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李鳳男 先生 墓碣銘. 墓誌銘

야촌(1) 2018. 4. 9. 20:01

건원릉참봉 이봉남 묘갈명(健元陵參奉李鳳男墓碣銘)

이봉남 생졸년 : 1537년(중종 32) ~ 1593년(선조 26)

 

박세채(朴世采)   찬(撰)

 

공의 휘(諱)는 봉남(鳳男)이요, 자(字)는 서중(瑞仲)이니, 월성이씨(月城李氏)는 세속에서 동방(東方)의 큰 종족으로 여긴다. 이알평(李謁平)이 있어 신라 시조[박혁거세(朴赫居世)]를 도와 추대했는데, 이분이 월성이씨의 비조(鼻祖,=시조)이다.

증조(曾祖)는 이예신(李禮臣)인데 상상(上庠)이요, 조(祖)는 이몽윤(李夢尹)인데 사도시 정(司寺正)이며, 고(考)는 이안복(李安福)인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공이 소싯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얼마 안 되어 모부인(母夫人)도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자 계 조모(繼祖母) 조씨(趙氏)가 가련하게 여겨 어루만져 기르기를 자기자식처럼 하였다. 16세에 비로소 배워야 하는 것을 알고 개연히 말하기를, “내가 이미 부모님을 잃었는데 진실로 배움에 힘써 자립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하고 마침내 ≪소학(小學)≫ㆍ≪근사록(近思錄)≫ 및 여러 선유(先儒)의 글을 가져다가 송독(誦讀)하고 문득 그 요점을 제시하고 두루 당세의 유식한 선비와 교유하여 거취를 넓혔는데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 송강(松江) 정철(鄭澈),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제공(諸公)들과 가장 잘 지냈다.

 

간혹 관학(館學,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에 유학을 하면서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죄를 힘써 논하였다. 또 상소를 올려 송도(松都) 유생(儒生)으로 음사(淫祠)를 헐어버린 자를 구원하니, 당시의 논의가 쾌하게 여겼다.

 

그의 악(惡)을 미워하고 정도(正道)를 유지함이 이와 같았다. 이미 거자업(擧子業)을 버리고 포천(抱川)과 충주(忠州) 사이를 왕래하면서 힘써 농사를 짓고 의(義)를 행하였다. 조 부인(趙夫人)과 숙부(叔父) 모(某)를 섬기는 데 능히 효경(孝敬)을 다하니, 향당(鄕黨)에서 칭찬하고 복종하였다.

 

이에 중외(中外)에서 번갈아 공의 학문과 행실이 쓸 만하다고 천거를 하니, 명하여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제수하였다. 얼마 안 있어 조 부인이 졸(卒)하자 공이 애도함이 특히 심하였다. 상제(喪制) 노릇을 한결 같이 주 문공(朱文公)의 예(禮)와 같이 하고 또 묘(墓) 곁에 여막을 짓고 손수 음식을 갖추어 전(奠)을 올리고 상(喪)을 마치는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왜란(倭亂)에 임금이 관서(關西) 방면으로 피난을 가자 공이 변(變)을 듣고 샛길로 고초를 겪으며 걸어서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서 문안을 여쭈니, 조정(朝廷)이 아름답게 여겼다. 장차 크게 쓰겠다고 여겨 즉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하였다.

 

공이 만력(萬曆)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 12월 22일 신미(辛未)에 졸(卒)하니, 가정(嘉靖)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에 태어난 것을 계산하면 향년 57세이다. 포천(抱川)의 추곡(楸谷) 간좌(艮坐)의 자리에 장사를 지냈는데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배위(配位)는 의인 맹씨(宜人孟氏)인데 그 아버지는 판서(判書) 맹숭선(孟崇善)이다. 공보다 31년 뒤에 세상을 떠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장남 이지하(李支廈)는 일찍 죽었고, 차남 이경하(李擎廈)는 현감(縣監)이며, 셋째 이대하(李大廈)는 무과(武科) 출신의 군수(郡守)이다. 여러 손자와 손녀가 거의 수십여 명이라고 한다.

 

공은 타고난 성품과 재질이 탁월하고 남달라 겉은 온화하고 속은 굳세어서, 글을 읽고 부지런하게 배우되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람과 더불어 처신할 때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더듬거리지만 남의 그릇되고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보면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분석함에 그 의논이 격렬해서 여럿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매양 미처 부모님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기면서 말하기를, “요컨대 마땅히 부모님이 남겨주신 몸을 감히 다치지 않게 할 따름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몸 가지기를 공경히 하면 남도 공경하지만 공경하지 않으면 남도 천하게 여긴다.

 

부모님의 영광과 욕됨은 여기에 매인 것인데,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는가?” 하고 추모하고 근신하기를 항상 부족한 듯이 하였다. 명종 대왕(明宗大王)의 상사(喪事)에 5개월 동안 거친 음식을 먹었고 3년간 술을 마시지 않았다.

 

왜적(倭賊)의 침략이 일어나자 나라 일이 뒤집힐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더욱 스스로 강개한 심정에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니, 보는 자들이 얼굴빛을 바꾸었다.

 

일찍이 이발(李潑) 형제와 교분이 있었는데, 그들이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이이(李珥))의 도학(道學)을 성대히 칭송하더니 얼마 안 되어 당론(黨論)이 일어나자 반대로 추악하게 헐뜯는 것을 보고 공이 드디어 나무라고 교분을 끊었다.

 

공이 세상을 뜬 지 94년 뒤에 증손(曾孫) 이유촌(李惟村)이 공의 종숙부(從叔父) 백사공(白沙公, 이항복(李恒福))이 만든 지문(誌文)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이름은 소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충실해야 하며, 학문은 화사함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행실이 온전해야 하네. 그것을 닦는 것은 사람에 있고 그것을 써 줌은 하늘에 달려 있네. 복록을 거둬두고 아낀 것은 후세 자손들이 번성되게 하려 함이었네.

 

지각 있으신 백사옹(白沙翁)이 비로소 그 어짊을 밝혔네. 내가 돌에 공덕을 새기는 것은 영원히 천년 후에 보게 함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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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健元陵參奉李公墓碣銘 八月晦日

 

公諱鳳男。字瑞仲。月城之李。世爲東方大族。有諱謁平。翊戴羅祖。是其鼻祖也。曾祖諱禮臣。上庠。祖諱夢尹。司導寺正。考諱安福。隱德不仕。公少孫。未幾母夫人又歿。繼祖母趙氏憐之。撫養如己出。十六歲始知爲學。慨然曰吾旣失父母。苟不力學自立。非人也。遂取小學近思錄及諸先儒書誦讀。輒提其要。遍交當世有識之士。以博歸趣。最與宋龜峯翼弼,鄭松江澈,金沙溪長生諸公友善。間游館學。力論妖僧普雨罪。又疏救松都儒生破淫祠者。時議快之。其疾惡持正類此。旣而棄擧子業。往來抱川忠州間。力田行義。事趙夫人及叔父某克底孝敬。鄕黨稱服。於是中外交薦公學行可用。命除禧陵參奉。未幾趙夫人卒。公哀悼特甚。持制一如文公禮。且結廬墓側。手具饋奠。不釋衰麻以終喪。壬辰上西狩。公聞變。間道跋涉。奔問行在。朝廷嘉之。將大用。旋除健元陵參奉。以萬曆癸巳十二月二十二日辛未卒。距其生嘉靖丁酉。壽五十有七。葬于抱川楸谷負艮之原。從先兆也。配宜人孟氏。父曰判官崇善。後公三十一年歿祔焉。子三人。長支廈早世。次擎廈縣監。次大廈武科郡守。諸孫男女幾數十餘人。公天分卓異。外和內剛。讀書勤學。未嘗少懈。與人處訥訥若不能出口。及見非違。正色析理。議論風生。衆莫能屈也。每以不逮親養爲至痛曰。要當不敢毀傷遺體耳。又曰持身敬人亦敬之。不敬人亦賤之。父母榮辱係此。其可忽耶。追慕謹身。常若不足。明宗之喪。五月疏食。三年不飮酒。及倭寇作。見國事顚危。益自慷慨。以至流涕。觀者易容。嘗交李潑兄弟。見其盛稱栗谷李先生道學。未幾黨論起。反肆醜詆。公遂責而絶之。歿後九十四歲。曾孫惟材以公從祖父白沙公所爲誌來請銘。銘曰。

名不必聞。惟實之專。學不必華。惟行之全。其修在人。其用在天。庶幾斂斯。以俾後延。有覺沙翁。載闡其賢。我銘于石。永眎千年。<끝>

 

南溪先生朴文純公文正集卷第七十四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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健元陵參奉李君墓誌銘

 

백사 이항복 찬(白沙 李恒福 撰)

 

이서중(李瑞仲=字를 말함) 봉남(鳳男)은 나의 죽은 종형(從兄) 안복(安福)의 아들이다. 형은 강개한 성품에 학문을 좋아하여 가정(嘉靖) 연간에 명성이 있었다. 고(考)는 몽윤(夢尹)으로 우리 백부(伯父)인데,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사도시 정(司䆃寺正)으로 졸관(卒官)하였고, 또 그 고(考)는 예신(禮臣)으로 우리 조부(祖父)인데,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다.


우리 이씨는 경주에서 나왔는데, 휘 알평(謁平)이 혁거세 때를 당하여 익대(翊戴)의 공이 있었고,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있었다. 서중은 정유년에 태어나서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2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계조모(繼祖母) 조씨(趙氏)가 어질고 훌륭한 행실이 있어 그를 마치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길렀다.

 

16세에 이르러 비로소 학문할 줄을 알아서 개연히 도(道)를 구할 뜻이 있어 《소학(小學)》ㆍ《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ㆍ《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등의 책을 모두 가져다가 열심히 읽어서 그 요점을 대략 알고, 당세에 명성 있는 선비들과 두루 교제하여 귀취(歸趣)를 넓혀서 마침내 과거(科擧)의 학문을 싫어하였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는 조모(祖母) 및 계부(季父)를 섬기면서 효도와 공경을 극진히 하고, 충주(忠州)와 포천(抱川) 사이를 왕래하면서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가니, 향당(鄕黨)에서 모두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


당시 금상(今上)이 한창 문학을 진흥시키면서 초야의 선비들을 낱낱이 찾아서 거용하는 일을 한 해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이때에 서울 및 충주ㆍ포천 두 고을의 향인(鄕人)들이 군(君)의 학행을 서로 천거하여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 후 임진년 난리 때에는 사잇길로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또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계사년 12월에 작고하니, 향년이 67세였다. 군의 아내는 판관(判官) 맹숭선(孟崇善)의 딸이다. 세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 지하(支厦)는 일찍 죽었고, 그 다음 경하(擎厦)는 음보(蔭補)로 우봉 현령(牛峯縣令)이 되었고, 그 다음은 대하(大厦)이다.


군은 겉은 유약하나 마음이 강직하였으므로, 평소 남과 함께 있을 적에는 어눌하여 마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으나, 남의 비위 사실을 보았을 때는 매양 사리를 따져서 항의하되, 언변이 칼날처럼 예리하였으므로, 온 좌중이 모두 복종하였다.

 

나와는 막역한 사이가 되어 나이와 종족의 서열도 잊고 지내면서, 항상 완급(緩急)에 따라 수립하는 바가 있기를 기대했는데, 지위가 낮고 이름이 묻히었으니, 반드시 기다림이 있을 것이다.

 

[原文]

 

健元陵參奉李君墓誌銘

 

李瑞仲鳳男。余之亡從兄安福子也。兄慷慨好學。有名嘉靖間。其考曰夢尹。吾伯父也。明經及第。卒官司䆃寺正。又其考曰禮臣。吾祖父也。成均進士。我李出慶州。有諱謁平。當赫居世時。有翊戴功。由新羅及高麗。連世有人。瑞仲生於丁酉。九歲。喪其父。二十二。喪其母。繼祖母趙。賢有行。取養如己出。至十六。始知學。慨然有求道之志。悉取小學,心經,近思錄,朱文公家禮等書。伏而讀之。略知其要。遍交當世知名之士。以博其歸趣。遂厭科擧之學。入而事祖母及季父。克孝克敬。往來忠州,抱川間。治田自資。鄕黨服其義。時今上方興文學。搜羅林下。擧無虗歲。於是漢京及忠,抱二邑之鄕人。交薦君學行。除禧陵參奉。壬辰之亂。間道詣行在。又除健元陵參奉。癸巳十二月卒。得年六十七。其妻。曰判官孟崇善女。三子。長支廈。早世。次擎廈。蔭補牛峯縣令。次大廈。君弱外而剛中。平居與人處。訥訥若言不能出。見人非違。輒析理抗議。談辯鋒生。一座盡傾。與余爲莫逆交。忘年與族序。常冀緩急有所樹立。位卑而名埋。其必有待。

 

白沙先生集卷之二 / 墓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