곁에 묻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들에게 만사(輓詞)를 지어달라고 요구하지 말라. 그리고 비석을 세우지 말고 묘소 앞에 조그만 돌을 세워 세대의 계통과 나의 이력을 대략 기록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의 휘(諱)는 시술(時術)이고, 자(字)는 사강(士强)이다. 시조 이알평(李謁平)이 신라(新羅) 개국 공신(開國功臣)이 되어 벼슬이 대대로 이어졌다. 증조 이몽량(李夢亮)은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할아버지 이항복(李恒福)은 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고 큰 공훈과 절개로 이 세상 재상의 으뜸이 되었는데, 바로 이른바 문충공(文忠公)으로서 세상에서 백사 선생(白沙先生)으로 부르고 있다.

 

아버지 이정남(李井男)은 예빈시 정(禮賓寺正)을 지내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참판 윤의(尹顗)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으니,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부인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참판 홍영(洪霙)의 딸인데, 3남 4녀를 두었다.

큰아들 이세장(李世長)은 문과출신으로 정랑(正郞)이고, 둘째아들 이세필(李世弼)은 군수(郡守)이고, 셋째 아들 이세희(李世熙)는 일찍 죽었다.

 

큰딸은 이상렴(李尙濂)에게, 둘째딸은 부제학(副提學) 윤진(尹搢)에게, 셋째 딸은 시직(侍直) 이만휘(李萬徽)에게, 넷째 딸은 현령(縣令) 홍원보(洪遠普)에게 각각 시집갔다. 소실에게서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이세춘(李世春)이고, 큰딸은 조필달(曺必達), 둘째딸은 무과 출신 황발(黃鉢)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 손녀도 몇 십 명 정도 된다. 묘소는 포천현(抱川縣) 서쪽 계유리(溪流里) 모향(某向)의 언덕에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관섬(關陜)에 훈계가 있으니, 대대로 녹을 먹는다고 일컬어졌도다.

어찌하여 금세의 사람은 이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가?

마음대로 부귀와 교만을 부리다가 도리어 화난을 당하였도다.

온 세상이 다 그러하니, 그 누가 그 멍에를 벗어난단 말인가?

 

아! 이공은 젊어서 억눌렸다가 늙어서 현달했도다.

사람들의 기대가 비로소 모아지니, 문충공의 손자였도다.

어느 곳에 있었는가? 대사간과 이조 참판이었도다.

정부뿐만이 아니라 지방에도 시험을 해 보았도다.

공은 근신하고 두려워하며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임금을 보필하려고 생각하였도다.

임금의 실수나 백성의 고통을 하문하면 열거하여 아뢰었도다.

이러한 일 말고는 자신을 수렴하여 초야로 은둔하였도다.

더구나 저 권세와 이익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집에 돌아가 보면 조석의 끼니가 여러 번 떨어졌도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의 문충공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하였도다.

왕방(王方)의 북쪽에 하나의 드높은 산이 있도다.

공이 선영의 밑에 묻히니, 편안하고도 좋도다.

정성으로 효도하여 받드니, 유언을 따랐도다.

이에 묘갈명을 저술하여 묘소를 꾸미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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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소 태부(疏太傅)는 한 선제(漢宣帝) 때 태자(太子)의 태부 소광(疏廣)이다.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할 때 하사받은

    황금을 집으로 돌아와서 모두 팔아 가지고 종족과 친구를 초청하여 즐겼다.

 

어떤 사람이 그 황금으로 자손을 위해 가업을 조성할 것을 권하니, 소광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노망하여 자손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옛날부터 전해 오는 토지가 있으므로 자손들이 근면하면 남들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가업을 더 불려놓을 경우에는 자손으로 하여금 나태하게 만들 것이다. 어진 사람이 재화가 많으면 뜻을 손상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재화가 많으면 잘못을 더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부자는 대중이 원망한다. 내 이미 자손을 가르칠 수는 없고 잘못만 더 저지르지 않았으면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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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吏曹參判李公墓表 六月晦日

 

余觀近世鉅公家。蓋多後孫繼顯。其能自知遠權勢戒驕溢。終始無忝于先祖者甚鮮。若故少宰月城李公之於白沙文忠公。其殆庶幾乎。公少有美質。力學攻詞業。崇禎庚午登上舍選。數歲除世子洗馬。久之復由侍直歷內持敎官。陞拜工曹佐郞。旋除新昌縣監。居官務淸靜無擾。益恥嫺飾要名。民甚便之。比歸立石紀德。戊子丁內艱。喪畢歷拜刑,工二曹正郞。壬辰始闡大科。時年四十七。仍丁外艱。旣卒喪拜成均館直講。累遷侍講院司書,司諫院正言,兵曹佐郞。又歷弼善,獻納。會有虹變。孝廟下旨求言。公與同僚陳箚。悉擧恤民寬刑從諫謹災以爲言。上嘉納焉。旣而出拜開城府經歷。坐事罷。敍復春坊舊踐。薦入弘文館爲校理。陞拜輔德,司諫。差御史巡撫湖南。廉察得宜。上又加奬。尋歷校理,執義,軍器寺正,司成,副應敎兼漢學敎授。公自在榮選。凡拜官出謝。旋卽辭免。未或久淹也。尋薦授義州府尹。龍灣旣邊西塞。且應待北使。前後涖府者無意修葺。聖廟頹廢已甚。比公至祗謁。謂父老曰此烏可聞於異國耶。亟令鳩工而新之。每月朔望行禮。仍選秀俊可敎者聚于鄕校。課讀益勤。府人至今稱頌。俄而民有犯禁越境者爲虜所覺。乃發使査治。事將叵測。上深念之。特遣首輔鄭公太和。副以秋官許積往解之。只得革職。數歲敍拜刑曹參議。遷承政院同副承旨。序陞右副。歷拜大司諫,兵曹參知,戶曹參議。遷吏曹銓部。藻鑑人物。號爲熱官。及公涖職。門庭冷落如寒士。人益稱之。復由地部銀臺拜大司諫。天方大旱。顯廟命群臣各陳所懷。公疏言殿下卽祚。罪己求言多矣。未聞有一二採施者。宜令倣朱子告君法。差官看詳。必自聖躬闕失宮闈私邪。至于勤政事廣言路。一皆體納。始盡其實。又言中外振發。獨靳內帑之失。上優旨奬諭。是後屢出入銓部諫垣。己酉因大臣論薦陞拜兵曹參判。遷貳吏曹者至再。竟以辛亥十一月某甲。疾終于城南舊第。壽六十六。公爲人溫謙秀雅。濟以志行惇實。接物遇事。裁處從容。平生未嘗有一毫驕吝色。晩雖通籍。位列亞卿。尤不喜踵權要門。進退論議。常謂吾本菲才多病。特以先蔭致此。揣分量力。益切媿懼。此乃除官輒辭不敢當責者也。秉心公正。不以愛惡率人。嘗與銓相李公慶億言。尹善道疏論固爲陰慘。至其營救之人。訖今廢黜。十年一轍。是豈爲國大體耶。吾輩在銓。切宜深思以處之。許相積於公龍灣事。出力相救甚至。間謂諸子曰。比見其恩遇。權勢日盛。恐難終保。爾輩吉凶慶弔外。切勿往來也。後果如其言。素有雅量。雖當倉卒而無少變。虜差大喝。時家人親舊亡不涕泣。公怡然曰死生在天。非人力可得。言笑如平日。李公端相謂人曰李公臨不測之禍。髭髮勝昔。是誠不可及者。同春宋公浚吉貽書相賀曰聞公當死生之際。無絲毫動心。使人增氣。自媿相知之淺也。洪相國命夏居在同閈。久益親信。常曰某甫人品。如一段美錦。自然可愛。其他雖異趣者。見公心事易直無雜。至或追思於數十年後。則其爲人敬服如此。公孝友出人。事親務盡其誠。晨昏不敢以褻服見。每遇時節。稱觴奉壽。冀得歡意。有一姊友愛篤至。終身無少贊。家故淸貧。菽水不給。亦無意於營置田園。或勸爲子孫計。乃以疏太傅賢愚語答之。君子於是知公之行又存乎家也。遺戒勿惑風水。遠求吉地。我死便卽祔于先壟。且命勿求挽勿立碑。只以小石豎墓前。略記世系履歷可也。公諱時術。字士強。始祖謁平。爲新羅開國功臣。簪組蟬聯。曾大父諱夢亮。右參贊贈領議政。大父諱恒福。領議政鰲城府院君。元勳大節。爲比世宰輔之冠。卽所謂文忠公也。世號白沙先生。父諱井男。禮賓正贈參判。母咸安尹氏。參議顗之女。贈貞夫人。皆以公貴也。配豐山洪氏。參判霙之女。生三男四女。長世長文科正郞。次世弼郡守。次世煕早歿。女適李尙濂,尹搢副提學,李萬徽侍直,洪遠普縣令。側室一男二女。男世春。女適曹必達,黃鈢武科。孫男女亦幾數十人。墓在抱川縣西溪流里某向之原。銘曰。

 

關陝有訓。亟稱世祿。胡今之人。是猶不屑。橫肆貴驕。反罹禍孼。滔滔者皆。孰脫其馽。於惟李公。少屈老騫。輿望始傾。文忠之孫。何以處之。諫長銓貳。非啻廟堂。亦紆寵試。公惟祗懼。進退思補。主闕民隱。有詢輒擧。夫是之外。斂若遯野。矧彼權利。何與於我。歸視其家。朝夕屢空。人曰庶幾。不忝文忠。王方之北。有崇一岡。公從先葬。克安且臧。烝烝孝嗣。遺戒是式。爰述銘詞。賁茲玄宅。

 

南溪先生朴文純公文續集卷第二十二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