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좌의정 화곡 이경억 묘갈명

야촌(1) 2018. 5. 26. 19:19

■ 좌의정 화곡 이공 묘갈명

   (左議政 華谷 李公 墓碣銘)

  ◇생졸년 : 1620년(광해군 12)~1673년(현종 14)

 

명곡 최석정 찬(明谷 崔錫鼎 撰)

 

목능(穆陵: 宣祖의 능 이름이니 능으로 그 임금을 칭한다)이 왕위에 있을 재 명신이 있으니 벽오 이공(碧梧李公)이다. 이름은 시발(時發)이고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신부인(申夫人)을 재취(再娶)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이조판서(吏曹判書) 경휘(慶徽)와 좌의정(左議政) 경억(慶億)이다.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의 세 조정을 섬기어 세상에서 어진 공경(公卿)이라고 칭했다.

 

의정공(議政公)의 자는 석이(錫爾)고 호는 화곡(華谷)이다. 태창(泰昌>명나라 광종의 연호) 경신(庚申,1620)년에 탄생했다. 칠(七)세에 부친께서 도라 가셨다. 신부인(申夫人)이 현철하고 글을 통하여 몸소 스승이 되어 주야로 가르치고 독려하였다.

 

장성함에 문장이 성취 되였다. 숭정(崇禎) 갑신(甲申,1644)년의 정시(庭試)에 장원(壯元)하고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랑(郎)과 사서(司書). 정언(正言)을 역임 했다.

 

효종(孝宗)이 특별히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제수하여 계단을 밟지 않고 특용한 것이다.

사람들이 다 영화로 여겼다. 여러 번 옥당(玉堂)과 춘방(春坊>世子侍講院)에 들어가서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승배(陞拜) 했다.

 

현종 즉위년에 승지(承旨)로 대사성(大司成)에 옮기고 또 대간(大諫)으로부터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겼다. 다음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제수되었다. 다음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고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승진하여 호조(戶曹). 예조(禮曹).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삼사(三. 四)차나 역임 하였다.

 

전후에 걸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세 번 배수(拜受)하고 비변(備邊). 선혜(宣惠).제조(提調)를 겸직했다. 임자(壬子)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하고 조금있다.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였다.

 

오십사(五十四)세로 세상을 돌아가시니 상감(上監) 께서 슬퍼하여 조회를 철폐>휴뮤)하고 조문(弔問). 제전(祭典). 부의(賻儀). 거마(車馬)를 내리고 관(官)에서 최빈(衰殯)과 장사(葬事)를 갖추 도록하고 녹봉(祿俸)을 3년 까지 주도록 명했다.

 

처음에 진천(鎭川)에 장사 지냈다가 십년 뒤 갑자(甲子,1684년)에 청안(淸安: 오늘날 세종시 금남면 영대리 584-2) 어느산 신향 언덕 신좌(申坐)에 이장(移葬)하고 배위(配位)와 합폄(合窆=合葬)· 했다.

 

공은 사람됨이 외유내강하고 수염이 아름답고 신체와 용모가 청수(淸水)하였다. 남하고 같이하매 화락하였으나 일찍이 기색(氣色)을 잃은 적이 없고 남의 잘못을 궁극적으로 배척하지 안했다.

 

그러나 말이 간략하고 침중하여 악의로 대하지 않고 엄숙했다. 그 조정에 있으매 마음 갖기나 의논을 항상 평화를 주장 하였으되 시비와 사정에 이르러서는 지키는 바가 확실했다. 벼슬에 임하여 일을 처리함에 헌법(憲法)과 명령 지키기를 오직 삼가고 대체를 잡어 까다롭지 않으나 일에 나아가서는 반드시 규모가 있어 영구에 법이 되었다.

 

집에 있으매 청염하고 효우 하여 사람이 못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자연에 가깝고 가식하는 것이 없었다. 중씨(仲氏)와 더불어 동시에 현달하여 사림(士林)에 영수(領袖)가 되었다. 이때에 사대부(士大夫)들이 심각히 행검(行檢)을 가다듬어 의론이 바람일 듯하였다.

 

공의 형제는 평온하고 진실하여 과격한 행실하기를 부끄러워했다. 아는 자가 마음으로 흠복(欽服)하였다. 효종(孝宗) 초기에 정언((正言-正六品)이 되어 봉사(封事: 밀봉하여 직접 군주에게 바치는 의견서)로 여러 천(千)가지 말을 올리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하늘의 경계를 삼가며 인심(人心)을 단결하고 군정(軍政)을 수비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조공 익(趙公 翼)이 스승을 변무(辨誣: 사리를 따져서 옳고 그름을 가리고 억울함을 밝히는 것)한 것이요.

 

편벽(便辟: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아첨함. 또는 그런 사람) 됨이 아니라는 것을 호소했다. 위에서 우대하여 비답(批答: 국왕이 내린 답서) 했다. 정의현감(旌義縣監=제주도의 남쪽에 있는 현) 안집(安緝)이 제주목사(濟州牧使) 김수익(金壽益)으로 더불어 서로 미워했다.

 

집(緝)은 무인(武人)이다. 상사가 재물을 낚는다하며 힐책하며 겸손치 않았다. 감사(監司=관찰사)가 소장(所長)으로 주달(奏達=임금에게 아뢰다)하여 특명으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핵실(覈實=어떤 일이나 사건 따위의 실제 상황을 자세히 살펴봄)하라 하여 공(公)이 명령을 받들고 나아가 그 곡직(曲直=사리의 맞음과 틀림)을 절충하여 돌아와 주달했다.

 

상(上=임금을 말함)의 생각에는 공이 문무(文武)로써 좌우할 것이라 했더니 주달함이 명확하여 용서함이 없음을 보고 크게 가상하여 김수익(金壽益)의 죄상 감정하기를 공(公)의 말과 같이했다.

 

또 어사로 영남(嶺南)에 군정(軍政)을 안찰(按察=조사하여 살핌)하고 추쇄(推刷=빚을 모두 받아들이던 일)로 영남(嶺南)을 가고 암행(暗行)으로 경기(京畿)를 염탐함에 모두 임금의 뜻에 알맞게 했다.

 

대사헌(大司憲) 조공 석윤(趙公 錫胤=호는 樂亭, 白川사람)이 죄 없이 파직되었다. 공이 논쟁을 벌리 였더니 상(上)이 크게 성내어 말씀이 지극히 엄위하여 경성(鏡城=함경북도 중앙에 있는 지명)에 귀양 보냈다.

 

해를 넘기어 석방했다. 수년 만에 정언(正言=司諫院의 正六品)으로 연대(筵對=임금이 경연에서 신하들과 면대함)함에 임금이 공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 하고 얼굴 빛이 온화하며 말씀하되 제주도(濟州島)에 어사(御使)로 있을 적에 심히 공정함으로 내가 너를 가상히 여기는 것이다.

 

지난번에 견책(譴責)한 것은 나의 사색(辭色=말과 얼굴빛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너무 급한 것임으로 내가 나의 과실을 뉘우치는 바이니 네가 전에 일을 중지하지 말고 더욱 장래를 힘쓰라고 부탁하고 경연(經筵=正三品衙門)에 신하를 돌아보며 말씀하되 이 아무개의 아버지가 누궁니고? 물었다

 

대답하되 선묘 조(宣廟朝)의 명신 이시발(李時發)의 아들이라 했다. 이보다 먼저 중씨(仲氏=춘전 이경휘를 말함)가 옥당(玉堂=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왕에게 학문적 자문을 하던 관청)으로써 일을 의논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러 금고(禁錮)로 해를 경과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서용하게 되니 특이한 은수(恩數=임금이 베푸는 은전의 정도)였다. 그 후에 공이 정충증(怔忡症=까닭없이 불안해 지는 증세)으로 오랫동안 휴가 했다.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진찰케 하고 약제와 반찬을 하사하고 또 중씨(仲氏)에게 묻되 아우의 병이 근래에 어떠한고? 물었다. 지난번에 남으로 바다를 넘고 북으로 변방에 귀양가서 병에 근원이 나로 말미암아 발생했다 하시며 전후에 걸치어 은총으로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왕지(王旨)를 응하여 여섯 가지 조목조목 진달(進達)하고 인하여 공주(公主)의 재택(財宅)이 화려함을 논하여 말이 심히 간절하였다. 옛적 임금이 몸으로 어려움을 이행하여 어름을 안고 불을 잡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러한데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임금이 가상하여 공주의 재택(財宅) 五十간을 회철하라 명했다. 현종(顯宗=조선 18대왕)이 즉위 후 처음 조회에서 영상(領相) 정태화(鄭太和,호는 陽坡, 東萊人)에게 물었다. 이 아무개 형제가 누가 나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난형난제(難兄難弟)라 아뢰었다.

 

상(上)이 말씀하시기를 선왕(先王)이 경억(慶億)은 크게 쓰일 것이라 칭했다하고 이로부터 예우가 날로 융성했다. 그리고 변방(邊方)을 안찰함에 일의 처리가 공정하고 부지런하였다.

 

항상 박한 풍속을 돈독히 하고 탐하는 관리를 추방시키고 적폐(積弊=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를 버리고 군사 일을 수비함으로써 요점으로 삼았다. 호서(湖西=충청도’를 달리 이르는 말)에 있을 적에 사천(私賤=남의 하인)으로 양민(良民=보통사람) 한테 장가들어서 낳은 소생이 아비의 역사를 따르는 것이 그릇된 풍속에 나왔다하여 이제부터 남자는 아비를 따르고 여자는 어머를 따라서 법령으로 제정했다.

 

경기감영(京畿監營=경기 관찰사가 집무 한는 관아/오늘날 서울 종로구 평동 164 적십자병원 자리) 봉급에 여액을 판출하여 관사(館舍)를 건축하여 여섯 곳의 역(驛)에 마부를 거처하게하고 곡식 백(百)여석을 염출하여 거두고 방출할 때는 잉여분(剩餘分)을 취하여 관내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고마(雇馬=시골 관아에서 민간으로부터 세내어 징발하던 말)법을 창작하여 체부에 정한 임금(賃金)을 지급하니 역로(驛路)에서 편리하다 칭하여 지금까지 준행했다. 경조 윤(京兆 尹=조선시대 한성부의 으뜸 벼슬)이 되었을 때, 호적법이 소홀(疏忽=예사롭게 여겨서 정성이나 조심하는 마음이 부족함)하고 그릇됨이 많아서 옛 제도를 밝히기를 권하여 루적(漏積)한 사람은 엄벌했다.

 

스리고 형사(刑事)를 다룰 적에 한결 같이 밝고 삼가는데 있고 청탁을 받지 안했다. 그 후 이조(吏曹)에 있을 때는 요행을 억제하고 품위를 밝히고 침체함을 이르켜 세우되 더욱 동궁관아(東宮官衙=태자가 있는 궁궐) 일에 치중하여 항상 선발에 가의(加意=특별히 마음을 더 씀)하고 수령 방백(守領方伯)의 외직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사람들이 감히 삿 적으로 구하지 못하게 하고 친구 사귀기를 독 실히 하여 마음에 허여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가 좋아하고 미워한다하여 취하고 버리지 않았다.

 

서판서 필원(徐 判書 必遠)과 김 참판 시진(金 參判 始振)이 시대와의 나가는 길이 달라서 사람을 따라 행동하지 않음으로 당국에 빈척(擯斥=싫어서 물리쳐 멀리함)이 되었다. 여러 이름 있는 선비들이 일찍이 친밀한 이도 점차 성글고 끊어졌으나 홀로 공의 형제가 서로 변함없이 보전하여 시종 여일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대부(士大夫)들이 더욱 어질게 느꼈다, 아! 당론(黨論=東人.西人.老論.小論의 부당한 議論)이 성함으로부터 친구의 도리가 더욱 투박하여 서로 영예로 격동하고 서로 권력으로 불러 평생에 서로 흠모하고 서로 추대하여 골육형제(骨肉兄弟)와 같이 사생동거(死生同居) 한다고 하든 사람들도 한 말만 합하지 않으면 팽개치기를 질병과 같이하고 심한사람은 서로 배척하기를 구수(仇讐=자신 또는 자신의 가정이나 나라 따위에 해를 끼치어 원한이 사무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나 집단)와 같이 하였다.

 

공의 형제에 비하면 어떠할까? 관찰사 김징(金澄)이 그런 일을 규탄하기를 좋아해서 원망이 많았고 간관(諫官)에 탄핵한 바가 되었다. 그 사람이 연회(宴會)에 수요(需要=잔치에 소요되는 물자)를 칭탁(稱託=핑계를 댐)하고 재물을 탐했다하여 장차 횡령(橫領)죄를 적용하려했다.

 

공이 의금부에 있어 핵실(覈實=어떤 일이나 사건 따위의 실제 상황을 자세히 살펴봄)하여 다스릴 무렵에 어버이께 헌수(獻壽) 하려다가 죄를 당함이 성세(聖世=어진 임금이 다스려 태평한 시대)의 일이 아니라고 하여 과오를 봐서 어짊을 알 것 「관과지인(觀過知仁) 이라는 古語」이라 하여 평탄하게 주달하였다가 행신(倖臣=임금의 총애를 받아 권리가 좋은 신하) 허적(許積)에 지적한 바가 되어 체포되고 삭직 까지 되었다.

 

공이 마음에 간직하지 않았다. 마음속 행실이 순독하여 어머니를 섬김에 지물(志物)에 봉양이 겸비하여 지극했다. 중씨와 같이 조석으로 좌우에 모시여 공사와 빈객이 아니면 곁을 떠나지 않고 록 봉을 쓰고 줌을 사적으로 않고 질병이 계시면 근심을 다하고 상사(喪事)에 대하여는 예절의 어김이 없었다.

 

중씨와 동거함에 화락하고 세상을 돌아갔을 때는 슬퍼하기를 심히 하여 매양 생각에 눈물 흘리고 소득이 있으면 반듯이 나누어 제사를 궐하게 하지 않았다. 평거에 집안 식구의 살림을 묻지 않으며 담장과 가옥을 수축하지 않고 의복이 한사(寒士=가난하거나 권력 없는 선비)와 같았다.

 

세상 번화한 일에 담담하여 좋아하는 바가 없었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이미 영귀(靈龜) 함에도 오히려 날로 중용(中庸)과 주자서(朱子書)를 취하여 외우기를 게을리 하지 안했다.

 

만년에 휴퇴할 뜻이 있어 노강(鷺江-오늘날 서울의 노량진의 옛 이름) 남쪽에 터전을 마련하여 몸을 마칠 계획을 하려다가 직위와 예우(禮遇=임금이 내린 다우를 말함)가 더욱 무거움으로 인하여 미쳐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공이 늘 세상에 만뢰(挽誄=만장 또는 祭文)와 비갈에 과대 칭찬이 많음을 병폐로 여기었다. 질병이 극심함에 여러 아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내 직위가 경재상(卿宰相)에 이르렀으나 공업이 가히 기록할만한 것이 없으니 만사(輓詞,輓章)를 구하지 말고 시호(諡號)를 청하지 말며 묘비를 세우지 말고 장사(葬事)와 제사(祭祀)는 간소하게 치러서 내 뜻을 따르라 하였다.

 

아! 여기에서 가희 공을 보겠다.

부인은 해평윤씨(海平尹氏)로 현상(賢相) 두수(斗壽)의 증손이고 감찰(監察) 원지(元之)의 따님이다. 부덕(婦德)이 구비하여 시어머니를 섬기고 남편을 섬김에 그 도리를 다하고 동서(同婿)를 대우함에 말이 없고 자녀를 가르침에 법도가 있으며 비복(婢僕=계집종과 사내종)을 대함에 인자하고 자혜로워 한세상 부녀의 사범(師範)이 되었다.

 

아들이 셋이요. 사위가 둘인데 모두 문보(文譜=문과 급제자들에 관한 인명록)에 올랐다. 장자 인숙(寅熽)은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요. 차자 인병(寅炳)은 알성시에 장원으로 형과 함께 문과에 오르고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그쳤다.

 

다음 인엽(寅燁)은 지금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바야흐로 국정에 참여하였다. 둘의 사위는 정승(政丞) 최석정(崔錫鼎)과 지평(持平) 홍만적(洪萬迪)이다. 교리가 이들 셋이니 항곤(恒坤). 형곤(衡坤). 화곤(華坤)이요. 딸은 한사람이다.

 

관찰이 아들 둘인데 서곤(瑞坤). 운곤(運坤)이요. 딸은 둘이다. 판서가 아들 셋인데 하곤(夏坤)은 진사(進士)요. 한곤(漢坤)과 명곤(明坤)이요. 딸이 하나이다. 최 씨 부인은 아들이 하나이니 창대(昌大)가 지금 광주부윤(廣州府尹)이요. 딸이 둘이다.

 

홍씨부인은 아들 셋인데 중구(重九)와 중오(中五). 중일(中一)이요. 딸은 네 사람이다. 나 석정(錫鼎)이 이찍 공(公)의 가문에 장가들어 심심한 대우를 받았다. 고을 섬긴 제가 십여년(十餘年)이다.

 

나아가 그의 행실과 업적을 보고 들어옴에 그의 연거(燕居=한가함) 함을 보아 비록 아는 바는 없으나 또한 그의 몇몇 일을 대강 들을 수 있는데 화하(변화)되 거의 흘러버리지 않고 담박(泊然=욕심이 없고 마음이 평정한 모습)하되 싫정내지 않는 어른이다.

 

형제가 좋은 이름을 같이하여 울연(蔚然=감정이나 생각 따위가 흥성함)히 밝은 시대에 명신이 되었으니 「송경문(宋景文)=宋나라 송기宋祁)의 시호」. 「한충숙(韓忠肅) 형제에 비하면 우열과 상하를 논하기는 쉽지 않으나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면 자못 아는 말이 아니다.

 

아! 시경(詩經)에 숭고(崧高). 강한(江漢) 두 편에 어진 신하를 기를 적에 반드시 주선왕(周宣王=주나라 11대왕)의 덕에 근본 했으니 이것이 어찌 공(公)만이 어질뿐이겠는가!?

 

또한 선왕(先王)에 성덕(盛德=크고 훌륭한 덕)을 보겠도다. 옛 말 에 이르기를 그럼으로 그 시대를 의논한다 하였다. 나 석정(錫鼎)이 이에 거듭 감상(感想)이 있는 것이다.

 

공(公)은 경주(慶州) 사람이다. 원조(遠祖=먼 조상)에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이 덕업과 문장으로 고려 말에 현달하니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 칭하였다. 오대조(五代祖)의 이름은 원(黿)이고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박취금 팽년(朴醉金 彭年)의 외손(外孫)이다. 점필재(佔畢齋)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문행(文行)이 나타났으며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화를 당했다. 어머니 신부인(申夫人)은 즉 중조 조(中宗朝) 때의 명상(名相) 문경공 용개(文景公 用漑)의 후손(後孫)이다.

 

아버지는 승지(承旨) 응구(應榘)이니 성 문간공(成 文簡公=成渾,1535~1598)의 수제자(首弟子)이다. 기국(器局)과 행의(行誼)가 시대에 인중(人中)되었다. 옛적에 남추강 효온(南秋江 孝溫)이 일찍이 재사당(再思堂)의 어짐을 칭찬하여 말했다.

 

본가와 외가 두 집의 미(美)가 한사람에 모았다 하니 나도 꽁(公)의 형제에게 또한 이러는 것이다. 명(銘)에 이르되

 

아! 충익공(忠翼公)은 목릉(穆陵=조선 제14대왕 선조를 말함)에 이름난 경상(卿相)일세.

두 어진 아들이 있어 그 이름이 크도다.

온온한 우리 고(公)은 간솔함을 행하고 곧게 살았네.

공정. 청렴. 민첩. 자혜롭고 결백과 청명으로 지켰도다.

세 조정에 벼슬을 역임하여 나라에 줄기가 되었네.

붕당(朋黨)에 따르지 않고 권력에 기울지 않앗도다.

벗들은 그의 신의를 따르고 백성은 그의 공평함을 칭송햇네.

임금이 말씀하되 숙(叔)씨와 중(仲)씨가 누가 중하고 경한가 하니

영상이 말하되

아! 아우라기도 어렵고 형이 라기도 어렵습니다.

화하되 능히 조수하고 귀하되 교만하지 않았도다.

직위는 재상에 이르렀으니 아름답게 훌륭한 명망이 잇네.

후손에게 끼쳐줌에 또한 남은 경사가 있도다.

묘소가 길지를 만나니 영세(永世)에 편안 하도다.

묘문(墓文)에 넘친 말이 없으니 공경히 평생 사를 지었을 뿐이라.

 

옮긴이 : 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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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政府左議政華谷李公墓碣銘

 

明谷 崔錫鼎 撰

 

穆陵在宥。有名臣曰碧梧李公諱時發。官刑曹判書。諡忠翼。繼娶申夫人生二子。吏曹判書諱慶徽。左議政諱慶億。歷事 仁孝顯三朝。世稱賢公卿。議政公字錫爾。號華谷。以泰昌庚申生。七歲而孤。申夫人賢而通文史。身自爲師。日夜敎督。及長。詞華蔚然。崇禎甲申。擢庭試壯元。歷拜禮兵郞,司書,正言。 孝宗特除弘文修撰。不階薦錄。人以爲華。累入玉堂春坊。以政府舍人。陞拜忠淸道觀察使。 顯宗初。以承旨移大司成。又自大諫移副學。特授漢城右尹。歷畿伯,都憲,參銓。陞判刑曹。歷戶禮工判書,三四宰。前後凡三拜冢宰。兼備邊宣惠槐院提調。壬子。進拜右議政。俄陞左相。年五十有四卒。 上震悼輟朝。弔祭賻賵。官庀殯窆如禮。命給祿終三年。初葬鎭川。後十年甲子。遷葬于淸安茅山辛向原。夫人祔焉。公爲人內剛而外溫。美鬚髥。神淸貌癯。與人和樂。未嘗有失色。不窮斥人過。然言辭簡重。不惡而嚴。其立朝處心持論。常主於平允。至是非邪正。所守確然。當官莅事。守憲令惟謹。存大體不苛。嬈然所在。必有規爲。可爲永久法。居家潔廉孝友。有人所不及者。然咸近自然。不假修飾。與仲氏同時顯用。爲士林領袖。當是時。士大夫多刻厲名行。言議風生。而公兄弟恬平眞素。恥爲矯激之行。識者心服。 孝宗初爲正言。上封事累千言。請立志勤學。謹天戒結人心修軍政。因訟趙公翼爲賢師卞誣。非出於偏係。 上優答。旌義縣監安緝。與濟州牧使金壽翼交惡。緝武人也。謂上官漁貨。爭詰不遜。道臣狀聞。特遣御史按覈。公承命往。衷其枉直而歸奏。始 上意公以文武。有所左右。得奏明核無縱舍。大嘉之。勘壽翼等罪如公言。又以御史按察嶺南軍政。以推刷往嶺南。以暗行廉問畿甸。皆稱旨。大司憲趙公錫胤以非罪特罷。公爭之。 上大怒。辭旨極嚴。命栫棘鏡城。踰年放還。居數年。以正言筵對。 上召公使前。玉色溫然曰。耽羅按事甚公正。予用爾嘉。往時嚴譴。是予聲色太遽。予悔予過。爾其無懲前事。益勉方來。顧謂筵臣曰。李某之父爲誰。大臣對曰。是 宣廟朝名臣李時發之子也。先是仲氏以玉堂論事忤旨。錮且經歲。至是始命甄敍。異數也。其後公患怔忡。在告久。命御醫診視。賜藥劑珍膳。又問仲氏曰。爾弟病近比何如。往者南踰海北竄塞。病源祟此。由予致之。其前後寵遇如此。嘗應旨條陳六事。仍論主第宏麗。言甚剴切。有曰古之人君。躬履艱難。有抱氷握火之志者。必不留心於此。 上嘉納。命撤主第五十間。 顯宗初朝而問領相鄭太和曰。李某兄弟孰優。對以難兄難弟。 上曰。 先王稱慶億可大用。自是眷遇日隆。其按藩。聽斷公勤。恒以敦薄俗戢貪吏祛積弊修武備爲要。在湖西。以私賤娶良所生從父役。出於俗謬。請自今男從父女從母。定爲絜令。在畿營。斥俸餘搆舍。以館六驛夫馬。捐穀百餘石。斂散取贏。以濟其乏。創雇馬法。以資遞立。驛路稱便。行之至今。其爲京兆。以版籍多疏謬。請申明舊制。漏籍者嚴其律。其理刑獄。一出於明愼。不受請托。其秉銓。抑僥倖。淸品流振淹滯。尤致意 東宮僚屬。常加遴選。愼擇外官。牧伯之職。人不敢私求。篤於交友。苟心所與。不以衆好惡爲取舍。徐判書必遠,金參判始振。與時詭趨不能隨人俯仰。爲當路所擯。諸名流所嘗親密。浸以疏絶。獨公兄弟相保母變。卒與之終始。由是學士大夫益賢之。噫。自黨議益盛。朋友道益偸薄。相激以名。相招以權。生平相慕悅相推重。謂若骨肉兄弟然。以死生相爲者。一言不相入。棄之若厲。甚至相排擊若寇讎。此其視公兄弟。爲何如也。金觀察澄以喜彈射多怨。爲諫官所劾。謂其托宴需饕貨。將致贓律。公以知義禁按治。以爲壽親而獲罪。非 聖世事。引觀過知仁平奏之。爲倖相積所詆。被逮削職。公不以爲意。內行純篤。事大夫人。志物兼至。與仲氏朝夕左右。非公事賓客。不去側。祿俸餽遺無敢私。侍疾致憂。居喪無違禮。與仲氏同居。盡湛和之樂。及沒哀甚。每念出涕。有得必分。毋乏其祀。平居不問家人產業。不修垣屋。被服如寒士。於世味紛華。泊然無所好。好讀書。旣貴。猶日取中庸朱子書。誦數不怠。晩年有退休志。卜築鷺江之南。爲終焉計。因位遇益重。未及遂而遽歿。公每病世之挽誄碑碣多溢美。疾甚。謂諸子曰。吾致位卿相。而無功業可紀。愼勿求挽詞。毋請諡。毋樹墓碑。葬祭簡而毋豐。以明吾志。嗚呼。此可以觀公矣。夫人海平尹氏。賢相斗壽之曾孫。監察元之之女。婦德甚備。事姑事君子。盡其道。處妯娌無間言。訓子女有法。御婢僕。嚴而惠。爲一世婦女師範。子男三人。子壻二人。俱籍文譜。長寅熽弘文校理。次寅炳謁聖狀元。與兄同榜。官止觀察。次寅燁今爲兵曹判書。方柄用。二壻議政崔錫鼎持平洪萬迪。校理三男。恒坤,衡坤,嵩坤。女一人。觀察二男。瑞坤,運坤。女二人。判書三男。夏坤進士狀元。漢坤,明坤。女一人。崔氏婦一男昌大。今廣州府尹。女二人。洪氏婦三男。重九,重五,重一。女四人。錫鼎早贅公門。辱視遇甚。得事公十年餘矣。出而觀其行業。入而覵其閒燕。雖無所識知。亦可謂粗得其一二。庶幾乎和而不流。淡而不厭者焉。仲季並美。蔚爲煕代名臣。其比宋景文,韓忠肅兄弟。未易軒輊。謂古今人不相及。殆非知言也。嗚呼。崧高江漢。必本諸周宣之德。則此奚獨公之賢哉。亦有以覩夫 先王之盛。傳曰。是以論其世也。錫鼎於是重有感焉。公慶州人。遠祖文忠公諱齊賢。以德業文章。顯于麗季。世稱益齋先生。五代祖諱黿。號再思。朴醉琴彭年之外孫。遊沾畢齋門。文行著稱。被戊午史禍。申夫人。卽 中宗朝名相文景公用漑之後。考承旨應榘。成文簡高弟。以器識行義。見重於時。昔南秋江孝溫嘗稱再思之賢曰。內外兩家之美。鍾於一人。不佞於公兄弟亦云。銘曰。

 

猗嗟忠翼。 穆陵名卿。有二子賢。遹大厥聲。溫溫我公。行簡居貞。公廉敏惠。持以潔淸。歷職 三朝。爲國榦楨。弗朋以隨。弗權以傾。友服其信。民誦其平。 王曰叔仲。孰斯重輕。相君曰都。難弟難兄。和而能守。貴而不盈。位極三事。休有令名。詒我後人。又食其贏。宅兆云吉。氷世攸寧。墓詞無溢。秪述平生<끝>

 

명곡집 > 明谷集卷之二十四 / 碣銘